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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13. 2022

롤즈와 샌델이 본'사회적 배려자전형'

사회적배려자전형 찬성입장

 사회적 배려자 전형이 과연 공정한 입시제도인가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롤즈와 샌델은 각기 다른 근거로 옹호입장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평등적 자유주의자'인 롤즈의 경우를 살펴보자.

롤즈의 정의원칙은

1원칙으로 자유의 평등원칙이다. 즉 누구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기본적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한다.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자신의 자유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현실에서는 가능하겠으나 그래서는 안되다는 강력한 요청인 셈이다)

2원칙은 두개로 다시 나눠어지는데

2-1이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책이나 직위와 결부되도록 배정되어야 한다.

2-2는 최소수혜자의 최대혜택의 원칙으로 사회불평등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갈때 용인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대학입시에 있어서 과연 모든 학생들에게 공부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 실현되고 있는가? 사실 제도적,형식적 입장에서 본다면 기회균등의 원칙은 지켜진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대놓고 학생의 공부할 자유를 빼앗을 것이며, 어떤 조건에 기반해서 입시에 구조적 차별을 허용하겠는가? 즉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서울대 입학자격을 박탈하거나 특정 성을 지향한다고 해서 박탈하는 경우 또한 없다. 그러면 공정한 것인가? 한국민 그 누구도 한국의 입시가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이 입증되는 셈이다. 롤즈가 원하는 것은 형식적 평등이라기보다는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일 것이다.

 단지 '운'에 의해서 부자로 태어나고, '운'에 의해 서울 강남에서 자라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운'에 의해 가난한 집 자녀로 태어나, '운'에 의해 외딴 섬에서 자라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의 환경이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둘다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라고 해도 현실적인 시험점수차이는 상당히 벌어질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롤즈는 바로 이 '운'에 의해 벌어진 간극을 메꾸고 싶어한다. 모두에게 자유가 주어져있는만큼 수험생 모두는 공부할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운에 의한 환경적 여건은 그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공부한 학생의 그 열심이, 유리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학생의 그 열심과 같다면 사회는 두 학생을 똑같이 대우해야 하는 것이다.혹은 전자의 학생은 후자의 학생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노력의 과정보다는 결과적인 점수차이, 시험의 결과가 달라지기에, 그래서 이 불공정한 결과를 보정하기 위해 '사회적 배려자 전형'과 같은 특별전형이 생겨난 셈이다.

 결국 롤즈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온 학생이 누리지 못한 자유를 보상하는 것이며, 그 학생이 누리지 못한 기회균등의 원칙을 실현시켜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2-2원칙처럼 최소수혜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쥐어주는 것인데, 여기서 최소수혜자가 최대혜택을 받는 것을 '특혜'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사회적배려자전형'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왜 그들에게 '특혜'를 줘서 다수의 일반학생을 역차별하냐고 항의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사회적 약자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특별한 제도로 실현된 것은 맞지만 그 특별이 특혜가 아닌 정당한 보상이라는 점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 온 학생들이 일반적인 학생들 수준에서의 환경만 되었더라도 당당하게 누렸을 그 결과를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셈이다. 따라서 다수의 일반학생들은 '사회적 배려자전형'에 대해 항의하는 어리석음보다는 반대의 입장에서 온갖 특혜를 다 받아서 실력보다,노력보다 훨씬 맞은 특혜를 누리는 상류층 집안 자녀들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것은 정말 '특혜'가 맞기 때문이다.

 롤즈를 적용할 때 또 한가지 고려해야할 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제도와 혜택의 동기가 결코 '감정'에 의한 촉발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저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해왔다니 너무 안되고 불쌍하다는 심정에서 이런 제도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칸트나 롤즈는 감정에 연연해서 그런 공정성과 존엄성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한다는 권리를 이성적 판단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셈이다. 불쌍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를 사회가 보상하는 것이니 마치 그들의 혜택을 보면서 최소한의 고마움 정도를 느껴야 한다는 인식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정책을 바라볼 때도 종교적 관점에서 '자비와 긍휼'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 롤즈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 그렇다면 마이클 샌델의 입장에서 '사회적배려자전형'의 정당성을 따져보자.

샌델의 경우는 공동체주의자다. 좀 더 자세히 분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를 따르는 공화주의적 공동체주의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 중요한 정의의 판단기준은 바로 공동체의 '본래목적'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본래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그 목적에 부합한 행위를 하는 것이 정의이자 올바름이다.

그렇다면 샌델은 역차별을 당했다고 억울해하는 일반 학생의 항의에 대해 더 심플하게 답변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인종할당제가 대학마다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더 좋은 백인학생이 불합격을 하고 그보다 점수가 낮은 흑인학생이 합격을 하는 경우 역차별을 근거로 소송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샌델의 입장에서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너는 우리 대학의 설립목표를 읽어봤니?' '너는 이 대학의 설립취지가 뭔지는 알고 지원했니?'라고 물을 것이다. 즉 어떤 대학도 단순히 학생선발기준을 오직 성적이라고만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우수한 성적의 학생을 선발하고 싶어하는 것은 한국대학이든 미국대학이든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렇다고 수능성적만 높은 학생,SAT점수만 높은 학생을 뽑겠다는 대학은 없다. 인성이 엉망진창인데 점수만 높으면 뽑고 싶을까? 결국 대학은 교육기관이고, 장기적으로 그 대학의 이름을 빛내는 훌륭한 학생을 배출하고 싶어한다. 여기서 '훌륭한'이란 것이 단순히 성적만이 아니라, 협동력과 리더쉽, 포용력 등의 다양한 판단기준을 충족시키는 학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학의 설립목표에 만약 '다양성 인재를 추구한다'는 구절이 있다면 대학이 다양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비록 수능성적이 더 낮을지언정 다른 요소를 충족하는 학생을 선발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미국 대학 또한 백인으로만 가득찬 교정보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함께 협업을 하는 교육환경을 만들고 싶어한다면, 그래서 점수가 좀더 낮더라도 용인가능한 성적을 받은 흑인학생을 선발할 자유가 있는것이다. 결국 한국대학에도 다양성 인재를 중시하는 설립목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지역과 환경, 성별 등 다양한 인재들이 학내에서 함께 협력하고 경쟁하는 과정이 추후 사회에 나가서도 훌륭한 인재를 커나갈 잠재력이 크다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특별전형을 신설할수 있는 셈이다. 그런 대학의 설립목표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저 내 점수가 저 학생보다 높으니 넣어달라고 하는 것은 그저 억지논리에 불과한 셈이다. 대학이라는 공동체가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본래목적에 부합하는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태도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기에 '사회적 배려자 전형' 또한 그 목적에 부합하기만 하다면 수능점수 하나로 나를 합격시키라는 항의는 애초에 불가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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