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죽음

최근 경험한 조금 다른 색깔의 죽음에 대하여

by Jong

나의 친가와 외가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형제는 총 6분이 계셨다. 그중 세 분이 가톨릭 성직자였다. 사제 한 분, 수녀님 두 분이 계셨다. 결혼을 하지 않은 고모 한 분과 막내 삼촌까지 포함하여 아버지의 형제 6명 중 5명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자녀도 갖지 않은, 그 당시 세대 구성 풍토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할 만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친가에 방문할 때마다 집안 분위기는 근엄하고 조용했다. 명절 부근 모든 가족이 모인 후에도 시끄럽게 뛰어노는 내 나이 또래 어린이의 숫자보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어른의 숫자가 더 많았으며, 온 가족이 모여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와 함께 했다. 사제였던 큰 아버지가 방문할 때에는 집 안에서 미사까지 이루어졌는데, 나는 큰 아버지 옆에서 복사 시중을 들었다. 이 집안의 중심은 외향적인 성격의 할머니였다. 한글을 읽지 못하셨지만 대부분의 가톨릭 기도문을 외울 수 있을 정도였고, 선교하러 온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집으로 불러들여 몇 시간의 설득 끝에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정도의 왕성한 포교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자녀 중 세 명이 가톨릭 성직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는 기쁨이자 자랑이었을 것이다.


반면, 외가는 항상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내가 태어날 당시 어머니의 형제는 총 5분이 계셨는데, 모두 결혼하여 최소 두 명 이상의 자녀를 보았다. 외조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신 이 집의 가장 큰 어른은 첫째 이모와 첫째 외삼촌이었다. 의사 부부였던 첫째 이모는 엄마를 포함한 3 자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맏언니였다. 엄마는 자매들끼리 수다를 떨기 위해 남대문 바로 옆에 있던 큰 이모의 병원에 종종 나를 데리고 갔고, 자매들 간의 친밀한 관계가 어린 나이에도 퍽 인상 깊었다. 첫째 외삼촌의 식구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를 정도로 가톨릭 문화가 생활 안에 깊게 스며들었음에도 제사를 지내던, 소위 세속화된 가톨릭 가정이었다. 엄마는 제사 때마다 나를 큰 외삼촌 댁에 데리고 갔는데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좋았다. 엄숙하고 고요했던 친가와는 달리 외향적이고 다정한 외가 친척들과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형제 중 가장 맏이였던 첫째 고모님의 세례명은 멜라니아였다. 김 멜라니아 수녀님. 내가 그분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그분은 내가 태어날 때 이미 '김 멜라니아 수녀'로 오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으므로, 속세를 떠난 그분의 실명을 기억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위로 누나가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형제들 중 유이하게 결혼을 한) 셋째 고모로부터 나온 두 사촌 누나까지 있었으니 그분에게 내가 첫 조카는 아니었겠지만, '대구'라는 보수적인 지역 문화와 '가톨릭'이라는 또 다른 보수적인 문화 정체성이 합쳐진 결과 그 집안의 유일한 남자아이인 나에게 유독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내성적인 아이에게 그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아주 어리던 어느 명절날, 손이 크신 할머니가 식혜를 한소끔 끓이셨는데, 첫째 고모님이 그중 알갱이만 한 컵 가득 담은 다음 나에게 억지로 먹이셨다. "국물은 어른이 먹고, 알갱이는 아이가 먹어야 해"라면서, 나름 조카를 위하는 마음으로 식혜 알갱이가 든 스푼을 바삐 움직이셨다. 결과는 비참했다.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식혜의 부산물을 먹은 나는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고, 그 이후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식혜를 먹지 않는다. (이 트라우마로부터 나는 '어린아이에게 음식을 절대 억지로 먹이지 않는다'라는 확고한 보육 철학을 하나 습득하게 되었으니, 긍정적으로 바라볼 구석도 있다)


