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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03. 2020

슬라보예 지젝2편- 주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오늘날 왜 코기토를 추방하려 하는가?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를 비판하고 추방하려는 현대적 사유(반계몽주의,포스트모던주의,하버마스주의,인지과학자,생태주의,페미니스트 등등) 에 반대하면서 데카르트적 주체모델을 받아들인다.

데카르트적 회의: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감각의 진실성부터 의심하는 것-> 자신의 신체가 환영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만약 그것이 기만이라면 적어도 기만하는 사유만은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개인은 상징계의 꼭두각시다'-탈구조주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중심화된 주체 혹은 개인의 토대다. 즉 개인은 삶에서 분리불가능하다.개인은 자기투명성을 갖고 있고, 완전함의 상태다. 모든 사람은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하고싶은 것을 할 자유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론은 현실에서 남자들만이 제 자신의 주인이고 여성은 정념과 감정에 지배된다는 존재로 이분화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즉 여자들은 중심화된 주체가 아닌 탈중심화된 주체인 셈이다. 이보다 더 큰 틀은 자연에 대한 지배로 드러난다. 오직 인간중심의 코기토는 자연을 도구화하며 이를 계몽의 기획이라 하였다.

 이러한 파괴적 주관주의에 맞서 탈구조주의 학자들이 객관주의라는 치료제를 생각하게 된 셈이다. 주체중심의 권위를 무너뜨린 또 다른 과학속에서 그 근거를 발견하고자 했다.  코페루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발견을 통해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밀어냈고, 다윈은 인간도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원숭이의 일종이라 보았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삶 상당 부분이 통제불가능함을 밝혀낸다. 이처럼 개인의 주관주의적 장벽을 무너뜨려 개인 역시 외부의 힘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자신이 중심이 될 수 없는 세계의 주변적 존재임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 더해 탈구조주의자들은 코기토를 거부하고, 탈중심적 주체에 대한 사고를 발전시킨다. 주체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경쟁하는 담론들이 일으키는 효과이며 발화되는 통로일 뿐인 것이다. 주체는 탈중심화되어 있고 무의식적 담론,이데올로기 담론에 속해 있다. 주체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지배이데올로기와 당대의 역사에 종속되어 있다.

탈구조주의적 주체는 언어의 기능, 대타자의 담론을 복화술로 발화하도록 운명지어진 상징적 자동인형이다. 이런 모델의 문제점은 개인의 주관세계를 너무 깊숙이 침투해 아무런 주체성도 남기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이 객관적이라면 나의 성격에 어떤 주체적 요소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그럼 나의 특수성과 개별성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이 또한 진실하지 않다.

 내가 단순히 이데올로기,언어,무의식에 조종되는 존재라면 나는 어떻게 일상, 현실의 삶에서 선택가능한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하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위의 두 주체 모델은 주체성을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완성된 주체라면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개별성의 영역을 보존하는 동시에, 우리가 거처할 장소로써 어떤 비개별성의 토대위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생산적 균형의 유지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그런 주체를 발견하기 위한 지젝의 노력을 살펴본다.

시민적 주체에 필수 불가결한 '광기'


 지젝은 데카르트적 회의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객관)에 함입된 존재에서 문화(주체)로 지탱되는 존재로 변모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지젝은 자연과 문화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를 데카르트적 회의에서 찾았다. 여기서 그는 자기로의 철회에 집중한다. 세계와 자신을 단절시킨 데카르트, 코기토만 남을때까지 모든 외부세계와의 고리를 차단한 과정에서 지젝은 발견한다. 전면적인 철회의 제스처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가는 감춰진 이행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광기의 일종이다. 세계가 그 자체로 상실, 절대적 부정성으로 경험될때 상징적 세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기인데 데카르트의 자기로의 철회는 정확히 이 극단적 상실의 경험이다.지젝에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현실적인 개인의 '나'가 아니다. 오히려  부정성의 텅빈지점인 것이다. 이는 '아무것도 아닌'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반대편, 모든 규정된 것들의 부정성이다. 지젝은 바로 여기, 텅빈 장소에 주체를 위치시킨다. 주체는 내물없는 공백이다.

 자연상태에서 문화상태로 이행할 수 있는 것도 이 공백때문이다. 사물과 재현 표상, 대상과 말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다면 그 둘은 동일화되고 주체는 사라지는 셈이다. 말은 애초에 우리가 사물을 '살해'하는 한에서만 말과 그것이 재현하는 사물 사이의 간극을 창출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간극, 자연과 존재들 사이의 간극이 주체다. 지젝의 용어로 본다면 자연과 문화상태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즉 '사라지는 매개자'라고 할 수 있다. (맑스주의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이 사라지는 매개자 개념을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중세와 근대의 이행기 사이에 프로테스탄티즘이 바로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할을 했음을 제시한다. 근대 자본주의를 파생시킨 후에 자신은 다시 자본주의에 의해 쇠락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은 마치 거푸집과 같다. )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진화의 서사로 그려서는 안된다. 코기토에서 정점에 도달한 자기로의 철회가 자연과 문화의 간극을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징적 질서라는 형식안에서 살기에 실재를 대체하기에 앞서 그 실재를 '제거'해야 하는데 지젝은 사라지는 매개자를 광기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으며, 이것이 주체인 것이다.지젝에게 광기는 제 정신, 시민적 주체의 '정상성'에 필수 불가결하다.

