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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Nov 08. 2024

노인을 위한, 혹은 위하지 않는 나라

대중교통의 교통약자석을 점유한 노인들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대중교통에는 교통약자를 위한 좌석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커다란 안내 문구에 색깔도 달리 하여 그 누구라도 앉기 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좌석이 지하철의 각 칸마다, 버스의 가장 좋은 자리마다 위치한다. 서울 지하철의 안내를 기준으로 하면 '교통약자'는 크게 65세 이상의 고령, 장애인, 임신한 여성, 그리고 미취학 어린이 등 네 계층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다리 등을 다쳐 거동이 불편한 일반인도 교통약자석을 배려받을 수 있다. 그런데 교통약자석에 실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노인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몇십 년의 시간 동안 수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교통약자석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으며, 배가 부른 여성이 앉아 있는 경우도 거의 보지 못했다. 중증 장애인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마주친 사례 자체가 드물다. 더 나아가, 임신 여성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배려석까지 가임기간이 훌쩍 지나 보이는 노령의 여성, 혹은 심지어 노령의 남성들이 앉아 있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다양한 교통약자를 위해 마련된 좌석이 노인들에 위해 점유당한 이유는 당연히 노인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가 202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교통약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30.9%를 차지하며, 이 중 약 61.3%가 65세 이상의 고령자다. 즉,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에 탑승하는 교통약자 열 명 중 여섯 명은 고령자이니, 이들을 위한 배려석에 착석한 고령자를 보다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고령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지 않음에도, 왜 우리는 40%의 확률로 다른 교통약자를 대중교통에서 쉽게 목격할 수 없는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다른 교통약자에 비해 고령자가 직면하는 대중교통 접근성이 크게 낮다는 사실이다. 65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거주 지역 지하철 이용 요금이 면제된다. 흔히 말하는 무임승차다. 서울시 기준, 성인에게는 1,400원(지하철)에서 3,000원(광역버스)의 요금이 부과되고 같은 교통약자인 어린이에게도 500원 이상의 요금이 부과되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큰 혜택이다. 버스나 지하철 등 일상에서 이용되는 대중교통수단에서 임산부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전무하다. 나는 노인에 대한 무임승차 제도가 노인들의 대중교통 수요를 과도하게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즉, 불필요한 경우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게끔 만드는 경제적 유인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교통약자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자에 대한 무임승차 혜택은 이에 대한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각 시, 도 교통공사에게 큰 폭의 적자를 부담하게 만든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부분은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1984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시행된 제도는 '65세 이상 노인에 대해 수송 시설 요금을 할인할 수 있다'는 노인복지법 26조에 근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운용 방안이 법령 등에 의해 지정되지 않아 정부 세수에 의한 비용 보전이 불가능하다. 


장애인에게도 고령자와 동일한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를 두고 장애인의 대중교통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장애인 단체의 오랜 시위와 요구의 결과로 대부분의 지하철역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비장애인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이며, 이는 장애인의 대중교통 접근성 향상을 위한 제도적 개선보다 이를 막아 세우려는 사회적 공기가 훨씬 더 무겁다는 사실에 대한 아주 작은 반증일 뿐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시내버스를 승, 하차하기 위해 도입된 저상버스에 실제로 장애인이 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최근 딱 한번 목격했다. 버스 운전기사가 휠체어가 탑승하기 전 버스 문턱을 낮추고, 장애인석에 앉아있던 시민들에게 다른 곳으로 비켜달라 요청하고, 휠체어를 버스에 태우고 고정하기까지 약 1,2분 만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최소 10분 이상 소요되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며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한번 더 놀랐는데, 2분이 채 되지 않는 장애인의 탑승 과정에서 답답함을 호소하는 승객이 있었을 뿐 아니라 승차 이후 운행 과정에서 휠체어석 주변으로 침범하여 장애인의 공간을 침해하는 승객 역시 다수 존재하는 모습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버스 안의 그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장애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았다. 단순한 시민의식의 차이로 치부하기에는 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장벽'의 동시성을 우리는 조금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장애인이 우리 주변에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그의 집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장연 대표의 말처럼, 출퇴근 시간 일반인의 1,2분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평생 강제적으로 뒤처지고 느린 시간 속에서 살아온 장애인은 이미 상당히 많은 가치를 박탈당한 셈이다.  


