개인적 경험이 공적인 배려로 치환되기 위한 마음가짐
2018년 회사를 다니다 학교로 옮겨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직업도 교수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교수의 삶을 목격했지만, 직접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고 연구에 매진하는 일이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교수사회가 '봉사' 내지는 '보직'이라고 부르는 행정적인 업무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회사 생활에서 두루 경험하는 직무나 사내 관계성의 일부를 교수의 주요 업무인 연구와 교육 안으로 치환하는 일이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대학으로 오기 전 짧은 공직 생활을 통해 경험한 한국의 평균적인 조직 문화, 혹은 업무의 처리 과정은 대학교 안에서 그대로 적용되기 힘든 측면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수가 행하는 연구는 대부분 개인적 관심사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물론 사회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 개인적 호기심이라는 뜻은 아니다. 학술연구의 출발은 인류에 대한 공헌, 좁게는 관련 학문분야에 대한 잠재적 공헌을 기본적 전제로 한다. 다만, 연구주제의 선정이 외부의 지시, 혹은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의미다. 물론 외부 연구용역 등 특정 금액을 약속받고 행하는 연구는 주제와 결과물이 명확히 정해지는 편이지만, 용역 계약 전 이에 대해 명확히 인지한 상태이니 연구 주제를 자기 뜻대로 선택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억울함은 전혀 없다. 이에 반해 조직 내에서 행하는 연구는, 같은 이름을 하고 있지만 주제의 선택 및 방법론의 사용, 도출되는 결과의 방향성까지 학술 연구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 조직에서 원하는 방향성이 정해진 상태에서 조직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가 수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연구의 자율성이 큰 폭으로 제한당하는 환경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말이다.
교내에서 맺는 인간관계 역시 사회에서의 그것과 대칭적이지 않다. 우선 학생은 회사 동료가 아니며, 더 나아가 업무 지시가 가능한 부하 직원도 아니다. 강의실에서 어느 정도의 위계질서는 존재하지만 이는 '지식의 전파자와 수용자' 간에 발생하는 일반적인 관계, 혹은 학점이나 졸업장을 취득하려는 '수요자'와 그 적격성 여부를 판단하는 '공급자' 간 발생하는 시장의 균형 상태일 뿐, 교수가 학생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는 결코 아닌 것이다. 학과장과 같은 교내 부서의 장을 맡는다고 해도 직접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부서에 소속된 학교 행정 직원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내 보직은 2년에서 4년 정도로 임기가 정해져 있으므로, 직원 간의 관계도 전적으로 수직적이지는 않는 것 같다. 교수 들 간에도 위계질서가 명확히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큰 특징이다. 교수들 간 희미한 '선후배' 관계가 존재하지만, 이 역시 나라마다, 학교마다 기준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어떤 학교는 나이순으로, 다른 학교는 임용순으로 선후배 관계가 정리된다. 그리고 그 선후배 관계가 업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소속된 학과에서는 기껏해야 다음 학기 담당 교과목을 정할 때 우선권을 부여하는 정도? 그 역시 사전 협의 등을 통해 충분히 조정될 여지가 있다.
