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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06. 2022

[DEUS EX MACHINA]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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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유와 자연 사이]-(자유의지와 결정론)   

  

  1-1장에서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관계가 근대, 모더니티의 특성임을 살펴보았고, 이 과정에서 인간 이성을 통한 자연에 대한 지배 관계의 성립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를 규정할 때, 인간 이성이 단순히 자연을 탐구하는 수학과 과학적 지식만의 발전이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인간의 ‘자유’에 있다. 중세의 인간이 신에 의해 지정된 자리, 규정된 존재에 불과했다면 근대의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존재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적 발전이 근대를 상징하게 되었으나 정치, 경제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 개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었는지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근대철학은 이 인간의 자유와 자연(과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른 끊임없는 논쟁의 장이었다. 데카르트를 위시한 인간의 우월론도 있지만, 스피노자와 같이 자연 개념을 인간과 신의 연속적 계열로 이해하는 예도 있으며, 칸트는 이러한 자연과학의 정당성을 수용하면서도 자유를 통한 도덕성을 확보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학자 이름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관계의 상황에 집중하자. 자연을 배제한 자유, 자유를 배제한 자연, 자유와 자연의 양립 가능성)

            

인간,자유,선택------vs-------자연,과학,필연     



*자유는 무엇인가?     


자연은 인간과 달리 자연의 법칙, 즉 필연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선택되는 대상이라면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인간은 이미 결정되고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가능성을 열어가는 존재이며 그 자유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 자유 - 그렇다면 자유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사유해보자. 필연성이 ‘있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아닌 어떤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자유는 ‘가능 적으로 있다는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있지 않은, 단지 있을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이는 곧 무(無)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의식이 무(無)라는 것은 의식이 어떤 사물, 어떤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어떤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곧 존재를 의미하며 이는 곧 자유의 가능성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어떤 적극적 규정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을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는 정작 추상적이어서 공허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 모든 존재에 거리를 둔다는 문제가 있다. 어떤 물질성과 필연성도 수용할 수 없는 주체는 마냥 관념적이기만 할 뿐 어떤 구체성을 느껴보기 힘들다. 결국, 이러한 오류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 가져온 결과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식 자유 한편 그리스인들의 자유는 근대적 자유(자연과 대립하고 도덕법칙과 사회규범도 자기 자신이 입법한 것처럼 수용하는 자율로서의 자유)와 달리 자연을 포함한 전체의 일원으로서의 자유에 가까웠다.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집과 고향) 안에서의 자유였으며 자연을 떠나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주장되었다. 자연을 떠나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연을 따르는 삶이 진정한 자유로운 삶이라고도 보았다. 또한, 필연과 운명을 피하고 우연적 발생 속에서 자신의 선택 폭을 넓히는 것이 자유라 할 수 있었는데 항상 그 선택에는 대가와 비극이 따라왔다. 그런데도 운명과 필연에 도전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악법이었어도 법에 순종하는 행동 안에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음을 소크라테스는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을 거부하고 외국으로 추방되거나 스스로 떠날 수 있음에도 결국 이 법의 집행을 ‘선택’한 셈이다) 외적 법과 관습보다 자기 훈련과 선택, 이성적 통찰을 중요하게 보았다. 플라톤은 더 나아가 이성으로 파악된 필연성이 가장 강한 필연성이라고 보았고 자기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자유인에 어울리는 덕과 선을 실천함으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적 자유- 기독교적 전통이 근대적 기계론적 자연관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자연을 어떤 신적 존재로도 보지 않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과 함께 신이 지은 피조물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과 필연의 이미지보다 자연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거주지, 안식처의 개념이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는 해방사건을 경험함으로써 자유의 땅에서 자유의 의미를 얻었다. 그리고 예수의 구원이란 곧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기쁜 소식, 복음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적 자유는 그리스나 고대 전통처럼 출생 신분이나 교육 정도와는 아무 상관 없이 해방사건, 역사적 사건의 경험을 통해 모두가 얻을 수 있는 자유였다. 소극적 의미로는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적극적으로는 자유인으로서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계몽 정신과는 차이가 있다.--> 이와 연관하여 이사야 벌린은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를 구분, 정리하는데 소극적 자유는 ‘~부터의 자유’로써 정부, 종교 등 어떤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로의 자유’ 로써 단순히 간섭을 벗어 자기계발, 자아실현, 혹은 공화주의적으로 적극적 정치 참여로 드러날 수도 있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는 정부와의 관계에서 본다면 소극적 자유가 시장경제와 같이 정부 간섭의 배제 정도로 이해할 수 있고, 적극적 자유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처지에서 사회복지 실현을 통한 자유로 이해할 수 있다. 

