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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01. 2020

트럼프, 조지플로이드 사건으로 본 증오의 리더쉽


 2020년 전 세계가 코로사사태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지금

미국에서는 코로나도 더 심각한 국가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5월에 일어난 조지플로이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그 동안 묵혀있던 흑인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사실 미국에서 흑인인종차별과 이로인한 백인경찰의 과잉대응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건이 발생한지 며칠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미국 내 반응이 심상치 않음은 왜일까?


즉 이번 플로이드 사건의 특별함!유일함이 무엇인가.

우선 이 사건의 모든 과정이 실시간으로 생중계 되었다는 점이다.

영상과 사진의 힘은 사실의 전달에 감성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미국내 흑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이 과잉진압의 현장을 눈으로 목도했다. 아니 살인현장을 목도한 셈이다.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계속 요청하는 플로이드를 묵살하고

계속 목을 짓이기는 그 현장의 모습, 그렇게 의식을 잃어가는 모습이

영상에 담기고

그렇게 이 영상의 힘은 파급력을 증폭시켰다.


그렇다고 이번 사건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어쩌다 유난떠는 현상이 생겼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단 한사람의 생명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는 정언명령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강력한지를 이번 사건이 모든 세계인들에게 상기시킨 특별함으로 봐야 한다.


그 동안 플로이드처럼 백인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사건들 하나하나가

이미 그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건들인 셈이다.



 플로이드 사망이후 미국 내 곳곳에 폭동이 일어나고 있고

치안상태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경찰은 안정을 찾게 만드는 매개체가 아닌

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 사태의 진짜 문제는

인종차별주의를 갖고 있는 몇몇 백인경찰이 아닌

바로 '트럼프'에 있다. (즉 단순히 이번 사건을 인격이 부족한 한 백인경찰의 문제라기보다 그들이 흑인을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증오의 관점을 부추긴 미국사회구조에 좀더 시선을 돌려봐야 한다)

그는 이 문제에 기름을 붙는 발언을 하는데 모자라서

어쩌면 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일 수 있다.


트럼프는 누구인가?

그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업가다.

오직 이윤!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대표적 상징이다.


문제는 미국 시민들은 그런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마치 한국이 자본주의의 상징인 이명박을 뽑았던 것과 다르지 않은 욕망의 구조일지 모른다.


다만 미국에는 인종차별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가

트럼프를 통해서 양산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트럼프는 시종일관 미국의 이익을 이야기 하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우리 백인'이라는 핵심이 있다.


그의 정치기반에 있어 백인보수주의자들의 지지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강한 미국,

이전 리더들처럼 세계평화 운운하는 것 보다

'우리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대통령,

속물적이고 천박해보이는 이 슬로건을

그대로 내보이며 일하는 트럼프는

분명 그만의 매력을 어필해왔고

코로나 이전까지는

재선에도 별문제가 없을 정도로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게 되었다.


철저한 '이기적 본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세일즈외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고

미국내 실업률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며

완전고용의 신화까지 쓰게 되니 지지율이 낮을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미국의 실업률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치솟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의 실업률도 심각하지만 이 정도로 치솟지는 않고 있다.

결국 그동안 미국에서 창출된 일자리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만든 신화는 거품이자 허구였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노동유연성의 원리에 따른 단기적이고 계약직에 불과한 일자리가 무수히 창출되고

코로나 위기와 함께

쉬운 고용이 가능한 미국의 경제구조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미국의 노동자들은

바로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지고

미국 정부는 이를 막기위해

더 큰 재정지출을 감행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럴바에는 애초에 안정적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

개별 노동자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즉 개별노동자들이라 했지만 민주주의의 절대다수인 시민을 위한 대책으로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도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며

국가의 리더로써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고

그 조차 공식석상에서 마스크쓰기를 실천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데

그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이라고

공공장소에서 마스크착용을 확실히 하겠는가?

결국 미국 곳곳에서는

마스크 미착용자와 이를 저지하는 업체들, 경비기관들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발생자도 놓고 사망률이 높은데도

공공장소에서 마스크없이 파티하고 즐기는 현상또한 즐비하다.


그러면서 그는 코로나 백신에 대해서도

미국중심의 이기적 발상을 늘어놓는다.


‘코로나 백신 민족주의’ 우려 고조… 프랑스 제약사 “美에 우선 공급”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8213&code=11141500


위 기사와 같이 돈을 많이 투자한 미국이 코로나 백신의 우선권을 논하는 상황도 나오고 있다.


한편,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

'문 대통령은 "'모두를 위한 자유'의 정신에 입각해 세계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세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며 △보건 취약 국가에 대한 인도적 지원 확대와 방역 경험 공유 △백신·치료제 개발을 위해 국경을 넘어 협력 △WHO 국제보건규칙 등 관련 규범 빠른 정비 등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은 올해 총 1억달러(약 1230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며 "인류의 건강을 함께 지키기 위해 WHO와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출처 조선일보'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8/2020051803564.html


 즉 미국의 트럼프와 한국의 문재인은 전혀 다른 리더쉽을 보여주고

그대로 실천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는 이기적 본성을 기반으로한 '증오의 리더쉽'이라고 볼 수 있다면

문재인대통령은 '나'만을 위한 대책이 아닌 '너'를 고려한 모두의 연대와 협력을 강조하는 '상생의 리더쉽'이라 볼 수 있다.