 철학사의 사라지는 매개자, 셸링


 주체의 계보학 면에서 지젝은 셸링을 참고하는데, 셸링은 철학사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로 기능한다. 그는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비가시적 연결고리다.이전의 관념철학이 지닌 형식 속에 이후의 맑스,니체,프로이트가 제기한 유물론적 내용을 도입한다. 셸링의 철학의 태초가 처음이 아님을 입증한다. 태초 이전에 '카오스적-정신병적 상태의 우주가 있었으니 그때 우주는 맹목적 충동의 반복과 불규칙한 맥동의 상태였다'이 충동이 현실의 궁극적 기반이고 토대라고 보았다. 어떤 것도 이 '무''심연'을 앞서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 심연의 자유는 '고삐풀린 자유'의 하나이고 어느 누구에게 속해있지 않다. 즉 어떤 주체의 술어가 되지 않는 세상인 것이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순수하고 비인격적 의지. 결국 신조차 태초보다 이전인 바로 이 처음인 무의 상태에서 자유의 일부였다. 신은 개별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비존재의 상태를 즐기는 순수한 무였다. 그런데 이 상태는 근원적으로 불만의 씨앗을 갖는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과 무를 원함은 동전의 양면으로 태초보다 이전 상태인 충동의 순환운동을 형성하는 수축과 팽창으로 볼 수 있다. 어떤 것을 원하는 의지가 긍정적, 팽창적 의지라 하다면 무를 원하는 의지를 부정적, 수축적 의지라 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의 결과는 교착상태의 반복이다. 이러한 운동속에 신은 그 자신과 그의 술어를 변별하는데 실패한다. 신이 독립성을 성취하려면 그 자신을 토대에서 해방해야 한다. 자기자신과 거리두고자 하는 이 방식이 데카르트철학의 제1원리와 닮았다.  신이 모든 한정된 내용을 파괴하고 세계로부터 철회하는 것. 그 자신에게서 세계를 축출하는 그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를 지젝은 신성한 광기의 한 형석으로 설명한다. '신 자신이 제정신을 잃은 것이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먼저 광기의 위험을 겪어야 하면 무와 신 자신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자'를 형성하는 것이 광기인 셈이다.

 결국 주체가 상실, 자기 자신의 철거, 자신의 토대와 본질 자체의 축출로써 구성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제나 자신을 회복하려고 하는 향수적인 주체다. 주체가 주체로써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주체 외부에 남아야 하고, 이는 자기 자신을 외재화시켜야 한다. 결국 주체는 대상과 대립하지 않고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주체는 자기 외부의 대상이다. 주체는 그 자신에 대해 '외밀함의 관계'를 갖는다, 외밀함은 '외재적인'과 '내밀함'을 합성한 말이다. 외재적인 내밀함,즉 외밀함은 주체의 존재 한가운데 있는 것이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셈이다. 내 안구로 모든 세계를 보지만 정작 자기 안구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이것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한데 주체 역시 바로 이와 같은 위치인 셈이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고, 오직 현실이라는 '거울' 속에서만 보이는 현실에 비판 관점이다.

주체화에 저항하라, 네 이름을 바꾸라 

주체가 외재화되는 장소는 말에 있다. 태초를 언명한 말씀.

'말을 하는 가운데 주체는 자기 존재를 외부에 수축시킨다. 주체는 외재적 기호 속에서 자기 존재의 중핵을 응고시킨다, 언어적 기호속에서 나는 내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나 자신의 바깥, 나를 대리 표상하는 기표 속에서 나의 단일성을 정립한다.'

내가 나의 외부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자기동일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생긴다. 나를 표상하는 기표도 결국 나의 대리표상이지 실재의 나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온전한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이런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남지 않고 어떤 것이 되는 길은 오직 이와 같은 상실에 의해서이다'

지젝은 충동의 폐쇄적인 순환운동에서 말의 언명으로 이행을, 간명하게 실재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실재는 언어로 새겨지기 이전의 세계이며 언어는 상징적 질서의 매체이다. 그리고 충동의 순환운동이고 실재의 상상적 경험이라고 볼 수있다.그 한없는 수축과 팽창은 거울상의 단계의 자아가 동일성과 차이의 진동 속에서 일종의 내란을 겪는 상태이다. 신은 이 거울상의 단계에서 거울 앞에 선 유아처럼 순수하게 자기지시적인 존재이다. 신에게는 자기 존재를 위한 어떠한 객관적 정박점도 없다. 모든것은 오직 주관적이다.

'이 신은 아직 창조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를 통해 타자성의 존재가 정립된 이후에야 신은 최소한의 자기일관성을 갖게 되고, 그 창조자 외부에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

결국 신이 실재와 단절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면 반드시 말씀의 선포, 상징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 육제적 존재로서의 인간도 실재의 일부지만 상징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구별된다. 인간은 자연속에 근거를 두고 있고, 또 육체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지만 단순히 육체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체를 소유하고 있고 신체와 자유롭게 관계맺음 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언어인 셈이다.

 우리 자신을 언어나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 바로 '주체화 과정'이다. 일견 탈구조주의처럼 보이지만 지젝의 주체화는 두가지 면에서 다르다. 하나, 상징적 질서,대타자는 우리보다 앞서고 우리를 통해 말을 한다. 가족의 일원, 가족의 성, 사회경제적 위치와 종교가 나보다 우선한다. 한편 상징적 질서는 불완전하며 결여로 구성되기에 결국 상징계의 요소들을 통합하고 서술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가족을 거부할수도 이름을 바꿀수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수도 있다. 상징계속의 간극은 우리가 상징계의 기능에 완전히 종속된 자동인형이 아님을 드러낸다.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의 요소들을 개별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을 지젝은 서사적 중력의 중심으로서의 '자기'라고 말한다. 자기는 주체의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서 주체는 변하지 않지만 '자기'는 끊임없이 갱신된다.


*요약본이라 이해가 어려운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셔서 유튜브 해설강의를 들으시면 됩니다.

https://youtu.be/WsPuT8MwC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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