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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May 29. 2020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1편

왜 지젝인가?그리고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이 글은 [토니마이어스/누가슬라보예지젝을미워하는가/엘피] 를 요약한 글입니다.


 지젝은 철학자이면서도 , 지극히 유희적이며 철학을 오락거리로 만드는 자이다.  

 대중문화를 통한 접근, 특히 영화를 통한 철학적 사유가 특이점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놀란다. 음란한 표현을 서슴치 않게 표현함으로 독자인 우리로 하여금 부적절한 향락에 빠질 수 있게, 일반적 경우에는 분명히 느꼈을 죄의식없이 향락을 즐길수 있게 해주는 자이다. (우리가 평소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그것에 대해 지젝은 과감하게 대신 표현해준다)


 지젝의 부정어법: 어떤 것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정작 그것을 말하는 장치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전통철학의 한계를 드러낸다.지젝이 다루는 대상은 이론의 영역에서 배제해 온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이성을 그는 오히려 보수적인 전통철학의 이론을 활용하여 드러내기에 더 일탈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헤겔,라깡,맑스를 이용하여 외설적 표현으로 진리를 드러낸다?) 

-진실의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만약 이전의 방법으로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다른 각도에서는 이해된다면 그 각도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라캉의 체계는 헤겔로, 맑스는 라깡으로, 할리우드는 지젝으로...

 그의 책 또한 일관된 논의전개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 하나의 구멍 주위를 돌며 윤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주변부를 맴도는 그의 스타일은 '어떤 것의 진실은 항상 다른데 있다는 명제, 어떤 것의 동일성은 그 외부에 있다'는 지젝의 기본명제를 따른다.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대통령후보

지젝은 구 유고슬라비아 49년생, 중산층 관료의 독자, 당시 공산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는 모든 영화를 규제하기 위해 대학자료실에 제출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억압적 방법이 오히려 거기에 있었던 지젝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침. 거의 모든 미국,유럽영화를 다 볼수 있었음. 

 이미 나라에서 불순한 사상가로 찍혀서 대학교수 자리 빼앗김. 그래도 공부는 계속, 뷰블랴나의 이론 정신분석학회 창립,  79년에서야 교수자리가 아닌 대학교 내 연구소에 직장을 얻게 되는데 오히려 연구하기 이상적인 장소, 

 라깡의 사위 알렝밀레에게 정신분석을 배우면서도 자신의 길을 걸음.

90년 슬로베니아 최초의 민주선거에서 4인 대통령후보로 출마, 5위로 떨어짐. 자기 신념을 위해 자기 손을 더럽히는 걸 마다하지 않았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 91년 슬로베이나 공화국의 과학 대사.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89년 발간. 

지젝은 그 스스로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했기에 거기서의 차이 혹은 소외가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잡아준 셈이다. 지젝~ㅃ ~1`


 주체란 무엇인가? - 우리의 모든 개별적 특징, 즉 욕구,관심,믿음을 제거했을 때 남겨지는 바로 그 것이다. 주체는 사람에 따라 개별적이며 고유한 의식의 내용이 아니라 의식의 '형식'이다. 

 이는 너무 추상적인가? 민주주의의 주체가 바로 이런 식이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형식적인 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개인들의 형식적 결합일 뿐이다'

 형식적이기에 모두가 평등하고 그런 민주주의의 추상성에서 개별적 인간의 인종,젠더.종교,습관,,,등등에는 무관심하다.  즉 주체는 세계에 대한 관점, 그로부터 세계가 보여지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망막으로 나를 볼 수 없듯이 세계에 포함된 나는 세계를 볼수 없다. 따라서 거기서 자신을 분리시켜온 세계의 한 조각, 거기가 세계가 보여지는 자리이며 세계에 대해서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자리가 된다. (주체에 대한 형식적 추상과 개별적 특수라는 모순점이 해결되는가?)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철학에서 헤겔, 정치에서 칼 맑스, 정신분석학에서 라깡. 

