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하고 제 멋대로인 어른으로 산다는 것

미란다 줄라이의 <All Fours>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by Jong

미란다 줄라이의 신작 소설 <All Fours>는 지난해 미국의 각종 도서상에 최종 후보로 오르며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는 아니었다. 2024년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Award) 픽션 부문 최종 후보, 뉴욕타임즈 2024년 최고의 소설 10선에 오르는 등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소설로 큰 주목을 받은 것에 비해 팟캐스트 등 대중을 위한 논의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컬트적인 작품으로 남아버렸는데, 최근 이 소설의 영문판을 다 읽은 후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브런치를 열었다. 이 소설은 비평가들이 좋아할 만한 거의 모든 지점을 두루두루 챙긴 영리한 소설이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쉽게 이해되지 못할 주인공의 행적과 사고과정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점이 놀라웠고 또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The telephotographer


이 소설은 누군가가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에서 시작한다. '누군가로부터의 시선'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다. 바라보는 주체를 남성, 대상화된 객체를 여성으로 설정한다면 페미니즘의 전형적인 주장을 따라가는 내러티브가 형성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흔한 페미니즘 문학에 등장하는 용감하고 주체적인 여성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자신이 관찰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불안감과 함께 묘한 희열감을 동시에 느끼고, 사설탐정에게 단서를 넘긴 후 수사를 의뢰하지만 사실 용의자(?)를 탐색하는 과정에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느끼는 성적 흥분에 조금 더 집중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즉, 망원사진가로 대표되는 '남성적 시선'은 주인공에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기회로 작용하여 '뉴욕행 로드트립'을 떠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요 트리거로 기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상화된 객체로서의 여성이 성공적으로 주체성을 획득하는 이상향적인 결과까지는 나아가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갖는 독특한 색깔을 규정 짓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주인공은 대상화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활용'하여 조금 더 자유분방한 성적 여행을 떠나기 위한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육체적 차이를 발견한 후 '각성'하게 되는 등 나름의 성장과정을 겪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채 살아가는 미숙한 어른에 가깝다. 그리고 망원사진가로 대표되는 남성적 시선은 주인공에게 있어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리 적대적인 개념 만은 아닌 것이다.


Premenopause


'폐경전기'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이며,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주요한 추동 요인으로 기능한다. '뉴욕행 로드트립'을 떠난 주인공은 주유소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과 순간적인 교감을 나눈 후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소도시의 허름한 모텔에서 3주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남편과 자녀에게는 뉴욕으로의 여행을 지속한다는 거짓말을 반복하고 세계적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도 뒤로 제쳐둔 채, 주인공은 성적 행위보다 더 강렬한 교감을 젊은 남성과 나눈다. 3주의 예정된 여행을 마무리한 후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일련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폐경의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폐경전기에 접어들었고, 호르몬이 급감하며 '리비도'로 표현되는 성적 에너지 역시 확연히 줄어들 것이라는 진단을 듣게 된다. 주인공이 느끼는 억울한 감정은 아마도 나이에 따라 급격하게 달라지는 여성 호르몬이 성적 에너지의 수준을 결정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육체를 제 멋대로 통제한다는 - 하지만 남성 호르몬은 여성처럼 드라마틱하게 감소하지 않는다 - 여성의 육체적 한계에 대한 성토였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인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이 중년의 무기력함을, 주인공은 상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평온한 상류층 가정을 함께 일구던 남편과 의무에 가까웠던 (성)관계를 청산한 후, 더욱 모험적인 성생활을 추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있음을 성토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성적인 욕망에 이끌려 윤리적 판단을 소홀히 하는 미성숙한 어른일 뿐이다. 소도시에서 만나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젊은 남성의 첫 번째 애인 - 주인공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성 - 과의 섹스를 통해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고, 이 때 획득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젊은 여성을 새로운 애인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에게 집착하기 까지 한다. 주인공의 이러한 행위는 앞서 언급한 '대상화된 자신'을 주체적으로 재인식한 뒤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잃게 되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던 남편과의 일방적인 관계 정리, 아직 어린 나이로 묘사되는 자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시킨 대안적 형태의 가정 등. 각자의 애인을 인정하되 한 가정 안에서 이혼하지 않고 공동육아를 실현하겠다는 발상은 언뜻 흥미로우나, 미란다 줄라이가 꿈꾸는 대안적 가정의 모습은 뒤에 서술할 자녀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일차원적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폐경이라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를 주축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흥미롭게 전개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여성의 육체적 변화를 바탕으로 주체성을 자각한다는 개념은 페미니즘적으로도 훌륭하고, 나와 같은 남성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계몽적으로 기능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니 내가 상대하는 여성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 서술할 남편과 자녀, 가정을 둘러싼 전통적인 담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성급하면서도 얕은 관점을 결말까지 고집스럽게 밀어붙힌다.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며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급히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지닌 남성 작가의 작품들과 엮이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Sam과 Harris


