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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30. 2020

드라마[나의아저씨], 중년의 울음


명작은 두고두고 볼만하다.


새삼스럽게 명작이 왜 명작인가에 대해서 감탄할 때가 있는데


이미 종영된 드라마를 다시 보기할 때 바로 그렇다.


[ 멋대로 해라], 군대에 있을 때 방영했는데 이등병 짬밥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 명작을...

그리고 제대 후 아내와 함께 다시보면서 고복수에게 빠져들었고 그런 고복수를 무조건 믿어주는 아버지,

가슴을 쥐어뜯는 아버지, 배우 신구의 연기도 그렇게나 감탄스러웠다. 그 후로도 한두번 다시 정주행했었는데 그때마다 이 드라마는 지겹지 않았다.


명작은 명작이다. 다시봐도 지겹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 이전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다시 곱씹게 한다.


최근 몇년 간 방영한 수많은 드라마 중에 이런 명작이 있다면 나에게는

[나의 아저씨]가 바로 그 명작리스트다.

벌써 본방외에 2번을 다시 봤는데 다시 봐도 위로가 되고

각 캐릭터마다 그 상황에 몰입되고

현실같은 판타지에 다시 한번 놀라고는 한다. (그렇다. 이 드라마는 매우 리얼한 현실을 그려내는 듯 하면서도

후계리라는 그 공간은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보기 불가능한 판타지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형제애와 동네 친구들과의 우정이 중년에 이르기까지 끈끈한 도시의 동네가 정말 있을까. )


여하튼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나의 상황 속에서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장면,


이 드라마 내내 이선균은 정말 몇번의 위기와 힘든 상황이 있었어도


우는 장면은 단 한컷도 나오지 않았었다. 아내가 바람을 피었을 때도 분노의 울부짖음이었지


이런 슬퍼서 우는 장면,,, 무언가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무너져서 우는 장면은 없었다.


그런데 드라마의 모든 상황이 다 정리되는,


어찌보면 가장 행복해질 듯한 장면이 나올거라 기대할만한 장면에서


우리는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이선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적지 않게 당황한 시청자들도 많지 않았을까.


물론 아내는 유학간 아이에게 넘어가 있어서 혼자서 살림을 하는 이선균의 모습이 뭔가


짠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울 것까지야....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결코 남자만 힘들다고 말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세상인 것은 안다.


그 누가 힘들지 않고, 그 누가 외롭지 않을까.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문제로 나눌 문제가 아닌 것이 인생의 고독이고 고통일테니....


그러나 왠지 '한국남자'로서는 무언가 공감이 되는 듯 하다.


즉, 남자는 울어서는 안 된다. 사내새끼가 울어서야 쓰겠냐는 암묵의 룰을 내면화한 우리 세대까지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나 역시 가정을 꾸렸고,


친구보다 더욱 친구같은 늘 함께 대화하고 하루의 마지막을


드라마나 예능을 함께 보며 맥주와 음료수, 그리고 수다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아내가 있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두 딸이 있다.


부족할게 없지만,


왠지 모를 고독이 있고, 외로움이 있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더욱 그런 고독이 몰려온다. 이제 40세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누군가에게 기대어본 적이 있던가.

힘들다고 울어볼 시간도 공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울어서는 안된다.


이선균은 그런 위치에서 [나의 아저씨]의 역할을 해내었고

그렇게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이지안도 떠나고

아내도 잠시일지언정 아들에게 떠났다.

혼자된 그 상황, 그 공간과 시간의 접목은 분명 혼자 남은 중년의 남자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다.

도청을 통해서라도 늘 옆에서 지켜보던 이지안의 부재, 그리고 아내의 부재속에서 오히려 잠시나마 이선균에게

자기 심정에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을까.

 

티비를 보다말고 한없이 하염없이 울어버리는 이 중년남자의 울음은

사실 그 울음에 함께 하고픈 중년남성의 울음을 대신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장면에서 여성분들도 똑같은 심정으로 공감했다면

중년남성, 가장의 무게, 한국남자 등등을 운운한 나의 그 생각이 틀렸음을 바로 인정하고 싶다.

그러고보니 이 장면은 무언가 울컥해서 정작 아내에게 묻지도 못했다. 당신은 저 장면 공감이 가냐고,

 물어볼 걸,



그래도 고마웠다.


나 대신 울어주는 저 드라마의 캐릭터가 있어서,


그리고 모든 인간은 결국 완전할 수도 없고,


다만 혼자서 그렇게 누군가를 도와주는 존재만도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존경의 대상인 그 누구도, (그것이 스승이든,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결국 외로운 인간이며

나약한 인간이며

어디선가는 펑펑 울어서라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대놓고 원없이 울어볼 수 있는

그런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사람은 어쩌면 좀더 위로받는 삶이 되지 않을까.


괜스레 한국의 중년, 그리고 남성의 공통분모를 끄집어내고 싶고,

거기서 지금 나의 외로움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지금의 솔직함이다.


혼자만을 감당하고 살아가는 것도 크나큰 고독이지만

가족을 꾸려서 물질적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가장의 무게도 결국은 고독하다는 것이,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고, 견뎌내야 하며, 혹은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인생의 필연적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쓰고보니 나중에 보면 낯간지러울 수도 있어

지우고도 싶겠지만

지우면 정작 그 고독은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은 그대로 쓴다.


명작 드라마를 보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는 것은

직접적 인간 관계의 기댐을 대체해주는 고마운 무기이자 안식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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