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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13. 2022

[알랭바디우와 사도 바울]-부활의 사건과 새로운 주체

김성민저/바울과 현대철학 중에서 

바디우는 반플라톤주의였던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반하여 플라톤적 기조를 유지했다그는 존재,진리,주체의 사용을 긍정하고 철학이 현실의 변혁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이 현실의 불평등한 구조를 변화시키고 현실정치의 상투적인 경직성을 해체하여 역동적인 창조성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사건적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중요한데 바울이 그에게 그러한 모델로 비춰진다.


 










1.바디우의 철학과 정치적 행위


철학의 가능성 전복성


 철학의 곤경의 자리(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국가사회주의,나치의 도구로 전락했고, 근대철학의 동일성 철학은 탈근대적 비판앞에 주체와 진리가 이제는 진부한 담론이 되어버린 자리) 에서 그는 철학이 여전히 해야할 역할이 있으며, '사유불가능한 것으로 전락한 바로 그 자리'를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디우에게 철학은 인식이 아닌 행위이다. 담론의 규칙보다 행위의 단독성이 우선한다. 기존의 의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거부와 저항을 소크라테스처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들이 사회시스템에 대한 맹목적 복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모방과 찬양을 토론과 합리적인 비판으로 대체하는 것이 그것이다.


 바디우에게 철학적 행위는 결단,분리,구별의 형식안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일정한 진리의 규범성에 의해 위계적으로 분리된다. 철학이 새로운 규범적 분리를 제안하고, 모든 이론과 실척적 경험들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지적 질서를 뒤집고, 진부한 가치를 넘어서는 것.


 그런데 이러한 전회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건들의 결과는 역사적 맥락의 변화,시대적 조건 속에서 수용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자들 또한 새로운 지적창조와 새로운 진리의 출현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과 정치그리고 진리문제


정치(민주주의)와 철학은 진리의 문제를 통해 연결된다.  민주주의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정치로 넘어가는 흐름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적 보편성이 초월성의 속박, 즉 왕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고, 합리적 토론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철학의 조건이 된다. 철학은 무엇보다 '누구나를 위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의견의 자유보다 '정치적 진리의 가능성, 평등'을 문제시하듯 철학에게는 이 또한 중요하다. 토론 그 자체보다 토론을 위한 공통적이고 엄격한 규칙의 중요성 말이다.  바디우는 이를 '공리적, 형식적 조건으로서 보편적 논리'라고 하며, 이는 그의 독특한 철학의 수학적 차원을 의미한다.

결국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 원칙과의 공존 가능성


-진리의 보편성에 의견의 다양성이 종속된다는 철학적 원칙과의 공존 가능성


 이 두원칙은 평등과 보편성을 다룬다. 즉 보편적인 것으로 요구되는 평등의 규범이고, 결국 보편성이 특수성에 앞서고, 자기동일성 또는 개별성보다 중요함을 의미한다. 한편 정의란 정치영역에서의 진리의 철학적 이름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규범도, 법도, 목적도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대중의 해방을 위한 여러 가능한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 수학적인 강제들이 또한 정확하게 철학의 조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공산주의의 투사인 철학자


 바디우에게는 공산주의야말로 철학의 형식적인 조건과 민주주의적 정치의 실존을 위한 현실적 조건이 지탱되는 장소이다. 해방적 기획과 사유의 규약이 구별되지 않는 주체적 상태이며, 민주주의 또한 정치적 진리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지위를 위한 조건이 된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보편성이라는 공리에 대한 장소를 공모하는 해방의 정치다. 수학자가 법칙을 추구하면서도 그 법을 넘어서는 것을 욕망하고, 로마서의 바울이 법과 욕망의 관계를 직시한 것처럼 공산주의는 구성 불가능해 보이는 것의 집합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정상적인 욕망의 이념보다는 언제나 이름없는 것의 실존을 긍정하는 욕망의 투사적 이념을 긍정한다.


 


2. 사건과 진리그리고 주체 



보편성과 정체성


 바디우는 그의 사건과 주체 철학의 예시로 사도바울을 든다. 바디우의 저서 ‘사도바울’은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다수의 존재 가운데서 사건에 의한 주체이론을 재정립시키고자 함이다.  ‘유대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갈3장28절)’ 바울의 보편적 평등에 의한 테제는 개별성을 무시하는 보편성이 아니다. 보편적(유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모든 개별정체성이 결여된 주체에 대한 탐구가능성으로 제시된 사례가 바로 ‘부활사건’이다.  예수 부활사건에 대한 바울의 확신과 논의는 바울 이전의 정체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사울->바울) 전혀 새로운 사건의 주체로 세워지는 것이다. 진정한 보편성은 중심이 결여되어 있는데, 부활사건이 바로 근거도 없고 증명도 어렵지만, 자기자신에게는 확실한 주체적인 보편적 개별성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울의 탈중심성 차원이 중심을 결여한 진정한 보편성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의 진리는 새롭게 도래한 것이고, 사건적이다. 기존의 법으로도 공동체적 특수한 제약으로도 지배받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사건은 개별적이면서도 이 진리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어떤 귀속조건도 초월한다. 이처럼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고려한 보편적 개별성으로서의 진리가 바울을 통해 드러나는 셈이다.


 

사건 이후 주체’ 문제


바디우는 바울을 ‘반철학자’로 본다. 루소,키에르케고르, 니체 등으로 연결되는 계보의 첫 주자와도 같다. 바울에게 부활사건은 ‘다시 일어남’의 사건이다. 그는 당파 및 지역에 매이지 않고 부활이라는 탈중심적 사유의 보편화를 위해 다양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다고 그는 단순한 보편주의자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모습으로 그들과 투쟁했는데, 유대인의 율법이든, 그리스인의 지혜든 바울은 자신의 주체적 확신을 분명하게 내비친다. 