그렇다고 그분에게 나쁜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다. 명절 때마다, 혹은 중요한 가톨릭 축일 때마다 수녀원으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여쭈었는데, 그때마다 살갑게 대화를 받아 주시며 아주 사소한 나의 안부까지 기억해 주셨다. 그 분과 대화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총명함에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결혼 후 가톨릭 문화에서 많이 벗어나 살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세례축일은 그다지 중요한 기념일은 아니게 되었는데, (나도 아니고) 아내의 세례 축일에 전화를 걸어와 축하 인사를 건네주신다던지, 아흔에 가까울 정도로 연로한 탓에 거동이 힘들고 시력도 실명 상태에 가까워졌음에도 내가 속한 직장의 이름을 또박또박 언급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챙겨주실 때 놀라움과 함께 그분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외가 쪽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친척은 큰 외삼촌의 둘째 딸인 도미나 누나였다. 멜라니아 수녀님과 마찬가지로 나는 도미나 누나의 실명을 아직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를 도미나 누나로 불렀다. 굳이 그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례명에 담긴 친밀한 정서가 깊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주택에 살던 시절 부모님이 방 한 칸을 도미나 누나에게 세를 내주어 한 동안 함께 살던 적도 있었고, 대구에 계셨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위독할 때 부모님이 도미나 누나에게 나와 누나를 부탁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누나와 정서적으로 상당히 가깝게 느낄 기회가 많았다. 성격이 무척 외향적이고 서글서글했던 누나는 늘 밝게 웃으며 이것저것을 챙겨주었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어머니를 언니처럼 따르며 어머니에게 미주알고주알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많았다. 어머니 역시 큰 외삼촌의 딸 세 명 모두를 동생처럼 많이 아꼈는데, 외삼촌네 가족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갈 때 무척 아쉬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도미나 누나는 가족과 함께 바로 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몇 년 더 일을 하다 뒤늦게 넘어갔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지 별로 되지 않아 돌아가신 외삼촌을 대신하여 외숙모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빠른 시간 안에 무사히 뉴욕 부근에 정착할 수 있었다. 뉴욕 시가지에 네일숍을 안착시킨 외숙모는 대장부다운 성격을 바탕으로 그 지역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에서 중요한 인사가 되었다. 첫째 딸인 안젤라 누나는 아이 둘을 미국 대학으로 진학시킨 후 한국으로 돌아와 암투병을 했으며, 현재 김천에 그럴듯한 전원주택을 짓고 평안한 노후를 누리고 있다. 셋째 딸인 글라라 누나와 외숙모의 유일한 아들인 토마스 형은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여 뉴욕 한인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형제 네 명 중 가장 늦게 미국으로 건너간 도미나 누나는 결혼도 가장 늦게 했는데, 남편과의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을 하나 보았다. 아버지가 하버드 교환교수로 있던 시절 아버지를 모시고 뉴욕에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외숙모네 가족은 주일마다 모여 함께 미사를 드리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나는 그 모임에 초대되어 열 명이 넘는 거대한 가족 틈에서 정신없이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민 가정 3세대 아이들은 놀랍게도 한국어를 또박또박할 줄 알았으며, 도미나 누나의 아들 역시 사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최근 도미나 누나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오랜만의 휴가라고 했다. 외숙모의 네일숍 가게는 확장을 계속하여 분점을 내었는데 그중 하나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훌쩍 자라 대학교에 들어갔고, 남편은 최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남편의 투병생활을 즐겁고 기운차게 함께 했노라고, 병원 사람들도 남편 칭찬을 참 많이 했다며 특유의 웃는 얼굴로 담담히 이야기했다. 도미나 누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오래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첫째 이모님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함께 딸기를 먹고 사진을 찍었다. 목소리가 크고 우렁찬 도미나 누나가 계속 말을 거니 큰 이모님도 힘을 차리신 것 같다며 이모님을 돌봐주시는 요양보호사분이 말씀하셨다. 마침 우리 집에 어머니가 머물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집에도 잠시 들러서 조카들인 태오와 루나도 인사시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키운 도미나 누나가 나의 어린아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했다. 조만간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계획이라는 나의 말에 "무조건 와라. 안 오면 혼난다"며 협박(?)하는 모습이 어린 시절 기억하는 누나의 모습과 똑같았다. 약간의 흰머리를 빼고는.


