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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May 30. 2020

영화<곡성>-자유의지와 결정론,
악의 죽음과 부활


(주의! 정말 성경의 교리적인 정확도를 따져본다거나, 그 성경 원문이 얼마나 정확하게 영화상에서 재현되는가를 생각하지는 마시길, 영화감독이 그저 성경을 모티브로 영화상에서 각색한 것이고, 그 부분을 또 내 나름대로 유추해서 연결해 본 것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만을 느껴보면 될 듯 합니다.)



곡성 두번째 관람을 하면서 얻게된 점은 처음본 이후로 느껴온 으스스함이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다. ^^ 영화를 다시 보면서 분석하려는 포인트를 찾고 고민하다보니 영화자체의 아우라도 사라지면서 공포감이 제로가 되었다(혹시 나처럼 겁많은 관객들은 한번 더 보고 떨쳐내시길)



여튼 더 중요한 것은 영화 전체의 흐름이 생각이상으로 기독교 모티브가 훨씬 강하다는 점이다.


이미 알려진 짜잘한 소재분석은 둘째치고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주요골격으로 들어가 있음으로써 생각 이상의 영화의 무게감을 잡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교리의 '예정론'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어울리지만 정작 기독교의 자유의지와 예정론은 어떻게든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절대자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기에 악마적 입장의 이 영화에서 '예정론'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차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듯 하여 '자유의지와 결정론'으로 표기한다) 단지 이 모든 과정이 예수의 입장이 아닌 악마의 입장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신성모독처럼 기독교인에게는 불쾌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물론 이 조차 감독의 견해라기 보다는 작품속 악마의 견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을 듯하다. 즉 신을 조롱하는 악마의 입장에서 성경의 모티브를 가져와서 자신이 성경의 예수님처럼  부활이라는 필연을 실현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 골격은
악을 숭배하면서도 본인 자체가 악인, '외지인'이 마을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고 그래서 부활해야만 하는 운명을 그려내는 스토리라고 볼 수 있는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분명 육신을 입고 태어났기 때문에 신이면서도 인간인 셈이다. 이 부분이 무신론자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개념이 된다. 인간에게 태어나서 육신과 인격을 고스란히 지닌자가 어떻게 신의 아들이냐는 거다.


이 신비를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낯설지 않은셈인데 이러한 특성이 영화 속 악마에게서 나타나니 혼란스러운 거다



따라서 무명과 외지인이 귀신이냐 아니냐갖고 논란이 있는데 이는 의미없는 논란이다. 두사람 모두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다고 보는것이 맞다. 귀신을 영으로만 생각해서 몸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에 관객들이 빠져있다보니 계속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고 혼란스러운 셈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님을 모티브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단지 무명과 외지인은 각자의 자리가 다를 뿐 둘 다 분명 귀신이면서도 육체를 갖고 있는 동시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물론 예수님을 귀신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

성경을 보라. 예수님 역시 자신의 사명을 실현해가기 위해서 자기 할일을 하되 자신을 저주하게 되는 자들의 소리를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한다거나 해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국에는 십자기에 못박혀서 죽임을 당해야만 하기 때문이고. 이 죽음이 있어야만 사흘만에 부활해서 사명을 성취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그대로 외지인에게 넣어보면 영화의 많은 모순이 풀리게 된다.일광은 그저 악마의 졸개인 셈이고 자신의 거짓굿을 통해서 오히려 악의 힘을 더 강하게 하면서도 자기 탐욕 또한 채우는 자인것이다. 영화 마지막에는 천우희의 강력함에 두려워서 도망치려다가 다시 외지인의 위협으로 되돌아와서 종구가 가족들곁에서 몰살되도록 유도하고 자기의 마지막 의식인 사진촬영을 하러가는것이다


영화에서 살해된 모든 가정에는 굿판이나 제의적 현장이 있었다. 이는 악마의 저주가 옮겨진 가족의 불안을 이용해 일광이 개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여기서 가족 모두가 악의 재물이 되도록 일광이 인도하는 셈이다.(중간에 다른 무당을 불렀던 집은 무당들까지 싸그리 죽여버린다) 문제는! 가족들의 몰살이 당장 외지인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은 외지인이 끊임없이 마을안에서 외지인인 자신을 모든 분란의 주범으로 몰리도록 스스로 유도해가고(그래서 꿈을 이용해 짐승을 먹는 자기이미지를 계속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결국 자기를 죽이도록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보면 상당히 개연성이 생긴다. 즉 자신을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 의심하고 죽이러 오도록 미끼를 던지는 셈이다