똑같은 코로나를 겪어도

문재인대통령은 위기상황을 감지하고

한 사람의 사망자라도 줄이기 위한 노력을 보인다.

공식석상에서 위기감을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조금이라도 발병자를 줄이기 위한 세계 최고의 검사시스템을 이끌어가는 것이다.(물론 이 리더쉽은 자칫 공허한 외침처럼 들릴 수도 있고, 백신이 개발되었을때 부족한 상황에서 어느나라, 누구에게 먼저 공급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해법을 찾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의 인기는 바로 이 모호함을 걷어차고 무조건 '나먼저'라는 슬로건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소한 미국의 시민들은 '세계는 몰라도 나는 살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들테니 말이다)


반면

트럼프는 코로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도 않았고

대응도 그래서 늦었으며

위기인지도는 모호하여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이미지를 퍼트린 장본인이 된다.

그리고 미국의 인구수를 고려한다고 해도 지금의 발병률과 사망률은 너무나 높다는 점에서

트럼프가 얼마나 미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한국의 대통령이 트럼프처럼 대응했다면 이미 탄핵국면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끊임없이 난민정책에 부정적이며, 국경선을 높이고자 하고,

내부에서도 추방을 강화하는 그의 일관성있는 백인우월주의를 기반으로한 이기성전략은

결국 미국내의 분열로도 연결된 것이다.


지금은 플로이드의 사망을 통해 흑인이 백인에 대한 약자로써 서있지만

코로나 사태중 정작 미국내 아시아계 사람들을 조롱하고 폭행한 당사자중에 흑인도 많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코로나 사태는 결국 아시아에 대한, 동양에 대한 서구우월주의라는 천박한 이분법을 다시 상기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 사실이다. 백인의 관용주의라는 가면뒤에 숨은 본심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는데 정작 거기에는 백인사회안의 흑인들이 가해자로도 등장했다는 점이 씁쓸하다)


따라서 지금 미국의 사태는 단순히 흑인인종차별사태!가 아니라

트럼프의 '증오의 리더쉽'이 뿌려놓은 씨앗들이 열매가 되어

여기저기 그 결실을 거두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내 이익을 위해 타자를 괴롭혀도 되고 무시해도 된다는 것,

내 불이익이 외부의 타자들과 우리안의 타자들 때문이라는 증오의 씨앗은

이미 코로나때부터 미국내에서 심각하게 퍼져나가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세계로 생중계된 플로이드의 사망현장은

자칫 뿌리깊은 미국내 백인우월주의문제와 흑인차별로만 볼 수 있겠으나

지금 이 저항운동을 하는 흑인들 또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자신들이 받은 증오를 결국 또다른 미국내 유색인종들에게 화풀이의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흑인저항운동을 지지하는 세계의 모든 이들도

그들의 자리에서 자신들은 내부의 타자를 만들고 배척하지 않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한켠에서는 한국과 같은 평화적 시위가 아닌

상점약탈과 치안을 무너뜨리는 흑인시위의 방법에 대해 비판이 거센 것도 사실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라 나 역시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해도 바뀌지 않는 이 뿌리깊은 문제에 대해

흑인사회 나름대로의 처절한 외침의 방법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일으킨 근본원인이 바로 미국의 국가 시스템에 있는만큼

그 법적체계를 무너뜨리고 무시하는 것도 어쩌면 이 시위의 본질적인 목적일 수 있기에

약탈과 방화가 나름의 정당성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나서서 지금의 폭동사태를 전셰게 인들의 지지를 모아

평화시위로 바꾸어내고

트럼프의 사과까지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박근혜탄핵을 위한 촛불집회 또한

모두의 힘이라고 하지만 결국 소수의 누군가는 집회를 기회해야 하고

분노한 민중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

지금 미국의 시위는 민주적 시위가 아닌 폭력을 동반한 폭동으로 확산되는 과정인데

이를 바로잡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세계 모든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흑인만의 시위가 아닌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는 증오의 시대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대할 수 있는 길은 결국 폭력이 아닌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래야 트럼프의 무릎을 꿇릴 수 있다.


트럼프는 이미 자기 선거를 위해

현 폭동을 좌파의 선동으로 치부하고

주방위군 투입을 게획하고

강력한 진압을 추진하려 한다.


'美 시위 전역 확산...트럼프 "급진좌파 테러조직 지정"

https://www.ytn.co.kr/_ln/0104_202006010811288470'



과연  이 사태는 어디로 귀결될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태는 트럼프가 뿌린 씨앗이라는 점이고

트럼프는 자기가 뿌린 증오의 씨앗이

어떻게 자신에게도 총구가 되어 돌아오는지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한국은

평화의 방법으로 민주화를 이뤄내고

자유를 수호하며 코로나사태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트럼프의 '증오의 리더쉽'이 이 사태를 해결해낼지 말이다.

세계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증오를 키우며 살아가는 미래를 택할 것인지

결국 평화를 바탕으로 증오를 없애고 연대를 통해 모든 생명 하나하나를 고려하는

이상론적인 방법을 택해야할지의 바로미터가

2020년 지금, 미국과 한국을 통해(혹은 트럼프와 문재인을 통해) 하나의 모델로써 드러나고 입증되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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