1]사유방법 제공의 헤겔

 관념론으로써 개별관념들이 절대관념으로 통합된다고 본 헤겔, 그 총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변증법적 사고의 필요, 정반합을 통해 더 큰 진리로 화해한다는 관습적인 생각을 넘어 지젝 스스로의 독창적 독법을 보여준다.  즉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 즉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말로 그 관념에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 거기서 그의 모순어법이 나온다. 단순히 조화와 종합이 아니라, 즉 진리는 차이의 소멸이 아닌, 모순속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다. '가상현실은 현실자체보다 더 현실적이다' '기독교 전통은 맑스주의에 의해 신봉될 것이다' 등등..


2] 실천적 동기와 근거로써 맑스의 정치학

 맑스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다수에 대한 야비한 억압과 지배를 통해 소수가 광대한 부를 축적하도록 허용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분열의 불공정성이 상부구조에 의해 위장되고 재가,촉진된다. 즉 상부구조는 지배계급에 의해 결정된다.지젝 역시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칭하며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을 꿈꾼다. 헤겔이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분석도구'를 제공했다면 맑스는 그런 분석과 비판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었다. 

 이론적 실천으로써의 사유는 경험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지젝의 영역은 바로 상부구조, 관념,문화에 있다. 상부구조의 핵심역할은 기존의 경제적 조직화방법의 재생산을 지탱하는데 있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사실의 왜곡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축구가 단지 게임이라고 내가 주장할때 사실 축구가 민족주의의 전쟁터이거나 동성애적 결속이 맺어지며, 노동계급의 상업적 착취의 장이 되는 방식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때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문제인 것이다. (사물에 대한 사고의 옳고 그름)

한편으로 다른 정의도 가능한데 오늘날 우리의 사고지평이 자본주의로 재현되기에 실천적 차원에서 사회를 다르게 조직할 대안을 인식조차 할 수 없다고 맑스주의자들은 비판할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는 변경될 수 없는. 실질적 사고의 한계를 재현하는 것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논쟁으로 맑스주의 안에서도 논란이 많음. 

이 지점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폭넓은 정의) 이 이데올로기가 개인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라깡'을 통해서 알게 된다.


 3] 개념틀과 분석 용어 제공한 라깡의 정신분석학

 지젝은 라깡을 대중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정신분석학이 단순히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데 머무는 인식에서 정치,철학,문학,과학,종교등 모든 인간존재의 활동영역으로 확대시켰다.  라깡이 마련한 초석으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이해해야 한다.

 3-1 영원한 자기 찾기, 상상계

 상상계는 자아가 탄생하고 인식되는 과정, 거울단계로 불린다. 생후6개월에 시작,

인간은 7세정도까지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 미숙함을 거울속에 비친 자기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극복해간다. 거울 이전에 온전한 자기 인식이 불가능했다가 거울단계 이후 완전히 통일된 종합적 신체 형성이 가능케 된다. 여기서 유아는 통일성의 감각적 쾌락, 자아의 감각을 부여한다. 그러나 거울단계 자체가 오인이다. 아이가 인식한 이미지는 사실 그 자신과 동일하지 않기에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똑같다고 오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자아는 구성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 이미지 사이의 불일치로 찢기고 부서져 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자신과 같은 것으로 화해시키려고 끝없이 노력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도 이 과정은 계속되는 셈이다. 그래서 상상계는 라캉과 지젝에게 항상 경멸의 시선을 받는 세계이기도 하다.  현대사회가 정점에 도달한 상상계라고 라캉은 보았다. 자기 자신에게 강박되어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을 세계위에 둔다고 비판적으로 봄.


3-2 불가피한, 그러나 영속되지 않는 상징계

 상징계는 언어에서부터 법에 이르는 모든 사회적 체계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세계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상징계에 등록되고 이름이 정해지고, 가족, 사회경제집단, 젠더, 인종등에 소속된다. 라캉은 상징계과 의미화 사슬, 기표의 법에 의해 통합되며, 인간은 이 상징계 속에 갇혀있다.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결합이다. 기표를 기의보다 우위에 둔 라깡. 기표 차이를 통해 규정되는데 남자가 남자인 것은 그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왼쪽이 왼쪽인 것은 오른쪽 아니기 때문. 언어는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성한다.

