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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May 04. 2020

독일 영화[디벨레],
전체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

디벨레, 전체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



역사교사인 라이너(벵어선생)는 특별수업주간 기간 동안 아나키즘과 독재사회라는 두 주제 중에 자신의 관심사인 아나키즘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교사 사이에서도 비주류였던지 그의 발언권은 강하지 못했고 결국 마음에 없는 전체주의를 맡게 된다.


독일, 파시즘 이후 새로운 자유주의 세대



영화에서 등장하는 독일의 아이들은 전쟁 이후 태어난 새로운 세대로써 서독, 동독 출신, 이민자, 등 다양한 문화권의 아이들이 어울려 살아간다. 교실의 분위기도 미국과 다르지 않게 자유분방한 배치와 자세, 의사표현 등이 가능했고 카로 남동생을 보면 알듯이 자기 자유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깨닫고 익히기를 바라는 사회문화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충격


이 영화에서 충격적인 장면은 전체주의를 실습하고자 하는 교실의 분위기이다. 즉 그들이 전체주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갖가지 행동 속에서 정작 한국 교실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역으로 보는 한국인들에게는 충격이 되는 셈이다.

한국 고교의 일상적 분위기
전체주의 수업의 일환으로 같은 색의 옷을 입기로 했다.


-책상을 줄 맞춰서 배치하고 둘씩 짝지어 앉기
-의사발언은 손을 들어 선생의 허락을 맡고 일어서서 발표하기
-함께 체조하고 발맞추어 걷기 


이 모두가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익숙하게 해오던 일이 아닌가?


선생님의 이름을 애칭으로 편하게 부르다가 존칭을 쓰라고 하니 충격을 받는 독일 아이들의


반응이 오히려 내게는 실로 충격적이다.



결국 한국사회가 군부정권을 거치면서 얼마나 파시즘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이 영화가 본의 아니게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앞으로나란히!부터 배워왔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누구 하나 튀지 않도록 교복을 입히고 끊임없이 단체생활의 규율을 강요했던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사실 군사 시스템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인 것이다. 


푸코가 이야기했던 훈육이 바로 이런 것이다. 형식이 바뀌고 반복적인 규율의 수행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집단과 하나 되는, 집단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인간으로 규정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육 현장에서 소신 있게 수업시간에 자기 의견을 선생에게 말하고 토의하는 현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어릴 적부터 정식으로 손들고 발언권을 얻어야 하는 번거로움과 그로 인해 수반되는 대중의 시선과 기대, 그 좌절에 대한 공포는 모두를 자발적으로 위축시키게 만들고 앞에서 지휘하는 선생의 가르침이 절대화되도록 내어버려 두는 형세가 수십 년째 지속되는 것이다. 괜히 이야기했다가 틀리면 무슨 망신인가, 혹은 선생님이 모르는 걸 내가 질문에서 당혹시키는 것은 아닌가, 등등의 잡념이 수업의 집중도를 오히려 떨어뜨리고 결국 교실에서 선생과 학생들의 거리는 더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자유주의 시대에 과연 파시즘이 다시 도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이 영화는 시작되고 디벨레라는 벵어선생의 작은 전체주의 실험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자유가 오히려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고 공동체의 규합을 방해하는 문제는 이미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수구팀의 성적은 형편없었고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서로에 대한 양보는 없고 오직 자기 멋대로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연극 연습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찰나에 벵어선생의 권유에 따라 호기심반으로 따라 하던 반 아이들은 처음 느끼는 공동체의 일체감이 주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군대에서 제식훈련처럼 재미없는 것도 없지만 정작 그 많은 인원이 발소리가 딱딱 맞아떨어질 때는 누구라도 작은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소대 안의 모든 전투화와 걸려있는 수건, 개어져 있는 전투복의 가지런함은 알 수 없는 안정감과 쾌감을 분명히 전해준다 이처럼 디벨레는 하나의 물결이 되어 점점 크 파도가 거세지기 시작한다

한때는 따돌림당하던 학생도 같은 복장이 됨으로써 다른 반 학생의 괴롭힘으로부터 같은 반 친구들의 보호를 받게 된다.


