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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Sep 13. 2024

엄마와 연락을 끊은 후

아들과 엄마가 맺어온 오랜 관계의 맺음에 관하여 

최근 엄마와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절연'과 같은 강한 느낌의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완전한 관계의 파탄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엄마, 아빠, 나, 그리고 아내가 참여하는 단체 카톡방은 살아있고, 엄마는 카톡방에서 여전히 우리 가족의 안부를 살갑게 묻는다. 아내는 나를 대신하여 아이들의 사진을 올리거나 우리의 근황을 전달한다. 서로의 소식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지낸다는 점에서 엄마와 나는 여전히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엄마와 직접 대화하지 않는다. 엄마 역시 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살지 않게 된 후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엄마의 어디가 아픈지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고, 엄마는 유튜브 자동 로그인이 풀리거나 프린터 연결이 되지 않는 등 아주 사사로운 부분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그런 편한 관계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건강상태를 궁금해하지 않고, 엄마는 나의 도움이 부재하여 발생하는 생활의 불편함을 그대로 감수할 것이다. 엄마는 넷플릭스 로그인이 되지 않아 좋아하는 드라마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어도 나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엄마에게서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류머티즘 증상이 최근 발현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엄마에게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트리거가 된 사건은 있었다. 최근 우리 가족이 지방에서 서울로 재이주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나 사이에서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아내와 나의 출퇴근 동선 및 아이들을 위한 육아 환경, 주변 인프라, 아파트의 편의시설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한 목적지가 공교롭게도 누나의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다. 나는 조카들을 비롯한 누나의 가족과 조금 더 자주 만날 수 있다는 반가운 마음에 누나에게 "앞으로 자주 만나자"는 이야기를 가볍게 건넸다. 하지만 누나와 엄마의 입장은 달랐다. 누나는 조카들이 성장한 이후 재취업을 시도해 왔으나 계속 실패하고 있던 중이었다. 더군다나 첫째 조카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수험생 생활을 시작하던 터였으므로, 동생의 자주 만나자는 말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매일 전화를 나누며 미주알고주알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해 온 누나와 조금 더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는데, 엄마 역시 자녀들을 키우며 본인의 커리어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오랜 전부터 엄마는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반드시 배우자도 일을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해왔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당신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조금 쓸쓸한 후회로부터 우러나온 조언이었다. 엄마와 누나가 공유하는 그 감정을,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온 나는 잘 모른다. 


