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서구 자본주의의 확장은 분명 계급대립과 빈부격차의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장기적으로는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물론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추상적이고, 신앙적이기까지 한 그 용어에 대한 믿음은 줄어갔으나 리카르도의 자유무역주의를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를 이어가게 하는 힘으로는 충분했다.
애덤스미스
리카르도
한편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영국의 패권, 세계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며 비판하는 독일의 리스트같은 역사학파 경제학자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무역이 아닌 보호무역을 주장하며 후발 자본주의 국가를 위한 대책을 강조하며 영국식 자유무역주의를 비판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영국이나 독일의 경제학자 모두 시장경제나 자본주의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독일의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에 만족할 수가 없었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 시대의 경제적 현실
19세기에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엥겔스는 '노동자 궁핍화'론을 내세웠고, 노동자들의 착취와 고통은 현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산업혁명이 노동자의 1인당 국민소득의 증대와 실질적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왔다는 사실 또한 가려지지 않는다. 즉 모순적으로 비극도 혁신도 양면적으로 존재했던 시대다.
- 정치적 상황
당시 영국은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의 비민주적 구조는 유지되고 있었고, 이에 남자의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1830년 7월혁명으로 루이필립의 입헌군주제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 또한 금융자본가와 대부르주아의 과두제였던 만큼 1848년에 좀 더 민주적인 체제를 요구하는 '2월 혁명'이 일어나 제2 공화정이 수립되지만, 공교롭게도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은 황제로 등극해서 1870년까지 권력을 이어간다.
여하튼 이 시기에 유럽 자본주의가 전체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며, 영국,프랑스 중심으로 식민지를 포함한 세계진출을 꾀했고, 자본의 문명화 작용으로 지구의 표면을 변모시켰다. 이러한 자본주의 타도와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내걸은 반체제적 지식인 집단이 국경을 넘어 활발히 활동했는데 마르크스 이전의 생시몽, 푸리에, 오언을 살펴볼 수 있다.
2. '사상'의 문맥: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생시몽
프랑스의 생시몽은(1760-1825) 근대적 과학기술이 산업혁명과 결합하여 프랑스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분석하며, '산업사회'개념을 기축으로 하는 독자적 역사관을 제시한다. 고대그리스,로마 때부터 인류는 정치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에 의한 사람의 지배' 역사였다. 그러다 프랑스 혁명이후로 인류 사회는 자유,평등,박애의 기치아래 '사람에 의한 사물(자연)의 지배'단계로 넘어갔다고 보았다. 산업혁명이 그 증거이며, 과학.기술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사회의 이성적 관리가 부유와 평등을 불러와서 계급대립이 마침내 사라질거라 주장했다. 그리고 계급대신 과학자와 산업가라는 집단이 권력 투쟁없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공동사회를 창출할 것이라 보았다. 생시몽의 특이점은 인류 사회를 평화로 이끄는 원리로 '산업(가)'을 발견했다는 점이며 신학과 형이상학을 넘어서 과학기술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푸리에(1772-1837)의 미래 사회상은 생시몽에 비해 훨씬 '공상적'이다. 그는 빈부 격차와 인간 소외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전혀 다른 사회를 구상했다. 사회전체를 통합하는 원리는 이기심이나 이성이 아니라, 정념과 협동으로 보았고, 상공업이 아닌 농업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분업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정념들이 해방되어,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이를 즐기게 된다. 그가 만든 소규모 공동사회는 남녀의 자유연예나 동성애까지 승인하고, 일부일처제나 사유재산제는 부정하였다.
산업사회의 원리인 과학기술과 분업을 정면에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푸리에는 생시몽과 정반대였다. 마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를 떠올릴 수도 있으나, 푸리에는 단순한 농업중심사회가 아닌 문명사회의 부와 생산력을 계승하길 바랬고, 정념 인력의 원리에 의한 본능적 노동의 공동체로 재편성 하려 했다는 점에서 루소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했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매우 급진적 주장이었고, 분업 노동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점은 마르크스의 노동 소외론을 선취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생시몽과 푸리에는 공통적으로 자본주의를 뜯어 고치려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그 방법 또한 혁명적이었다.
한편 영국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은 훨씬 현실적인 사회 개혁의 처방을 내놓은 인물이다. 그는 장인의 방적공장을 활용해 새로운 원리에 기초한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실험을 한다. 그리고 '성격형성원리'를 주장하여 인간의 성격은 나고 자란 환경의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환경결정론을 도출한다. 이를 그의 사회개혁에 적용하여 '소년,소녀 노동'을 폐지하고, '성격형성학교'를 세워 미래의 노동자의 지성과 도덕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또한 성인노동자에게는 충분한 임금을 지불함으로 노동의욕자극으로 인한 생산성 향샹을 꾀했다.이는 다시 자본가의 이익증대를 가져올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면서도 경영상 활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몇번의 도전을 더해보지만 생산과 소비의 공동체를 공산주의적 조직에 의해 실현하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다만 오언은 1832년 '국민공평노동교환소'를 설립하고, 노동시간을 단위로 하는 통화 발생실험을 했으며, 1844년 '협동조합'운동을 탄생시킨다. 오늘날 협동조합 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진 자가 바로 로버트 오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