Sam은 논바이너리 성향을 가진 주인공의 하나 뿐인 자녀이며, Harris는 - 바이섹슈얼인 - 주인공과 달리 전통적인 이성애 성향을 지닌 주인공의 법적 남편이다. (이 설정에서 독자들은 이 소설이 미란다 줄라이의 반자전적인 작품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줄라이는 전 남편 마이크 밀스와의 혼인 관계에서 탄생한 논바이너리 자녀를 공동 육아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녀를 "they"라고 칭하며 주변인에게도 자녀의 논바이너리 성향을 강조한다. 자녀의 성적 지향을 완벽하게 존중하고 지켜준다는 점에서 언뜻 진보적으로 보이는 주인공은, 사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가정을 외면하고 개인의 욕망을 좇는 주체적인(!) 행동을 계속한다. 3주의 거짓 뉴욕 여행을 가족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는지에 대해 소설은 끝까지 불명확하게 처리하며, 해리스와의 혼인 관계 중 빈번하게 발생한 외도에 대해서도 "호기심" 등으로 별 것 아닌 것처럼 표현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가진 사회적인 위치와 자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의 수준이다. 성공한 예술가로 그려지는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와의 협업 요청을 수시로 받으며 개인 비서까지 두고 있다. 집에서 30분 떨어진 도시에서 만나 격정적인 감정을 나누는 젊은 남성도 결국 그녀를 예술적인 '우상'으로 여기고 접근한 것이며, 소설 내내 상징적으로만 다루어지다 말미에 실제로 등장하여 주인공과 교감을 나누는 수퍼스타 여성 역시 그녀와의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가 일반인에 비해 매우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아쉬운 소리를 굳이 해도 되지 않는 우월적인 위치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적으로도 그녀는 포식자의 위치에 있다. 법적인 혼인관계는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탐닉하는 주인공에게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언제든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몸에 깊게 밴 듯 보인다.


그런 주인공의 시선에 비친 자녀 샘은 놀라울 정도로 어리고 미숙한 존재로만 다루어진다. 뉴욕 여행을 떠난 엄마에게 커다란 스푼을 선물 받기를 원하거나 부모의 '별거'를 "스크린 타임을 늘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샘은 언뜻 그 나이대 어린이의 전형성을 잘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앞서 기술한 주인공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선을 넘나드는 성적 탐닉의 행동양상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주인공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샘을 중요치 않은 요인으로 인식해왔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주인공에게 샘은 부모의 애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묘한 상황을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하여 이해시켜야 하는, 단순하고도 번거로운 존재 정도인 것이다. 더 나아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은 샘을 사랑하는지, 혹은 단지 보호해야 할 대상 이상으로 여기는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물론 미란다 줄라이의 인스타그램 페이지에 들어가면 논바이너리 - 트랜스 - 자녀에 대한 사랑을 여기저기에 넘치게 표현하고 있지만, 줄라이와 이 소설의 주인공을 굳이 떼어 놓고 본다면 주인공의 샘에 대한 태도에는 무언가 결여된 측면이 꽤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록 우리 모두 불완전한 부모임을 명확히 인식한다 해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확실히 미숙하며 불완전하다.


해리스는 또 어떠한가.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미란다 줄라이의 전 남편 마이크 밀스를 뚜렷하게 형상화한 듯 보이는 작중 남편 해리스는 꽤 성공한 음악 프로듀서이자 자상한 아버지, 성실한 남편이지만, 주인공의 머릿속에서는 남편의 작업실에 있는 - 침대로도 쓸 수 있는 - 커다란 소파에서 그가 최근 함께 작업한 젊은 여성 뮤지션과 뒹굴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생각 밖에 없다. 심지어 주인공은 이러한 상상을 본인의 자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해리스 역시 주인공의 시선에서는 철저하게 도구화되고 객체화되었으며 용도에 맞게 단순화된 존재에 불과한데, 이 모든 묘사가 - 역사적으로 그러한 방식으로 그려져온 여성에 대한 미러링이라는 점에서 - 작가가 철저하게 의도한 그림이었을 것이므로 여기에 비평가들은 환호성을 보냈을 것이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외된 남편의 모습에서 큰 즐거움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다시 만나는 사람은 남편 해리스가 아닌 불타는 3주를 함께 보낸 청년 데이비(Davey) 였다. 성공한 댄서가 되어 뉴욕에서 공연을 하는 그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을 묘사하며 소설은 막을 내리는데, 이 때 해리스는 그의 새 애인, 그리고 자녀 샘과 함께 엘에이 집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엘에이와 뉴욕이라는 공간의 대비 뿐 아니라, 음원을 만드는 프로듀서 남편과 음악 위에 몸을 움직이는 댄서로 존재하는 데이비 등, 이 둘을 대치점에 놓아 주인공의 심리가 여전히 위험천만한 비전통적 삶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소설의 결말은 꽤 깊은 서늘함을 선사한다.