얼마 전,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멜라니아 수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연로한 탓에 이미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에 오래전부터 머물고 계셨고, 최근에는 응급실에 자주 출입하며 위험한 순간을 몇 번 넘긴 터였다. 급히 휴강을 고지한 후 다음날 아침 일찍 대구로 내려갔다. 멜라니아 수녀님이 계시던 수녀원은 대구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몇십 년 전 수녀원이 처음 들어설 당시에는 그곳으로 가는 길조차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아 수녀님을 보기 위해 거친 비포장 도로를 몇 시간 달려야 했지만, 지금은 신도시가 들어서 고층 아파트들이 수녀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가 열렸고, 화장을 한 수녀님의 유골을 수녀원 뒷산에 안장하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속세를 떠난 가톨릭 성직자의 장례 예절에서 유가족은 손님일 뿐이다. 상주는 한평생 동고동락한 동료 수녀님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살뜰히 챙겨주었으며 정답게 떠나보냈다.


장례 예절 중 멜라니아 수녀님의 약력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전혀 모르던 수녀님의 삶이 짧은 시간 동안 요약되어 전달되는 동안 그분의 '진짜 삶'은 이 수녀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멜라니아 수녀님의 삶에서 나는 그저 지나가는 나비 한 마리 정도의 존재였을 것이며, 성직자로 평생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정을 나누어주고 가셨을 것이다. 그동안 나눈 정 때문에 눈물을 보이는 수녀님들이 몇 분 계셨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기도문을 외며 옛 동료를 떠나보내는 과정에 참여했다. '방문자'인 나는 이 고요하고도 성숙한 공동체에서 삶을 마감한 수녀님의 삶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또 놀러 오세요"라는 원장수녀님의 인사말이 가슴속에 박혀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어머니로부터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도미나 누나의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도미나가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도미나 혹시 어떻게 되면 어떡하냐고 몹시 슬퍼하셨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그리고 이제 아들까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도미나 누나의 마음이 어떠할지 감히 나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와 함께 뉴욕에 방문했을 때, 결혼식을 올린 후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며, 평생 '오'씨로 살다 갑자기 다른 성으로 사는 것이 너무 웃기지 않냐며 농을 치는 도미나 누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휴대폰 잠금화면부터 사진함의 모든 사진들을 아들의 모습으로 꽉꽉 채워둔 그녀가 지금 어떠한 마음으로 생을 부여잡고 있을지 언어의 형태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지금이라도 당장 뉴욕으로 날아가 도미나 누나의 옆에 있고 싶은 마음에 혹시 어머니에게 함께 갈 생각이 있는지 여쭈었지만, "그곳에는 그의 가족이 있다"는 말과 함께 담담히 거절하셨다. 살갑게 정을 나눈 친척들 사이에도 명확히 선을 긋는 어머니의 삶의 자세에 대해 - 존중은 하지만 - 여전히 공감은 못 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의 가족인 나도 비슷하게 선을 지켜야 하기에, 조만간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짬을 내어 도미나 누나를 찾아가 보는 것으로 위로의 기회를 뒤로 미루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당에 가서 미사 중 도미나 누나를 생각하는 정도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색깔의 죽음이 있다.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을 통제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지만, 죽음 전후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동안 살아온 개인의 역사에 의해 그 색깔을 달리 한다. 어린 시절부터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단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죽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이른 죽음도, 갑작스러운 죽음도 아니었기에 준비의 시간이 충분했던 탓도 있다. 다른 한편에서 전해진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청년의 죽음은 지극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이 비극이 유독 밝고 명랑한 개인의 삶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야속하면서도,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큰 슬픔의 무게를 지게 만들었을까 따지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어쩌면 죽음은 확률적으로 따져볼 수 없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독립적인 사건일지도 모른다. 어떤 죽음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죽음은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정도로 엉뚱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죽음의 몫은 남겨진 자들의 것이다. 죽음으로 인해 비워진 곳에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 무게를 혼자 지고 걸을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어지고 나아갈지 정도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다. 수녀원에 남겨진 멜라니아 수녀님의 동료들은 그를 기억하며 오늘도 기도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진 도미나 누나는 외숙모와, 글라라 누나와, 토마스 형과,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나는 그저 나비 정도의 가벼움이라도 좋으니 그들의 마음에 내려앉은 무게를 조금이라도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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