 

 간섭없는 자유지배없는 자유- 한편 미국의 정치학자 페팃은 간섭 없는 자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지배 없는 자유’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즉 ‘간섭’과 ‘지배’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간섭 없는 자유는 정작 간섭에서는 벗어나도 지배는 정당화할 수 있다. 노예제가 대표적이다. 노예라는 신분적 예속은 지배의 관계에 머무르는데, 좋은 주인을 만나서 간섭을 덜 받는 상황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주인의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노예라고 해도 신분적으로 노예는 노예일 뿐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꿈꾸는 자유는 결코 신분적 예속이 아닌 만큼 간섭보다는 지배를 거부해야만 한다. 신분적인 자유, 지배 없는 자유만 있다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의 간섭은 용인할 수 있고, 혹은 용인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간섭이 필요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자유의 정의와는 결을 달리함, 따라서 이를 ‘지배 없는 간섭’이라고도 함) 시민으로서 권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의무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작은 간섭은 오히려 민주주의 안에서 필요한 덕목이다.      

 자율로서의 자유이는 칸트식 규정으로서 근대적 자유는 자기규정이며 자기 입법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연적 경향성을 억압하고 외부적 강제로부터 독립을 뜻한다. 보편화할 수 있는 도덕법칙과 사회규범에 대해 ‘마치’자기 자신이 입법한 것처럼 수용하는 결단과 태도가 바로 ‘자율’이다. 칸트의 자유는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적 자유와 차이가 있다.

 근대의 주체와 자유라는 것은 그리스나 기독교적 자유처럼 자연, 공동체, 혹은 신 등의 요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는 투쟁이며, 그 가운데서 주체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얻는 자유이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계몽은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자 용기라고 주장하며 무엇보다 계몽의 방법으로 자유를 강조한다. 인간은 의타적이고자 하는 성향과 본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현실과 상황에 안주하고자 하는데 칸트는 이를 나태함으로 보고 끊임없이 변하고자 의타적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벗어남에 있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사용을 구분하는데 칸트에게 사적이라는 범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시민의 지위나 공직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보통 자기 직업이나 사회생활을 ‘공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칸트에게 이는 ‘사적’인 영역이다. 즉 사적 영역에서는 그 영역 안의 지배 관계에 대하여 자기 위치에 맞게 복종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한편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세계시민이자 전 세계 공동체라는 ‘공적’ 영역에 속해 있다. 즉 보편 이성을 가진 한 명의 인간(세계시민)으로서는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유를 갖고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서 사적 영역에서는 국민의 의무를 다해 세금을 내야 하지만, 세금납부에 부조리함이 있다면 공적 영역에 동시적으로 속한 한 사람의 학자적(이성을 갖는) 인간으로서 부당함을 폭로하고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와 자연의 관계 속에서 칸트는 인간이 모호성의 존재임을 밝힌다. 인간은 자유 측면에서 예지 계에 속하며 이성적이라면, 자연 측면에서는 감성계에 속하며 경험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애매한 위치에서 인간은 자연과 자유 양쪽에 다리를 걸쳐있게 되어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상황 속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 바로 자유인 셈이다. 선택상황 자체가 없다면 인간의 자유는 무의미하다. 선택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자유이다. 칸트는 자유와 자연의 심연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최고선’의 개념을 두었고, 이는 덕과 행복으로 구성된다. 즉 덕은 이성적 존재로서 가능한 선택이며 행복은 자연적 존재로서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선택인 것이다. 문제는 행복과 덕의 동시적 실현이 현실사회에서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악인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의 부조리를 많이 보는가. 따라서 칸트는 도덕적 삶을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누리는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신’의 존재를 소환하여 인간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예지계-이성-덕      /(대립)     자연감성계-경험-행복

                   덕과 행복의 동시실현(조화)



자유의지와 결정론     


한편 자연은 필연적 법칙과 연관되기에 앞에서 다룬 인간 고유의 자유와는 대립하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현실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연의 결정론이 대립하는 상황이 있다. 