Arkanda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초월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수퍼스타, 알칸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Everyday is Tuesdady"라는 명언(?)을 남겼고, 이 문장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화요일은 어떤 날인가? 주말은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고 월요일이나 금요일처럼 존재감이 확실한 평일도 아니다. 수요일이나 목요일처럼 일주일의 정점을 달리는 평일도 아닌, 어쩌면 가장 정의내리기 힘든 평일이 화요일이다. 알칸다는 달력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 구절을 사용했다. 달력을 볼 필요도 없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자, 달력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을 상징하는 그녀는 주인공이 스스로와 대비하는 존재이자 가장 닮고 싶어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안정적인 상류층 가정을 스스로 깨고 나와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생활을 통해 폐경기로 상징되는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속한 예술계의 정점에 위치한 알칸다는, 주인공에게 있어 현재의 지리멸렬함을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의 위치를 깨닫게 만드는 존재, 혹은 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이상향처럼 그려진다.


알칸다와 주인공의 접점은 소설 말미에 가서야 드러난다. 주인공의 '댄스'는 가정을 무너뜨린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알칸다는 그녀의 춤을 보고 다시 연락을 취해온다. 즉, '남성-타자화된 시선-전통적인 가정'의 프레임에서 주인공을 끄집어내 '여성-다원주의-주체성-대안'의 세계로 이끄는 존재이자, 출산 과정에서 겪은 공통적인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승인'을 내려주는 - 너 맞아, 틀리지 않았어! - 절대자로서 기능한다. 즉, 소설의 초반부터 주인공은 출산 후 NICU에서 샘이 회복하는 동안 상당한 감정적 소모를 겪었음을 암시하는데, 이에 대한 떡밥을 알칸다가 성공적으로 회수하며 주인공의 행보에 '모성애'가 결여되지 않았다는 점을 변호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주인공이 샘에 대해 보여준 모습에서 어머니로서의 완고한 애정이 거의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알칸다를 이용한 주인공의 서사 강화는 꽤 전형적이고 안일한 마무리로 느껴진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소설 전체가 미란다 줄라이가 직접 쓴 이혼에 대한 변호문이라고 읽힐 정도로 지나치게 편향된 측면이 존재하며, 그 과정에서 다소의 억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알칸다의 뜬금 없는 등장은 그러한 작가의 조급함이 빚어낸 작은 파편 중 하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유로운 영혼과 축복받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꽤 괜찮은 시민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가정을 건사하기에는 지나치게 충동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미래에 대한 숙고보다는 현재의 감각에 대한 복종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미성숙한 어른이기도 하다. 미란다 줄라이는 주인공의 심리를 파고들어 현실과 상상을 오고가는 과정을 통해 도발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땅에 댄 자세를 의미하는 'all fours'는 성관계 중 취하는 한 포지션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주로 여성이 복종적인 모습으로 취하는 이 자세를 두고 주인공은 "이 자세가 오히려 더 편할 때가 있어"라며 다른 해석을 유도한다. 즉, 무릎을 꿇고 다리를 벌린 그 자세를 여성이 능동적으로 스스로 취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복종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실험하는 자유의 실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망원사진가와의 관계 역시 유사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도발적인 질문들이 갖는 시의성에도 부룩하고, 이러한 주인공이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나 성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그 권력을 능히 휘두를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라면, 그를 누가 통제하며 그의 행동으로부터 파생되는 영향은 어떻게 감싸 안을 것인가, 라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며 중년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여성의 자기연민에 집중한다. 문장은 익살 맞고 유머러스하며, 30장으로 구성된 긴 소설은 다음 내용을 감히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 페이지터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곧 TV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니, 국내에도 번역되어 소개될 것을 기대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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