서로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나,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누나는 나에게 "아이들이 응급실에 갈 상황에서도 절대 연락하지 말라"라고 말했고, 엄마는 나를 "철없고 이기적인" 막내로 묘사했다. 더 나아가 엄마는 누나와 내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고 정의하며,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함부로 무언가를 부탁하지 말 것을 강한 어조로 요구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탁"이라 함은 아마도 내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청탁을 의미할 것이다. 누나가 나의 아이들을 돌봐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엄마와 누나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표현했다. 그들이 격하게 반응한 데에는 나의 오해할 만한 언행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앞으로 자주 만나자"라는 말이 그런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나에게는 상당히 큰 상처를 주었다. 왜냐하면, 결혼 후 지금까지 육아와 관련된, 혹은 나의 가족과 관련된 그 어떠한 것도 누나에게 부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다.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발생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다. 엄마는 또 어떠한가. 육아에 대한 부탁을 엄마에게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신생아 시절 두어 번 올라와 며칠 머물다 가신 것이 전부다. 그조차 더이상 엄마가 어린 아기를 돌보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부터는 이에 관련된 부탁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다. 한편, 부모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주된 이유로 들며 한사코 우리 집에 방문하는 것을 거부했다. 우리의 부모님댁 방문도 같은 이유로 계속 거절해 왔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부부의 몫으로 남겨졌고, 양가 부모 및 형제의 도움을 받아 육아와 가사를 하는 주변 가족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만에 하나 누나와 엄마에게 의존적인 성향을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보였다면, 당시의 비난과 요구를 겸허히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나의 삶은 철저히 누나와 엄마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되새김질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새롭게 알게 된 여러 의미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 내 삶에 더 큰 도움이 된다. 먼저,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누나와 엄마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 나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이다. 만약 두 명의 조카가 누나의 집을 떠나 며칠 동안 나의 집에 머물겠다고 한다면, 나와 아내는 별다른 고민 없이 흔쾌히 그러자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유일한 조카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내 삶에 피해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피해가 된다 한들, 조카들은 나의 '가족'이기 때문에 능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을 것이다. 나에게 가족이란, 조금 과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고, 서로 조금씩 몸을 치대며, 가끔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는, 그렇게 진흙탕 속에서 몸을 함께 뒹굴거리며 살아가는 사이다. 때문에 서울로 올라온 후 거의 매 주말을 함께 보내는 아내의 친한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내게 이미 가족이거나 곧 가족이 될 사람들이다. 얼마 전 부모님께 중고차를 장만해 드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며칠간 일과를 뒤로 젖혀둔 채 중고차 딜러와 수차례 통화를 하며 좋은 딜을 찾아냈고, 부족한 대금을 대신 지급한 뒤 부모님의 시골집으로 중고차를 배달해 드렸다. 그 과정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가족이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은 사이니까. 우리나라는 가족 중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사실을 사법당국에 알리지 않거나  가족을 사법당국으로부터 숨겨주는 적극적인 행위를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형법 제151조) 타인과의 사회적 약속보다 가족의 정이 우선한다는 것을 법체계 역시 인정한 셈이다. 