이처럼 대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업무(연구 및 교육)는 상대적으로 훨씬 개인적인 색깔을 띤다. 또한 수평적이다. 하지만 이 수평적인 대학 문화에서도 유독 이질적으로 수직적인 성격을 지니는 관계가 있으니, 바로 지도교수와 지도학생 간의 관계다. 예전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말이 폭넓게 통용되었지만, 요즘에는 자신을 스승이라 지칭하는 교수도 없고, 자신을 누군가의 제자라고 소개하는 대학원생도 없다. 지도교수는 대학원생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학위 취득을 위해 조언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으며, 대학원생은 지도교수를 선택하여 그로부터 지식을 습득한 뒤 성공적으로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단순한 직무 분장이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학위를 목적으로 학교에 들어온 대학원생은 '학위'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즉, 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인에 취약한 편이다. 대학원생의 학위 취득 여부를 결정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의 지도교수이기에, 비록 대학원생 본인이 선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학위 취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도교수의 영향력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물론, 교수 역시 훌륭한 대학원생을 유치할 경우 보인 연구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관계성이나 권력의 방향이 반드시 일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대학원생을 유치하지 못해 교수에게 발생하는 비용은, 지도교수의 '몽니' 등으로 인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5~6년에 걸친 학업 부분의 성취가 학위 취득으로 이어지지 못해 대학원생에게 발생하는 비용에 비하면 조족지혈 수준이기에, 어쩔 수 없이 대학원생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 경향이 강하다. 다른 말로 하면, 지도교수와 지도학생 간 역학 관계를 충분히 고려한 교수라면 지도학생이 어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에 대해 자발적으로 배려나 편의를 제공해야 하나, '갑'의 위치에 있는 많은 교수들이 굳이 '을'의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나 역시 이러한 딜레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박사과정에서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만큼 중요하고도 좋은 지도교수를 만났다. 돌이켜보면, 그가 매우 훌륭한, 이상적인 지도교수는 아니었다. 요즘 공부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나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거의 주지 못했다!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세부적인 가르침을 주는 지도교수는 결코 아니었는데, 모르는 부분에 대해 물어보면 '그건 저 논문 읽어봐'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들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머릿속에 부여잡고 며칠 끙끙거리다 보면 뒤늦게 그의 말에서 커다란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의 어떤 발언은 몇 년 뒤에야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다만, 그는 전공 분야에 대한 세부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태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지도학생을 대하는 지도교수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박사과정 1년 차부터 6년 차까지, 약 6년 동안 그와 사제 간의 관계를 지속해 왔다. 짧게는 일주일에 한 번, 아무리 적게 만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꼬박꼬박 만나 나의 논문 진행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지도교수와 연구실 밖에서 만난 적은 오직 딱 한 번, 경제학 박사 후보생들을 위한 취업시장이 열린 도시의 한 호텔 펍에서 만나 면접 전략에 대해 이야기할 때뿐이었으며, 같은 학교에 있었던 5년 동안 우리는 식사 한 번 , 커피 한 잔 함께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친절했으며, 나의 고민과 걱정에 대해 늘 적절하고도 냉정한 충고를 해주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의 학업과 학위논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날 오전 지도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며칠간 답장이 없던 아버지에게 메일이 왔다. 큰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큰아버지는 내게 멘토이자 롤모델이었다. 그처럼 되고 싶어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한 예비 과정인 예비 신학생 모임에 나갔고, 젊은 시절 큰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유학 기간 중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 큰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메일에 아버지는 답장을 하지 않고 계셨다.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뒤에야 사후적으로 전달을 해주신 것이다. 그날은 도저히 논문에 대해 이야기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지도교수에게 처음으로 사적인 이유로 미팅을 연기해도 되는지 물었고, 지도교수는 애도의 뜻을 표함과 함께 당연히 미팅 연기를 허락해 주었다. 짧은 문구의 답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1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지도교수에 대한 고마움이 깊게 남아 있다. 장례 미사조차 갈 수 없는 먼 곳에 몸이 묶여 상당히 서러웠는데, 큰아버지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 교수에게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날 하루 내 연구실에서 눈물 몇 방울 흘린 뒤, 다음날 지도교수의 연구실로 다시 올라갔다.
이때의 기억,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많은 기억이 있다. 지도교수는 내가 학업 때문에 힘들어 전학을 생각할 때에도 차분하게 내가 갈 수 있는 학교와 가지 못할 학교를 추려 주었다. 결과적으로 계속 그와 함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학교로 가고 싶어 했던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고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만 열리는 신흥 거시경제학회가 있다. 2010년대 초반에 결성되어 빠른 속도로 규모와 명성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마침 이 학회가 우리 학교 주관으로 열린 적이 있었다. 내 지도교수는 우리 학교에서 드문 거시경제 전공자여서 학회 조직위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힘(?)을 이용하여 나를 한 세션의 발표자로 참가하게 해 주었다. 박사과정 학생이 쓴 아주 형편없는 논문이었음에도, 전 세계에서 온 저명한 경제학자들에게 좋은 코멘트를 받을 수 있었고, 지금도 그때의 강렬한 경험이 남아 있어 매년 그 학회의 논문 모집 공고(call for paper)가 뜨면 유심히 읽어보곤 한다. 지금까지는 육아와 팬데믹으로 인해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가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내년쯤에 반드시 한 번 가볼 생각이다.
