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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May 01. 2020

한병철[피로사회] 요약과 해제1편

[피로사회]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근대는 박테리아의 시대였으나 항생제의 개발로 시대적 종언을 고했다. 물론 여전히 인플루엔자에 대한 위협은 남아있으나 이전 시대만큼의 파괴력과 공포를 갖고 있지 않다. 

즉, 바이러스의 시대, 면역학적 시대는 끝이 나고 신경증적 시대가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21세기는 

신경성 질환인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지배하는 

시대인 것이다. 이들은 근대의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인 차이를 보인다.

지난 세기, 즉 근대라는 면역학적 시대는 이분법의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고, 이러한 이분화된 구성 속에서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

바로 그것이었다.

즉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강박,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배타성이 그 특징이었다.

결국 오늘날 후기 근대사회라는 새로운 시대에는 ‘이질성’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며, 이러한 단어는 ‘차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차이라는 단어에는 면역 반응을 촉발시키는 가시가 없다.

즉 이질적 대상은 방어하고 공격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차이라는 대상은 그저 나와 다름의 측면에서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는 

비 면역학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성은 공격성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낯선 것은 이국적으로 변모해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들의 향유 대상으로 전환되는 시대인 것이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는 오늘날 21세기에 발생하고 있는 대표적인 정신적 질환인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경계성 성격, 소진증후군의 문제를 파헤치고자 기존 근대사회와의 대비를 시도한다. 즉 이전 시대는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나누고 경계를 통해 자기와 타자를 규정하는 시대였다. 그러한 규정은 배타성을 낳아 안과 밖, 친구와 적, 선과 악 등 모든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그러한 시대를 면역학적 시대라고 비유하고 있으며 항생제의 개발과 함께 이제는 막이 내렸다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전히 바이러스는 강력하며 배타성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고 볼 수 있지만 한병철 교수는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 담론을 이끌어내고 규정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특히나 근대성이 제대로 성립되기도 전에 현대성이 몰려온 한국사회라면 더더욱 이러한 분석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여전히 한 교수가 지나갔다고 이야기하는 현상들이 한국사회 내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 도래한 시대인 신경증적 시대가 한국사회에 없는 것도 아니다. 분명 후기 근대라고 규정된 그다음 시대의 특성들도 같이 혼재해있는 것이다. 여하튼 한교수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는 이제 이분법적으로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차이'로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이질적 대상이 아닌 다름의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이것은 '소비'라는 방식으로 치환된다. 공격성 대신 소비주의로, 낯선 외국의 땅들은 이제 훌륭한 관광지로 변모되어 우리는 굳이 멀리 있는 해외로 나가 마음껏 향유하는 대가로 엄청난 소비를 하고 온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분야의 현상들 속에서 

이질성의 면역학적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이미 시대가 지난, 약화된 특성을 과대한 해석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즉, ‘이민자들’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불편한 ‘짐’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들이 두렵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기에 이방인, 면역학적 타자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컴퓨터 바이러스 또한 세계를 괴롭히는 문제이기는 해도 압도적인 위협을 주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다스리고 컨트롤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

또한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오늘날의 세계화 현상과 양립될 수 없다. 

세계는 이미 탈경계, 탈규제의 흐름 속에서 개방되어 가는데 면역학적 공간 개념은 경계,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 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 교류와 교환을 막는 언어적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시대의 세계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방법론에 있어서 면역학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라면 

오늘날은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에 있어서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하여 타자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예방접종을 보라. 

이는 면역반응을 촉발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타자의 파편을 자아 속으로 받아들인다. 이 안에서 부정의 부정을 일으켜 치명적 위험을 방어하는 면역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개념이다.

 반면 21세기 후기 근대사회의 신경성 질환들은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즉 긍정의 과잉에 원인이 있다. 

사실 폭력은 부정만이 아닌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는 예기치 못한 사태, 비극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오늘날은 과잉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한 긍정성의 폭력, 과잉의 폭력은 결코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즉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이 바로 그러하다. 

이러한 긍정성의 폭력들은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내밀히 확산되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의 전제를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폭력을 낳았는데 이는 시스템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인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이 아닌 포화배제가 아닌 

고갈의 원리로 폭력을 자행하며 직접적 지각에서는 벗어난다


한병철 교수는 세계화 시대를 근거로 새로운 담론의 변화를 주장한다. 부정의 시대가 아닌 긍정의 시대로 말이다. 이민자에 대한 문제도 무조건적 배척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는 있되 불편하고 짐스러운 존재로써 인식하게 된다. 한교수의 주장이 너무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은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미 이 시대 속에서 진행 중인 부분을 짚어내어 근대 너머의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민자의 문제는 오늘날 가장 큰 이슈인데 무조건적 배척도 강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교수의 예측과 다른 부분도 있으나 정작 인건비 상승에 의해서 웬만한 선진국은 외국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 옳은 분석이 된다. 한국사회 또한 결코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 노동자를 제외하고 산업발전과 유지를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함께 공존해야만 하는 관계이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짐스러움에 내면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병철 교수는 이를 긍정의 변증법으로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이 아닌 긍정성의 폭력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긍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과잉'으로 치닫는데 문제가 생긴다. 과잉생산과 과잉 커뮤니케이션... 지나치게 많은 생산 공급은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고 불황을 가져온다. 또한 과잉 커뮤니케이션은 얼마나 현대인을 피로하게 만드는가. 불필요한 정보가 카톡에서도, 페북에서도, 인스타에서도 범람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현상에 익숙 해지면서도 분명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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