무엇보다 단순하지만 모두가 같은 색의 옷을 입을 때 주는 소속감은 상당하다. 이는 교복보다 더 효과를 주는 셈인데, 교복은 학교와 학교라는 범주가 만날 때 소속감을 주는 제한성이 있다. 반면 디벨레는 한 교실만 옷을 맞춰 입는 만큼 학교에 있는 매 순간 자신들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고 소속감이 더해진다. 


거기에 더해지는 디벨레만의 인사법은 일종의 사인이며, 타자를 배제하는 효과적 장치가 된다.


그렇다 이 영화의 구성은 아주 심플하다, 집단의 소속감이 쾌감이 되어 점점 더 공동체에 헌신하게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런데 이 헌신은 항상 공동체 밖의 타자를 전제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비극이 있다.  


공동체가 주는 장점은 상상외로 컸다.


서로를 의지하고 자신의 자유표시 이전에 상대방과 함께하고자 하는 연대의 마음은 수구팀의 성과로 드러나고, 연극팀의 팀워크의 향상을 가져온다. 그리고 반에서 소외되었던 멤버들도 공동체의 힘에 힘입어 자신감을 갖게 되어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을 찾아 팀에 헌신하는 과정은 그 자체만 보았을 때 어떤 문제도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배타성을 전제한 연대와 통일성은 결국 폭력을 언제나 내포한다. 그리고 그 폭발력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는 것이다. 구분 짓기를 통해서 얻어지는 쾌감인만큼 그들은 자신들만의 복장과 경례, 그리고 마크를 통해서 다른 공동체를 배제하고 공공의 기물을 파손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세를 드러내려고 한다 


공동체의 완전함이란 불가능하기에 그 불가능을 가능케하려는 모두의 노력은 그만큼 예외적 행동, 즉 자유의 행동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되고, 그만큼 예민하게 대응하게 된다. 여자 친구의 뺨을 세게 후려치게 되는 자신을 보고 전체주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처럼 공동체를 향한 맹신적 사랑은 그 사랑만큼 폭력성을 외부로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걷잡을 수 없게 커지는 디벨레의 세력을 우려한 벵어가 마지막 날에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며 더 이상의 디벨레 모임을 반대하며 해산을 명령하게 된다. 여하튼 이 디벨레의 구심점이 벵어 자신이었던 만큼 절대자의 명령은 절대적이기에 아이들은 충격 가운데 해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디벨레에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모든 것을 내던진 아이는 현실의 붕괴를 막을 수 없어 절망하며 총으로 위협하다 자신의 생을 끊어버리게 된다


영화는 뱅어 선생이 경찰에 잡혀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아이들은 그 충격에서 과연 빨리 빠져나올지 아니면 오래도록 상처로써 남게 될지는 또 하나의 궁금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벵어는 최고의 교육자인 셈이다. 이 시대에 더 이상의 전체주의는 없다는 아이들의 조소에 반응하여 일주일 만에 당사자들을 가장 강력한 파시즘의 열광주의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몸소 체험하게 해 주었으니 아마도 디벨레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여실히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벵어는 최악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디벨레가 교육의 일환이라는 실험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본인이 독재자로서 대중의 열광주의에 도취되어 어떻게 공동체가 급격하게 파시즘화 되어가는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학생의 생명을 앗아간 결과를 낳았고, 디벨레 멤버들 모두의 마음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전체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났는가? 그리고 자유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가?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의 모순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해야 하는 불가능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 극단의 위기에 치우칠 수 있다. 개인과 사회, 사익과 공익의 가치의 충돌 속에서 개인의 지나친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고 극단 이기주의를 불러온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의 수구팀이나 연극팀이 보여주었던 어려움은 바로 지나친 자유의 문제였다) 한편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집단의 하나 됨만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의 비극처럼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치닫게 되어 집단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디벨레에서 보이는 집단 실험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점, 심지어 장점이 더 많이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사회가 현재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미덕과 개인의 자유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에 있다. 자유가 없는 평등은 결국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익과 공동체의 미덕은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는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대하고자 하는 용기와 노력 속에서 공동체 또한 가능한 것이다. 결국 개인의 자유가 없는 공동체는 디벨레와 같은 집단의 열광주의만 남았을 뿐 자유는 말살된 거짓 공동체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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