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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15. 2022

[철학의 쓰잘데기] 키에르케고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나에게 어떤 '쓰잘데기'가 있을까??



우선 그가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라는 점! 

우리는 삶을 살다보면 한없이 자기 자신의 작음과 지워짐을 경험한다. 그저 가족 안의 나, 학교 안의 나, 국가안의 나... 등등 거대한 구성체 안에 작디작은 구성원의 일부로써 획일화되고 파편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등의 거대담론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삶을 살아가는 그 당사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실존주의가 깨우쳐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전에 ' 나는 무엇인가'의 질문이 더 중요함을 깨우쳐준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전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정작 나라는 실존이 없다면 세계,인간, 역사.....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키에르케고르 덕분에 유일한 주체이자 실존인 '나'를 보게 된다. 


두번째, '절망' 에 대한 위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 인간이 절망을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모두 절망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 절망이 나 혼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위로를 느낀다. '아 나만 이상한게 아니구나' , '나만 삶이 불안한게 아니구나' 


세번째, 절망 끝에 '도약' 인데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끝에 죽어버리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차원이 다른 도약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물론 키에르케고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다. 즉 그에게 '신앙'이 핵심이다. (만약 신의 도움없이 도약하고 싶다면 니체를 찾아가라) 

우리는 절망의 끝에서 '신 앞에 홀로' 서게 되고,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는 미친 광기의 행위에 불과하지만

'신앙의 기사'의 단계에서는 목숨을 건 도약의 행위와도 같다. 

삶이 점진적으로, 끊임없는 노력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수행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뭐 어떤가, 나는 아직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믿어지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절망의 삶 끝에서 '신 앞에서 홀로 서서' '목숨을 건 도약'을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혹은 이미 매 순간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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