 예를 들어 범죄의 동기를 파악하고자 할 때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중요한 분석 도구로써 대립한다. 왜 범죄를 저질렀는가? 왜 그토록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는가? 자유의지의 입장에서는 결국 ‘선택’행위에 의미를 둔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최종적 결정권자는 나 자신이기에 어떤 상황과도 상관없이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만을 갖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환경적인 변수 또한 많아지고 과학적 연구방법론도 발전하게 되어 인간의 선택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갖가지 결정론이 생겨난다. 첫 번째로 유전학적 결정론. 유전적 정보가 점차 과학적 연구로 밝혀지면서 부모와 조상의 유전자가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검토된다. 두 번째는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따른 환경결정론. 사회학적 연구에 따라서 강력범죄가 주로 경제적으로 불우한 지역이나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서 나온다면 범죄자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약화된다. 혹은 아노미 현상으로 불리듯이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혼란을 겪게 되어 그 시기에 범죄가 급증하는 것도 목격된다.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에 의한 무의식적 결정론이다. 즉 자기가 현재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서 이러한 범죄행위의 동기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어릴 적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욕구, 욕망이 무의식 속에서 억압되었다가 성인이 되어가면서 표출된다고 보는 견해다. 그렇다면 무의식에 억압된 그 욕구는 어릴 적 주어진 환경에서 발생한 사건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에 현재의 범죄 책임을 묻기가 모호해진다. 

 이처럼 자유의 영역을 판단하는 것은 갈수록 쉬운 것이 아니다. 물론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서 그 선택 자체를 무효로 하고 어떤 결정론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더욱 부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 선택에 따른 범죄 자체는 유죄로 판단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설령 범죄를 저지를만한 여러 조건에 놓여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해야만 하는 존재로 선고하고, 그렇게 인식하여 판단해야 한다. 즉 여러 조건은 괄호를 치고, 최종적인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사회는 물어야 한다. 

 그런데도 다양한 결정론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유전적 정보, 경제적 변수, 부모 양육 태도, 지역사회환경 등에 의해 일정 범죄가 유독 자주 발생한다면 범죄 발생 확률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변수인 만큼 그러한 환경을 변화시켜주는 것에 사회가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예술적 재능혹은 창의성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즉 예술적 성취 및 각 분야의 창의성이라는 것은 후천적 노력인가, 아니면 선천적인 노력인가. 즉 비틀스나 모차르트와 같이 예술적 성취가 높은 사례를 통해서 이들의 성취가 타고난 재능, 즉 천재성에 기반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자연적 필연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선천적 영향이 지대하다면 아무리 후천적으로 노력해도 물려받은 재능이 부족하기에 결코 선천적 능력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더 중시하는 예도 많다. 비틀스의 경우 데뷔전부터 끊임없는 소규모 공연을 해왔던 것, 그리고 자신들의 창의적인 곡이 한순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곡들을 카피하면서 연주하는 과정에서 그 창의성이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모차르트조차도 어릴 적 신동으로 유명했으나 모차르트에게 그러한 환경을 주기 위한 그 아버지의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조차도 넓은 의미에서는 환경결정론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을 음악가로 키우고자 노력한 아버지의 선택과 그에 부응하여 끊임없이 연주하고 작곡한 모차르트의 실천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모차르트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창의성이 오롯이 타고난 재능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혹은 자연적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부재한 자들은 절망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의 영역, 후천적 노력의 가치는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하고 뛰어난 성취로 이어진다. 모차르트와 같이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이것은 자연과 개인의 자유 문제를 떠나서 ‘사회의 영역’ 즉 정치와 정책의 문제로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가 하고 싶은 영역에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사회를 만들어 간다면 충분히 부족한 창의적 환경의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과의 관계에서 본 자유의지와 결정론    

 

 운명을 믿는가.

