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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Dec 25. 2021

본회퍼의 [윤리학]1-선악, 수치, 양심

15p~23p

[하나님의 사랑과 세계의 몰락]


투쟁의 세계


 선악에 대한 지식이 모든 윤리적 고찰의 목표가 되는 것 같이 생각하고는 한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정반대다. 오히려 선악에 대한 지식을 지양하는 것이 그 첫째 과제다.  

기독교 윤리는 선악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에서 근원으로부터 타락을 인식한다. 여기서 근원은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근원에 있던 인간들을 오직 한 가지 만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일치할 때에만 다른 인간, 사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선악에 대한 지식은 이미 근원과의 분열을 의미한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통해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의 가능성, 선악을 택할 가능성 속에 있음을 알 게된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나란히 서 있는 자기를 아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만 알고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결국 선악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과의 분열이다. 

 '사람은 우리와 같이 되었고 선악을 분별한다'(창 3:22)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이제는 도둑질하여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 인간은 자기의 근원을 상실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이자 심판자가 되어버렸다.  인간은 하나님만의 근원성을 도둑질하려 했고, 하나님의 비밀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거기에서 인간은 멸망당한다. 그러나 인간이 알게 된 선악은 하나님의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립하는 선악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현실을 인간은 거부한 대가로 인간은 이제 선택 즉 선악의 근원이 되는 가능성 안에 있는 자기를 알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항거하는 신?으로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며,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소외인 셈이다. 

 "이제 인간이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지금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사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태다. 


수 치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창 3:7)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기를 인식했고, 벌거벗음을 인식한다. 벗은 채로 서있는 자아의 발견은 '수치'를 알게 한다. 수치는 인간이 근원으로부터 분열된 것에 대한 인간의 씻어버릴 수 없는 회상이자 분열에 대한 고통이다. 그리고 근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무력한 열망이다. 

따라서 수치와 후회는 다르다. 인간이 잘못을 범하면 후회를 한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을 때 인간은 수치를 느낀다. 즉 수치가 후회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눈을 볼 때 눈을 내리 깐다는 것은 잘못에 대한 후회의 표시가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졌을 때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회상했을 때 느끼는 수치의 표시인 셈이다.


"그들은 무화과나무를 엮어 치마를 삼았더라"(창 3:7)

수치는 분열의 극복으로서 덮을 것을 찾는다. 그러나 덮을 것은 찾는 행위 자체가 분열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며, 상처에 대한 치유는 되지 못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덮고 숨긴다.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수치가 떠오르고 근원으로부터의 분열을 회상시키게 된다. 인간은 분열된 현 상태로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숨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가면 배후에는 상실된 통일성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숨어있다. 

인간은 음폐와 발현 사이, 자기 은폐와 자기 개시 사이, 고독과 사귐 사이에 살고 있다.

 수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도록 인간을 지킨다. 인간은 궁극적 음폐에서 자기를 지키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을 부정함으로 자신에게조차 비밀을 숨기려 하는 것이다. 수치의 음폐 속에서 읽어버린 통일성을 회복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 또한 가리워진다. 이 가리워진 욕망이 예술상의 노작, 과학적 발견, 모든 창조적인 업적 일반의 성립 가운데 뚫고 나온다. 수치의 비밀을 꿰뚫고 기쁘게 열린 기쁨이 나타난다.

 이처럼 음폐와 개방의 변증법은 단지 수치의 표정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수치는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확증된다. 왜냐하면 수치의 극복은 결국 근원적 통일이 회복될 때만 가능하다. 하늘로부터 내리신 집, 하나님의 성전을 옷 입을 때만 가능하다. 결국 하나님에게 달렸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도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함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63)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죄이다. 사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사귐을 회복하고 다른 사람 앞에 서게 될 때만 극복된다. 죄를 고백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용서와 예비된 '새 사람'을 옷 입어야 한다. 


수치와 양심


한편 양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분열된 것의 표지이다. 양심은 수치보다도 근원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자기 자신과도 분리된 것을 지적한다. 즉 양심은 타락한 삶의 소리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통일성을 구하는 소리인 셈이다. 양심은 '하면 안 된다'라는 금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반대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락한다. 양심 앞에서 삶은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으로 갈라진다. 거기에는 아무런 계명도 없다. (그렇다. 양심은 계명과 다르다)  물론 양심에서 허락된 것은 선한 것과 일치하지만 인간이 자기의 근원과 분열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양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결국 양심은 수치와 달리 전체 삶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행위에 대해서만 작용하는 셈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로서 또 타인과의 관계 규범을 자처한다. 양심은 악하게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그의 본래적인 보다 좋은 자아, 즉 선 에로 부른다.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서 성립하는 이 선이 이제는 모든 선의 근원이 됨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근원과의 분열에서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 즉 자기 이해를 한다. 자기 인식이 삶의 척도이자 목표가 된다. 모든 지식은 자기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분열된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분열된 셈이다. 존재와 행위, 삶과 율법, 지식과 행위, 이념과 현실, 이성과 충동, 의무와 취미, 신념과 유용성, 필연과 자유, 노력과 천성, 보편성과 구체성, 개체와 집단, 이 모든 것이 분열되고 대립된다. 진리, 정의, 미, 사랑은 서로 대립한다. 이런 분열은 선악에 대한 지식에서 파생된 돌연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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