위와 같은 경험들이 축적되어 현재의 내 가치관을 형성했다. 최소한 지도교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일을 할 때에는, 내 지도교수에게 배운 것들이 체화되고 체현되는 것을 느낀다. 일주일, 혹은 이주일에 한 번씩 지도학생을 만나 그의 논문 진행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서 말해준다. 그 외의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한다. 가끔 지도교수와의 개인적인 친밀도를 증대시키려 하는 대학원생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조기에 철저히 차단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대학원생들과 식사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지도교수님은 터키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인과 결혼한 서양인이었지만,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주로 동양인 대학원생들을 상대하는 어쩔 수 없는 아시아 사람이니, 이 문화권에서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식사문화를 애써 무시할 생각은 없다. 이건 아버지에게 배운 것을 써먹는다. 내 아버지는 매 학기 마지막 대학원 수업을 항상 자택에서 행했다. 그러니까 내가 살던 집 말이다. 열 명 정도의 대학원생이 오후에 집으로 우르르 들어와 몇 시간에 걸쳐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눈 뒤 마당으로 나가 고기를 구워 먹고 기타를 치며 놀다 밤늦게 돌아갔다. 매 학기 한 번 있는 이 생경한 경험이, 나중에 아버지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대학원생을 집으로 초대할 생각은 (아내의 입장을 고려하여) 전혀 없었고, 학교 근처 식당에서 매 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마저 팬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올해부터 다시 한번 해볼 생각이다.
졸업을 했거나 현재 재학 중인 나의 지도학생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바라볼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내 앞에서야 좋은 말들을 늘어놓겠지만, 속으로는 아마 원한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지도교수의 임무는 지도학생의 부족함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후벼 파는 것이기에, 감정적으로 속이 상할 위험이 다분하다. 때문에 학위 논문의 질을 높이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아야 하지만, 그 과정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치환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하지만 나 역시 대학원생으로 살았던 기간이 6년이나 존재하니, 그 당시의 기억을 꺼내어 생각해 보면 지도학생을 위해 편의나 배려를 제공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논문에서 심대한 결함이 발견되었다면, 그전에 "넌 이러이러한 부분을 잘하고 있어. 그러니 이 부분을 조금만 더 발전시키면 아주 좋을 것 같아."와 같은 식의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 것은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의 화법이었다. 그는 한 없이 부족한 내 학업능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칭찬할 부분을 찾기 위해 애썼다. 5%의 칭찬과 95%의 지적으로 이루어진 면담이라 해도, 지도학생 입장에서는 5%의 칭찬 덕분에 그의 지적이 힐난이나 깎아내림이 아닌 배려와 합당한 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지도학생이 내가 지시하거나 부릴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학문적 동지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조금 늦게 따라오기 때문에 조금 앞에서 끌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대한다. 그런 나의 자세, 혹은 태도가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면, 지도학생이 감정적으로 다칠 일은 크게 줄어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겪은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현재 나와 함께 공부하는 중국인 박사과정 지도학생이 한 명 있다. 중국에서는 경제학이 아닌 한국어를 전공했고, 한국으로 유학 온 후에도 석사 과정 진학 때까지 한국어를 계속 전공했기에 내가 소속된 학과의 석사학위 전공으로 입학 당시만 해도 전공 기초지식이 전무한 상태라 강의를 따라가는 것을 힘들어하던 친구였다. 때문에 이 학생이 나를 지도교수로 선택했을 때 꽤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석사학위를 거쳐 박사과정까지 총 4년 넘게 나와 함께 공부하고 있다. 이 지도학생을 대하는 과정에서 "논문은 절반의 기술과 절반의 예술로 완성된다"는 학부 시절 교수님의 조언이나, "분석 방법론과 전공 지식의 함양은 항상 함께 성장해야 한다"던 지도교수님의 충고가 자주 떠올랐다. 모국어가 아니어서 서툰 한국어로 학위 논문을 쓰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박사학위 논문은 영어로 써보자고 회유해서 두 배로 힘든 이 학생에게 박사 수준의 관련 지식까지 압축해서 전달해야 하니 여러모로 괴로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 학생이 고마운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교수님 같은 교수가 되고 싶어요. 제가 물어보면 당장은 잘 몰라도 스스로 공부해서라도 알려주시고, 항상 친절하게 잘 대해주시잖아요. 학생들에게 그런 교수가 되고 싶어요."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지식이 충만하여 학업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교수는 아니지만, 학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며, 그 과정에서 학생이 충분히 배려받는다고 느낄 만큼의 싸가지는 가지고 있는 지도교수라는 평이다. 퍽 고마웠다. 연구실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매 순간 싸워야 하는 교수는 어쩌면 매우 외로운 직업이다. 그런 직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역설적으로 주변의 타인으로부터 나온다. 아주 작은 인정. 그것이 지도학생과 같이 노력과 애정을 경주한 대상일 경우, 짤막한 인정은 큰 동기부여로 다가온다.