 모든 일은 우연인가? 아니면 어제 있었던 일들이 다양한 원인이 되어 발생시키는 필연적 결과인가. 결국, 운명론을 믿는 사람들은 시간적 관계에서 본다면 현재의 순간보다 과거나 미래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체-----------------대상

                 미래-------->--------현재

                 과거-------->--------현재


 우선 상식적으로 운명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통해서 도래하는 것으로 인식되고는 한다. 즉 어떠한 인과적 상황과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내가 만날 배우자와 나의 앞으로의 연봉이나 수명 등을 누군가가 정해두었다는 전제를 한다. 즉 나를 초월한 절대자 혹은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는 이미 벌어진 과거가 되기에 내가 무엇을 하든 정해진 운명은 이미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한편으로 과거를 현재보다 우선시하는 견해라고 생각해보자. 과거라는 것은 나의 조상들의 상황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들의 삶과 행태가 일정한 경제적 소득을 물려줄 수 있으며, 아니면 축적된 문화적 성향이 오늘날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사주팔자는 또 어떠한가. 내가 타고난 시간이 내 운명을 점지한다고 믿을 때도 결국 현재의 내가 아닌 과거의 기록이 중요하다. 결국, 유전자가 되었든 환경이 되었든 과거의 모든 정보를 현재보다 중요시함으로써 현재의 선택은 결국 과거에 이미 정해지고 예정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미래를 현재보다 중시하든, 과거를 현재보다 중시하든 결국 현재의 무게, 현실의 자유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어있다. 내가 무슨 일을 지금 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래의 시각에서 이미 벌어졌던 흔적인 셈이며, 과거의 상황에서 예정된 필연적 결과가 되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체계가 무조건 인간에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의 고통과 절망의 책임을 나에게 두는 것보다 외부로 돌릴 수 있기에 현실적 위안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중시하고 현재를 중시한다면 과거도 미래도 현재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오직 현재의 순간, 순간의 선택만을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과거의 탓도, 미래의 탓도 아닌 오직 지금 자기 자신의 선택 무게를 받아들이는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현재의 자유만으로 과거의 영향을 완전히 떨칠 수도 없다. 부모의 유전자에 의해서 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나서 살아간 삶에 대한 불편이나 내전 국가나 빈민국가에서 태어났을 때 현재의 선택이 모든 걸 극복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혹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소망과 상상 또한 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자유의 선택영역을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매 순간의 자기선택의 막중한 책임감을 감당하면서 곧 과거가 될 현재를 보내주는 것, 곧 현재가 될 미래를 예비하며 담담하게 어떤 상황이든 마주하고 선택할 용기를 항시 갖고 있어야 한다.      


                주체<-------------->주체

      현재(자유의 무게)<-------------->과거와 미래

      


*자유와 자연 사이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이미 1-1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현대는 기계론적 자연관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연 그 자체를 주체로 보고자 하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주체<--------------------->주체

              인간---------------------자연동물     


 나아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무조건적 예속 관계로 보기보다 동물의 고통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주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반려견, 반려묘와 같이 인간의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관계로까지 그 가치가 변해가고 있다. 근대적 인간 중심사고에서는 동물 또한 그저 인간, 주인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인간과 동물을 완전히 동등하게 보는 생태학적인 입장도 등장했다. 인간과 동물을 우열관계로 구분할 결정적 근거는 없으며 같은 생명체, 생물학 개념, 진화의 연속성 정도로만 보게 되는 관점인 셈이다. 결국, 인간과 동물의 완전한 동등성은 육식에 대한 반대로도 연결되어 기존 인간의 식습관도 바꾸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재적 우월성을 그대로 견지하되 인간의 도덕적 성숙과 생명에 대한 존중과 태도에 있어서 동물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행하는 인간의 잔인한 행동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실현된 가능성을 내포하는 비도덕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물을 때려본 사람은 사람까지 때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예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위에 제시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인식과 실천의 관계에서 구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1) 근대 인간중심주의  

인식인간 우월론          실천동물 도구화

 2) 생태학적 관점  

인식인간과 동물의 동등함  실천동등한 대우

 3) 인간중심주의 변형관점 

인식인간 우월론,          실천동등한 대우

따라서 동물실험에 대한 찬반에서도 1) 번 관점은 당연히 찬성, 2)은 반대가 된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의 고통을 수단 삼을 수 없고 그럴 권리도 없다는 것이다. 한편 3)의 경우 인간이 존재적 우위에 있기에 인간의 생존에 유익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부득이하게 동물실험은 허용될 수 있다. 다만 불필요한 고통을 실험설정에서 방치 및 생산하는 행위는 충분히 반대할 수 있으며, 화장품 같은 인간의 필요 이상의 욕망을 위한 실험 수단일 경우도 그러하다. (치명적 바이러스를 고치기 위한 백신 개발에 사용되는 동물실험과 화장품 안정성을 위한 동물실험은 그 가치가 다를 수 있다)        



https://www.bookk.co.kr/book/view/112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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