 그리고 유대담론과 그리스담론 사이에서 그리스도교담론을 제시한다. 거기에 신비주의 담론까지 더해 총 4가지 유형의 담론을 언급한다. 유대담론이 예언자의 형상이자, 신의 초월성과 기적을 강조하는 표징담론이라면 그리스담론은 지혜자 형상이며, 자연과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우주적 담론이다.  


 당시의 지배담론이 유대담론이나 그리스담론이었기에 이를 ‘아버지 담론’이라고 한다면 바울의 담론은 ‘아들담론’으로 명명한다. 아버지담론이 복종과 강요의 모습이라면 아들담론은 탈중심적이다. 그리고 자신을 새로운 유형의 담론 담지자인 사도라고 소개한다. 부활사건 안에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에게 부활은 ‘죽음과 부정성의 지배에 맞서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사건적으로 도래시키는 것’ 이다. 


부활은 ‘관계들의 변화’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증언하는 데 있다.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관계맺으며, 개별에서 보편으로, 보편에서 개별로 나아가야 한다. 사건은 ‘가능성을 규정하고 보편적 다수성’을 개방하는 것이다. 사도는 이러한 가능성(복음)을 확신하는 자이며, 선언하는 자이며, 그것에 충실한 자이다. 한편 바울담론은 신적인 권능을 말하지만 그리스도라는 죽음의 사건을 약함으로 규정한다. 약함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부활을 담는 질그릇이며, 이것은 사건적 주체가 통일성이 아닌 분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리와 주체의 분열


주체의 분열과 해방 


 바울의 주체는 사건적 주체이기에 진리에만 강제될 뿐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기각함으로써 다른 대상을 출현시킨다. 그리스도 사건은 우주적 총체성을 해체하면서 헛됨의 자리, 즉 약함을 창조한다. 유대담론과 그리스담론이 주체를 영속화하려 한다면 그리스도담론은 분열로 보편성을 정초한다. 사건은 기존의 차이를 폐지하고, 주체를 해방한다.


 부활한 아들은 모든 인류를 혈연관계로 만든다. 신의 동역자는 모두 평등하다.바울이 언급한 하나님의 동역자는 노동자의 형상이자 평등의 형상이다. 해방을 위한 진리의 절차에 참여하는 모든 이는 평등하다.  부활사건은 어떤 전통,유산, 교훈에도 예속되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것이며, 은총의 순수사건인 것이다. 


 사건의 주체는 고정된 상태의 조건이 아니라, 절차의 조건과 구조에 놓여있다. 새로운 시대의 주체는 새로운 상황에서 사건적으로 선언한다. (육체의 길을 중단하며 영의 길을 개방하고 선언한다) 이처럼 분열의 형태로 보편성을 담보한다. 


죽음의 부활의 변증법과 용기


바울은 첫째아담과 둘째아담(예수)을 주체의 분열의 짜임으로 제시한다. 첫째 아담이 죽음의 형상이라면, 둘째아담은 생명의 형상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죽음을 통한 화해와/ 부활의 사건적 작용인 ‘구원’을 구분한다.  죽음을 통한 화해가 사건이 발생하는 거점을 마련하여 사건이 개입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다. 부활은 사건 자체이나 죽음은 상황 속에서 작용하면서 사건의 거점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변증법적으로 구원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의 구원은 죽음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체는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며, 죽음은 주체의 분열적 계기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예’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 죽음과 부정성의 지배에 맞서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사건적으로 도래시키는 것을 선언하는 용기말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래서 죽음이 아닌, 부활에만 해당한다. 부활은 죽음의 힘 밖으로 갑자기 돌출하는 것이지, 죽음에 대한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총의 유물론 


율법은 죽음의 이름 중 하나이므로, 진리의 주체는 가장 먼저 율법과 싸운다. 사건은 아무 이유없음의 체계속에서 모두에게 말 건넴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은총의 유물론’이다. 은총이 넘치므로 율법의 죽음을 넘어선다. 율법과 단절할 수 있는 길은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다. 


 바울은 은총의 사건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믿음으로 본다. 사랑도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음과 사랑은 사건적 충실성이라는 말로서 진리의 법이 된다. 믿음은 참된 것에 대한 열림이요, 사랑은 그러한 여정을 보편화하는 실질성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희망은 그러한 여정 속에서의 확고부동함이라는 준칙이다. 


 믿음이 주체의 보편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는 구원의 능력이라면, 결국 투사적인 사랑에 의해서만 해방과 구원이 도래하고 사건이 출현한다. 한편 소망은 사건들을 연결하여 주체적인 사랑의 힘이 지속될 수 있도록 시련을 이겨내도록 해준다. 즉 단순히 인내한 결과의 소산이 아니라 ‘승리한 충실성에 대한 주체성’이 소망이다.


 

코뮌적 주체 


바디우의 정치적 사건이란 맑스의 생산력의 물적 구조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무로부터 집합적, 주체적 창조행위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 주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황 속에서 보편주의의 장소를 발명하는 주체, 이는 인민의 독재를 시사한다. 인민은 집합적 주체의 사건에 대한 충실한 행위를 통해 주권적 권위를 실행하고 완수해야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코뮌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건은 하나의 유일사건이 아니라 주체의 개입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지 및 갱신된다. 이는 주체의 충실성이며, 부활의 믿음에 상응한다. 그리고 여기서 구축되는 ‘보편적 진리’는 개념이나 논리가 아니고, 상황에 파열을 내며 개입하는 사건적 질서다.  


*해설강의는 유튜브 채널에서 들으실 수 있어요.

https://youtu.be/EaZ01Yw8h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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