 테러리스트와 자유투사의 사례, 우리는 그들을 무엇으로 부르냐에 따라 그에 대한 태도또한 달라진다. 

의미화사슬에 의해 우리가 어떤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표현을 선택하기 위해 수많은 대체언어를 이미 머리속에 떠올린다는 점)

 결국 우리는 세계 그 자체를 알 수 없으며 결국 영원히 '언어의 감옥'속에 갇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상징적 질서의 유형이나 성격은 결코 영속적이거나 필연적이라고 할수는 없다. 

 참고: 소타자는 상상적 타자. 우리 자신의 자아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

        대타자는 상징적 질서를 가리키거나 상징계를 대리표상하는 다른 주체를 가리킨다. 


3-3 변증법의 활동무대, 실재계

 실재계는 알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가리킨다.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획되기 이전의 세계다.  우리는 단지 세계의 각 부분적 요소를 지시 하기 위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로 구별짓는게 불가능한 그런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실재이다. 실재에서 나무와 숲, 산이 구분되지 않음.  실재계는 상징계에 저항한다.

 '우리는 왜 실재에 주목해야 하는가' 어차피 우리가 상징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면 실재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을 다르게 만드는가 ? 이 둘은 내밀하게 결부된다.

 일단 상징계는 실재계를 절단한다.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분절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상징화에 적용되지 않는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에이즈 그 자체는 실재와 같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부단한 설명과 노력이 있으나 그것은 상징화를 위한 시도일 뿐이다. 실재는 무감각하고 무의하다. 그것은 단지 있을뿐이며, 의미는 오직 상징계의 현실 속에서만 발견된다.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절단되기 이전의 충만한 사물의 상태라는 점에서 상징계에 앞서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상징계가 이런 분절 과정을 완수하고 남은 잔여물이기도 하다. 즉 실재는 상징계 이후에 발생한다. 상징계 내부의 실패나 공백으로만 나타나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잉여인 것이다. 이렇게 실재가 상징적 질서 이전에도 존재하고, 동시에 상징화 이후에 존재하기도 하다면 이는 모순이지만, 그것을 지젝은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헤겔식 독법)

실재가 그래서 변증법의 활동무대이다. 대립된 항들은 실재계에서 일치할 수 있다. 

상상계는 두 항들이 조화로운 종합속에서 화해할 수 있는 곳

상징계는 두 항들이 변별적으로 규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실재를 직접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주체들은 오히려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정확히 이해된 그대로라면 모든 것이 자체의 충만함 속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면 , 다른사람이 세계를 보는 방식과 내가 완전히 일치한다면, 모든 기표가 완벽하게 모든 기의에 부합한다면, 의미화 연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실재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징적인 질서만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것, 우리를 주체로 만드는 것은 의미화 연쇄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결정이다.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 그것이 곧 기계이고 로봇일 뿐이다. 

예: 한두시간 운전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잊어버림을 깨달을때, 운전의 법칙이라는 상징적 질서의 한계기에 자동적이고 맹목적으로 복종한 결과. 그 순간 주체로서의 우리는 사라짐. 그러나 갑자기 반대편 트럭을 보고 놀라서 핸들을 꺾을때 실재의 침입을 경험한다.주체로서 존재,

 주체는 상징계와 실재 사이의 경계, 혹은 그 사이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즉 상징계와 실재계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계에 맞서는 실재의 철학자-

라캉적 의미의 '실재'를 확장하고 자기화한 지젝.

지젝은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속에서 실재를 다룬다.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한다면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려 성차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설명한다. 

 *외상: 실재가 상징계의 작동을 방해하는 지점.




* 본 내용이 딱딱한 요약문이기에 해설강의가 필요한 분은 아래링크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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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uoRUDzLk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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