노인들을 과도하게 집 밖으로 끌어내는 잘못된 정책과 장애인과 임산부 등 다른 교통약자의 이동성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사회적 공기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도 교통약자석을 독점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본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 만으로 이 현상을 바라보기에는, 내 마음속 한 구석에서 풀리지 않는 불편함이 존재함을 느낀다. 승차 직후 좌석을 찾아 헤매는 노인들, 혹은 주변의 시선을 무릅쓰고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는 노인들의 마음속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특별한 이동의 목적의식도 없는 이들은 왜 그토록 빈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까? 


어쩌면, 길거리에서 노인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혜택이 그것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다른 혜택도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한의원에서 65세 이상 고령자는 침 치료를 포함하여 한의원에서 받는 진료에 대하여 약 10%의 진료비만 부담하면 된다. 보건소에서는 오래전부터 고령자에 대해 무료 진료를 실시해 왔다. 시골 한의원 한쪽 구석에 노인정과 비슷한 시설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런 곳에도 당연히 노인들이 몰린다. 은평구에 사는 75세 노인 김 모 씨는, 그날 아침 별다른 증상이 느껴지지 않아도 동네 한의원에서 무료로 침을 한 대 맞은 후, 무료로 지하철을 이용하여 탑골공원으로 가 친구들과 수다를 떤다. 김 모 노인은 아마도 이 모든 과정이 무료이기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잘못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의 보조를 통해 어떻게든 밖으로 나와 건강한 삶을 영위하며 사회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노인 개인이나 사회 전체적으로 분명히 좋은 일이다. 다만, 노인 개인이 스스로 창출하는 사회적 공헌을 통해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전무한 사회 환경에서, 사소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사회복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노년층의 심리 안에서 절박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계적인 수준인 보건 환경 속에서 기대수명은 드라마틱하게 증가하였지만 연공서열과 정년퇴직제, 빈약한 연급제도 속에서 중환자실에서 65세 이상 고령자 계층은 급격한 경제적 빈곤화 가능성에 손쉽게 노출된다. 은퇴 연령 이후 세대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는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계층에 유입되는 인구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에서 밀린 다수의 노인들은 무임승차, 무료 진료 등 몇 가지 정도로 제한된 혜택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녹여내며 정부 지원금을 최대한 아끼는 것이 최선인 삶으로 추락한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가족이 최근 이사 온 아파트 단지에서 매일 아침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는 선생님은 실제로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하셨던 분이다. 꽤 높은 연봉을 받던 장년층도 자녀 양육 및 부모 봉양, 질병, 몇 번의 투자 실패 등으로 아주 쉽게 노후 자금이 바닥날 수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대체되기 힘든 전문성을 오랜 기간 습득한 숙련노동자가 순식간에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는 비숙련노동자 계층으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65세'라는 경계선은 무시무시한 사형선고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그저 편히 앉아 가려는 염치없는 노인들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앉아서 갈 수 있는 '권리'가 이 사회에서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찾아서 받아낼 수 있는 노인에 대한 혜택일 수 있는 것이다.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아 앉게 만드는 사회적 공기의 박절함이 있다. 


'인정욕구'. 불안정한 성장 곡선을 경험하는 어린 세대, 혹은 안정적인 출발을 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다. 하지만 나는 빈 교통약자석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인정욕구의 그림자를 느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회적인 쓰임새가 다했다는 선고를 받은 후, 공식적인 유체적 사망 전까지 남아있는 그 긴 기간 그들은 무엇을 통해 삶의 가치를 찾을 것인가? 자녀가 있고,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아 손주를 돌보는 임무가 주어진다면 그건 요즘 우리나라에서 행운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한 쓰임새마저 부여받지 못한 노인에게, 이 사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단지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노인에게 교통약자석은 국가가 마련해 준 가장 미약한 존재의 이유 중 하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2020년 기준 약 40.4%,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은 2021년 기준 약 42.2명으로, OECD 평균(빈곤율 14.2%, 자살률 16.5%)과 비교해 크게 높은 수준이다. 연공서열과 은퇴연령 확정에 따른 강제적인 경력 단절과 높은 비정규직과 임시근로직 비중은 노인을 점점 사지로 내몰고 있다. 먹고살기 힘들어 시야가 좁아진 사람은 주변을 돌아보기 힘들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의 여유를 줄 수 있다면, 그들 역시 타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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