미끼를 삼켜버렸다! 는 일광의 대사가 바로 종구일행이 외지인을 벼랑으로 밀어버리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더욱 확신이 가능하다. 드디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타이밍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외지인이 종구일행에게 쫓기다가 벼랑밑에서 우는 장면을 보라. 갑자기 이 잔인한 괴물이 한없이 나약해보이는데 이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다가 할수만 있다면 이잔을 옮겨달라는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보이는 장면이다.(이 악마의 나약한 모습은 영화 후반부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외지인이 결국 무명에게 쫓기다 종구의 트럭에 치여서 죽음으로써 종구는 악의 부활을 돕는 미끼를 삼킨 셈이 되고 본인도 가족과 함께 제물이 되어 결정적으로 외지인은 뿔달린 악마로 존재변화를 이뤄내는 셈이다.



닭이 세번 울기전에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장면은 성경의 스토리의 시간순서와 다르지만 영화에서 선한 영의 역할인 무명을 끝까지 의심하고 뿌리치는 종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논란이 되고 나 역시 고심한 장면이 무명의 살풀이와 외지인의 주술장면인데


보통 외지인과 한편인 일광이 속임수를 통해 효진이를 대상으로 굿을 한거라고 보는 관점이 많다. 그리고 외지인의 치명상은 주변에 지켜보던 무명,천우희의 공격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듯하다. 그러나 한가지 찝찝함은 외지인이 치명타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근거가 모호하다. 무명(천우희)의 입장에서 왜 공격하다 말겠는가?


따라서 또다른 예측은 일광의 살풀이가 외지인을 향한 것이 맞고 그와 동시에 악령이 깃든 효진이도 일심동체처럼 함께 고통을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 같은 편인 일광이 왜 외지인에게 살풀이를 하는가? 이는 배신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일광도 종구도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자유의지대로 역할을 다하면 된다. 그래도 운명은 악마의 죽음과 부활을 성취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종구가 못참고 굿판을 중단시키는 것까지도 이미 정해져 있을수 있다. 즉 외지인 역시 이 타이밍에 죽지는 않을것이라 알았을 수 있다. (너무 억지 같은가?^^ 자유의지대로 인간이 아무리 행동을 바꿔봐도 결국 정해진 운명대로 행하게 된다는 그 얄궂음. 혹은 신비함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아니던가)



아차.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황당함은 바로 박춘배. 좀비의 등장인데 여기서 영화장르가 의심되면서 혼란스러움이 생긴다.


그런데 외지인은 이 박춘배를 살리려고 상당히 공을 들여서 준비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이는 성경의 나사로의 부활을 모방한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듯이 외지인 또한 자기의 부활을 준비하면서 박춘배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을 한것이 아닐까 싶다. 본인이 기절했다깨어나서 당황하면서 좀비를 찾아가고, 다시 뒤따라가서 살피는 장면에서 그또한 처음해보는 시도인것이 분명했다.


마치 좀비를 만들어서 자기 부하로 삼아 누구를 공격하려고 하는 유치한 설정은 아닐듯하다



결국.


종구가족이 미끼를 물었고 다른 희생자가족들은 그 준비과정. 혹은 작은 미끼에 불과했을거다


종구가족이 종구스스로 떠나라고 협박한 사흘째 새벽에 몰살당함으로써(딸은 살았지만 앞의 다른 사례들을 통해 곧 죽을것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외지인은 악을 불러오고 저주하던 존재에서 진짜 악마.혹은 악령으로 부활한 셈이다


결국 무명은 지키지 못함으로써 선한 영의 나약함을 보여주는데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결과는 결국 희생자들 스스로 불러온 자유의지를 통한 행위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한 영도 악한 영도 모두 미끼만 던질뿐이다


그 중에 우리가 어떤 미끼를 무는가에 따라 선함이 이길수도 악령이 이길수도 있는것이다


문제는 현 세상은 감독의 눈에도 분명 악령이 군림하고 선한영은 한없이 무기력하게 보였을게다. 지금 우리도 악마의 미끼를 우리의 자유의지로 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순간부터 모든 결과는 정해지고 얄궂은 운명을 치닫는 것이 아닐까?


아님 우리는 이미 선한 미끼를 물 자유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참고로 부제가 외지인의 정체를 확인하러 동굴로 찾아가는 것도 예수의 돌무덤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영화 곳곳에 살짝 유치할정도로 성경의 소재를 활용하기에 그걸 찾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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