다른 하나의 일화 역시 중국인 박사과정 지도학생과 관련된 일인데, 이번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중년의 늦깎이 남성 대학원생이다. 커리어 내내 중국의 제약회사에서 근무한 전형적인 이공계 출신이지만, 아내가 내가 속한 단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중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뒤늦게 같은 전공 계열의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이 분의 경우 전공 기초지식이 현저히 부족한 것에 더해 자신의 커리어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나름의 논리(?)까지 굳센 편이라 학문적인 지도가 수월하지 않았다. 교수의 충고나 조언, 설득이 먹히지 않고 자기 고양적 편향이 심한 편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도학생들과는 다르게 연구실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잦았다. 최근 1~2년 간 교수로서 가장 큰 도전과제가 이 학생에 대한 지도였다. 하지만 지도를 포기(?)해버리기에는 학문적인 열정이 대단하여 거의 매일 연구실로 찾아왔고, 늦은 밤까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모친이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게 되어 잠시 중국으로 귀국하는 일이 있었다.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그는 곧장 내게 메일을 보내 향후 학업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며칠 뒤 부친이 암에 걸려 곧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연이어 터진 가족의 나쁜 소식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부친의 투병 및 이 지도학생의 간호 기간이 길어질 경우 발생하는 행정적인 이슈들을 정리해 주는 것 정도였다. 휴학, 장학금, 재입국 등 관련된 사항을 관계자와의 협의를 통해 정리하여 학생에게 전달해 주고 내년 중순으로 기한이 걸린 장학금 수혜에 대한 연구 결과물 제출 문제는 내가 쓴 논문에 학생을 공저자로 포함시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오늘 이 학생은 무사히 출국하였고, 출국하면서 내게 남긴 이메일에는 "당신이 내 지도교수여서 다행이라고 느낀다."는 문구가 있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해 영어로 소통한다) 연구실에서 치열하게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는 사이라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기에 감정적인 표현을 전달받는 것이 조금 어색했지만, 아마도 내가 나의 지도교수에게 느꼈을 정도의 고마움이라 짐작하고 이해했다. 이 학생이 중국으로 돌아간 후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물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학교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한번 대학원을 떠난 사람이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와 논문을 마무리 짓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뒤로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기회를 포기한 채 가난하고 굴욕적인 박사과정 생활로, 그것도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의 한 대학으로 돌아갈 결심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그의 귀국에 동의했다. 학위나 논문보다 가족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깟 논문, 그깟 학위에 얽매여 가족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수로서 행하는 많은 일들은 대부분 아래를 향하고 있다. 교육이 그렇고, 광범위한 범위에서의 연구가 그러하며, 연구와 교육이 결합된 대학원생 지도 역시 그러하다. 행정업무 역시 나 외의 타인의 복지(보직을 맡지 않는 동료 교수의 행복한 교수생활)를 위한 희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행정업무를 맡는 교수의 업무 평가에는 '봉사' 점수가 가산된다) 문제는 마음가짐이다. 나의 노력으로 인해 산출되는 결과물이 대부분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일 때, 그리고 수혜를 받는 사람 대부분이 나보다 나은 형편이 되지 못할 때,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업무에 임해야 하는가.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다 하원 시간이 되어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짧은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네'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것이 가끔 자조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오직 나의 학문적 성취를 위한 하루를 온전히 살아보는 것이 (역설적으로) 교수가 된 후 항상 꿈꾸는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력으로 인해 타인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게 됨을 확인하는 순간, 상당히 큰 감정적 보상을 느낀다. 최소한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이 소모되는 삶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되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설 힘과 용기를 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퇴근 후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다시 한번, 다른 차원에서의 타인을 위한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뜨면서 잠들기 전까지 거의 매 순간 타인을 위해 사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