생각해 보니 엄마는 지금까지 항상 나와 내 가족으로부터 당신 가족을 떨어뜨리기 위해 선을 그어왔던 것 같다. 앞서 적은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이라는 이유로 가족 간 만남을 극도로 피해왔는데, 그 정도가 지나치게 심해 며느리인 아내가 섭섭해할 정도였다. 나는 내 자녀들과 그렇게 선을 긋고 살고 싶지 않다. 만약 루나와 태오가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루나와 태오를 위로하고 그들의 피로를 낮추어 주기 위해 기꺼이 어려운 길을 뚫고 그들의 곁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와 내 가족을 자꾸 밀쳐냈다. 누나도 엄마의 그러한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아주 큰 가족행사가 아니면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거의 하지 않았다. 활달한 성격의 아내가 억지로 시간을 맞추어 제안을 해야 마지못해 승낙하는 식이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그동안 엄마와 누나에게 우리 가족이 불청객은 아니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를 그렇게 가깝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눈치 없이 들이댄 것은 아닌가 살짝 민망해지기까지 했다. 분명 20년 넘게 한 지붕 아래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사람들인데, 이제 상대방의 입장을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 '타인'으로 인식해야 하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지나치게 차가운 이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쏟아온 사랑과 애정이 유독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쓸쓸함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입장 차이를 발견한 것이 연락을 끊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아내가 그 중 한 명으로, 요즘에도 언제쯤 엄마와 화해할 것인지 계속 물어본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어쩌면 꽤 오랜 기간 동안 엄마와 다시 대화를 시작한 의사가 없다. 엄마가 먼저 대화를 청해 온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의사는 있으나, 결국 나의 생각과 입장을 정확히 전달한 후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올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굳어진 데에는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보다 (상처는 결국 아물게 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엄마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어느 정도 도출한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운이 좋게도 엄마의 몸으로부터 태어나 엄마의 품을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곳으로 인식하며 성장하였다. 기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네며 살아왔다. 하지만 자녀는 태어난 직후부터 끊임없이 부모로부터 멀어지는 존재라는 사실은 태오와 루나를 낳은 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루나와 태오가 세상을 접하는 면을 넓혀 나갈수록, 그들의 곁을 지키는 나의 자리는 조금씩 줄어든다. 이것을 알게 된 부모는 가만히 자녀를 떠나보내면 안된다. 자녀가 멀어지는 과정을 그저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울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자녀의 물리적, 정신적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부모 역시 자녀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나 자녀로서의 경험을 부모로서의 경험보다 먼저 접하기 때문이며, 부모는 끊임없이 주려고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태오와 루나가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어느 순간부터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마음의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다. 태오와 루나가 그들만의 가족을 꾸린 후에도(그것이 1인 가구라 해도), 항상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언제든지 그들에게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그들이 없는 나의 삶 역시 계속 존재해야 한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삶, 그리고 그들이 다 자라 떠난 후에도 계속 살아져야 하는 나만의 삶이 있다. 내 삶 속에서 태오와 루나가 함께 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아주 짧은 기간이다. 맑은 영혼이 둘이나 잠시 나를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 그들이 관여할 수 없는 나의 인생이 있다. 골치 아픈 것은 이 인생이 비록 과거로부터 이어온 것이지만 과거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태오가 좋아하는 공룡의 화석을 예로 들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티라노사우르스의 화석이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전과 후가 결코 같을 수 없듯이, 태오와 루나가 다녀간 후의 나의 삶도 결코 전과 같을 수 없다. 나는 태오와 루나에게 발견되었고,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들의 곁에 상주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내가 깨달은 것은, 결국 자녀와 부모는 어느 시점에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서도 안된다. 일방적인 이별이어서는 안되며,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가 지켜져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비로소 부모의 보호를 떠나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립을 이루었을 때, 바로 그 시점에서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했다. 엄마와 내가 서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가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셈이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과거의 엄마를 현재의 엄마와 동일시하며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나에 대한 오해를, 나는 엄마에 대한 기대를 그릇된 방향으로 키워왔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갈아 넣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가끔 부모님 댁에 방문할 때 "이제는 아이들이 하는 말은 조금은 알아듣네", 혹은 "아이들이 너를 어려워 하지는 않니?"와 같은 터무니없는 말을 할 때 엄마의 몰이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커리어를 이어오는 과정에서 단 한번도 육아와 가사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 과정에서 나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만약 그 사실을 알아야 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엄마여야만 했는데, 엄마는 지나치게 나에게 무심했다. 여전히 나를 나약하고 철부지 같은 막내아들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나는 엄마가 여전히 나의 엄마이기를 바라며 살아온 것 같다. 경제적 독립과 결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나는 서서히 '아들'에서 '아빠'로 정체성을 바꾸어왔다. 개인으로서의 나를 내려 놓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자아를 찾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의 아빠로 존재한다면, 더 이상 다른 어떤 이의 아들로서 기능할 필요는 없다. 이제 나와 엄마 모두 그저 같은 '부모'일뿐이다.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엄마가 말했던 대로 "한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라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태오와 루나의 아비일 뿐, 더이상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닌 것이다.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위로받고 싶은 마지막 한 톨의 욕구조차 사치인 것이고, 나는 그것조차 포기해야 진정한 아빠가 되는 것인가 싶다. 성인 아들이 늙은 부모에게 해야 하는 다양한 의무를 게을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이제 나도 누군가의 부모이므로, 사실이 아닌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오해와 꾸지람, 불필요한 충고들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더 나아가, 좋은 아들이자 좋은 부모라고, 하나뿐인 나의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철부지 아들로서의 마지막 욕심마저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제는 엄마와의 관계가 그 역할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영혼이다. 내 정체성의 절반, 혹은 그 이상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자 지금의 나를 만든 몇 명 중 하나이므로, 죽는 날까지 엄마의 존재를 잊지 못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관계는 과거로 존재한다. 더 이상 그 어떠한 생산적인 감정도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느낀다. 그것이 서글프거나 쓸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받아들여야 하는, 받아들여야 했던 운명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조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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