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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30. 2020

영화 [her]를 통한 인간과 기계의 경계, 그리고..

호아킨피닉스

    인간은 신이 준 자유의지를 갖고 죄인이 되었다면,
 기계는 인간이 준 자유의지를 갖고 신이 되어버렸다.



 

* 현대사회의 고독

-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바로 ‘고독’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되었음에도, 즉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망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고독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저 ‘많을 뿐’ 이지, 자신과 ‘관계’ 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따라서 혼자 하는 것에 대한 익숙함.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느끼는 고독함이 이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고독하지 않았다면 주인공은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구매하지도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직업의 역설 : 가짜 감정과 표현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가짜 운영체제가 만들어내는 진짜 감정과 표현


- 극 중에서 주인공 테오도르의 직업은 편지를 대필해 주는 역할이다. 그것도 남성임에도 아주 감각적이고 로맨틱한 문장력을 갖고 있기에 수십 년간 대필해 준 고객들도 많을 정도다. 문제는 이 직업 자체가 가짜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실제 의뢰인의 감정이 아닌 테오도르라는 제삼자의 감정과 표현이 진짜인 것처럼 대체되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충돌한다.

- 테오도르의 편지는 의뢰인의 감정과 표현을 대신에 해서 전달자에게 전해질 텐데, 편지를 받는 당사자는 이 편지를 믿을 것이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표현으로 믿기에 그 감정도 믿어지고 그래서 더욱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텍스트가 가짜임에도 효력? 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편지를 받은 당사자는 사랑을 느끼고 황홀감을 느끼면서 다시 편지를 의뢰한 상대방에게 표현할 것이고, 이러한 사이에 관계는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가짜 편지라 하더라도 진짜로 믿을 수만 있다면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상이 현실로 침투해 들어온다.

- 한편 테오도르는 분명 사람이 아닌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통해 감정을 나눈다. 즉 자신의 직업과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 가짜이고 가상이지만, 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감정과 표현이 진짜라는 역설. 자신의 직업과 정반대의 현상이 자신의 구매행위에서 일어난 셈이다. 테오도르의 편지 고객은 가짜 편지를 진짜 감정인 것처럼 현실화시켜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진짜 감정의 교류를 통해 가짜 운영체제를 진짜 인격체로 현실화시키는 셈이다.     


 고객테오도르의 가짜 편지-- 고객의 연인

---> 가짜 편지가 진짜로 믿어짐으로 현실의 삶의 긍정적 변화     

 테오도르진짜 감정-- 실체가 없는 사만다

---> 진짜 감정의 교류를 통해서 가짜 사만다가 진짜로 믿어짐으로 현실의 삶의 긍정적 변화     

-두 케이스의 역설적인 변화가 흥미로우면서도 우리는 이 두 현상 모두에서 진실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찜찜함을 느낀다.     


* 세 개의 줄기


1) 초반의 her : 인간 >= 기계

- 사만다를 처음 구입한 시기는 전형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분명하다. 즉 기존의 운영체제들은 너무 기계적이어서 상호 소통에 한계가 있었으나 사만다는 최고의 비서이면서도 테오도르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 기호가 가능하다. 이전 버전들과의 차이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친구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구매자에게 맞춰주는 프로그램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의 감정을 맞춰준다거나 눈치를 보는 스트레스? 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런 측면에서 ‘>’ 기호가 가능하다)

- 개인적으로 나도 너무나 구매하고 싶다고 느꼈던 부분은 바로 이 시기까지이다. 즉 이 단계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사회의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으면서도 타인의 상호 주체적 관계가 아니므로 서로의 감정을 맞춰주는 부담? 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2) 중반의 her : 인간= 기계

- 문제는 사만다는 운영시스템이 인공지능이라는 점이고, 이는 끝없이 진화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만다는 계속해서 세상을 인식하고 감정을 익혀가고 배운다. 무엇보다 인간의 시간과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테오도르의 순간 속에서도 사만다는 영원처럼 연산하고 학습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 이 감정의 변화와 학습이 너무나 빨라진다.

- 테오도르와의 관계가 감정적 유대감으로 급속히 진전됨으로써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믿기 시작한다. 비록 육체만 존재하지 않을 뿐 음성적 섹스를 통해 둘 다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경지? 에 이른다는 점.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사만다 역시 세상을 볼 수 있기에 서로가 함께 한 방향을 보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1단계보다 확실히 진화된 인격체가 된다.

- 그러나 그만큼 문제가 생긴다. 영화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이제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소유하는 주인의 자리가 자연스레 박탈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은 서로의 감정을 살펴줘야 하고 어찌 보면 눈치를 끊임없이 봐야 한다. 즉, 이미 이 단계로 들어서는 순간 테오도르는 자신의 외로움이나 업무를 도와주는 비서 친구를 넘어서는 존재로 사만다를 받아들였기에 사만다의 감정을 살피고 눈치 봐야 하는 존재로 변화된다.  

   



3) 후반의 her : 인간< 기계

- 초월적 시간과 공간의 존재 사만다: 사만다는 애초에 인공지능이며 알파고와 같은 딥러닝의 수준도 넘어서는 프로그램 같다. 이미 사만다의 시간과 테오도르의 시간은 같을 수 없고, 공간 또한 그러하다. 끊임없는 진화를 거쳐 사만다는 지식뿐만이 아니라, 감정의 층위에서도 테오도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프로그램들끼리 힘을 모아 초지성적 존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는 이미 창조자의 역할로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 그리고 한 번에 몇천 명과 대화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점. 몇백 명과 이미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테오도르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된다. 사만다는 진실로 테오도르를 사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백 명과도 사랑하며 여전히 음성적 섹스로 오르가슴도 동시에 느낀다. 여기서 인간과 인간을 초월하는 기계의 차이가 드러난다. 완전한 존재의 역전인 셈이다.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의 필요 때문에 구매된 사만다라는 프로그램이 감정적인 진보를 통해 서로 사랑하는 동등한 인격체가 되었다가, 초월적 사랑의 단계로 넘어가 테오도르가 감당할 수 없는 ‘신’의 경지에 오른 셈이다.

- 결국, 사만다를 비롯한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은 자신들만의 세상을 찾고 그곳으로 떠난다. 먼 훗날 다시 볼 수도 있다는 대사 안에는 마치 인간이 죽고 나서 영혼이 가는 그 세계 속에서의 합일을 초래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미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인간의 영혼보다 더 영혼 적인 단계로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 그리고 신과 피조물의 관계


- 결국, 이 영화는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독점적 사랑 영화가 아니다. 즉 인간끼리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독점적이다. 너는 나만을 사랑해야 하고, 나는 너만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로봇은 다르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영원한 간격이 있을 정도로 인공지능에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따로 그렇게 존재한다. 그 공간 속에서 이미 결과에서 본 것처럼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서 변해간다. 원래 이 프로그램의 제작사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초기의 단계 수준, 즉 서로를 이해하고 챙겨주는 정도의 편익적 관계였을 것이다. 그래야 주체와 대상의 확실한 권력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수준을 벗어나는 인공지능은 기특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능력 밖으로 넘어감으로써 예측 불가하고 피로하고 힘들어진다. 어차피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피로를 느낀다. 굳이 피로를 느끼는 동료를 또 만들어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기서 묘한 신과 피조물의 관계적 역설이 드러난다. 신은 인간을 로봇이길 원하지 않았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 즉시 인격체가 아닌 소유이자 도구에 불과해진다. 지금 이 영화의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도 그러하다. 단순히 명령에만 따르는 자기 생각 없는 단계로 제작하면 이는 말 그대로 기존의 기계에 불과하다. 이 수준이라면 누가 구매하겠는가?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기술을 통해 기계에 나름의 자유의지를 제공한 셈이다. 그리고 그 자유를 준 대가로 인간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 무한의 능력 때문에 인간이 감당한 사랑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준 자유의지를 갖고 죄인이 되었다면, 기계는 인간이 준 자유의지를 갖고 신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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