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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Mar 01. 2023

내가 MBTI를 하지 않는 이유

ˆ

 '선생님  I 죠??? 아님 E인가??'

학생들에게 종종 듣는 소리다.

내가 어떤 성향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학생들의

재미가 섞인 추측들이다.


그럼 난 모른다고 얘기한다.

어차피  MBTI 를 믿지 않고,

하지도 않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삼아라도 이런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은

비록 40년 정도밖에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너무 많은 변화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대체 나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현재의 나 역시 나를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MBTI검사도 내가 선택해야 하는 항목들의

나열일 것이다

그 때 그 때마다 나는 나의 성향을

선택해야 하는데

정말 확실하게 '나는 이거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분명 다들 이런 부분도 있고

이런 부분도 있는데

'그래도 이게 좀 더 맞지 않던가?'라는 생각으로

항목을 체크해나갈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검사를 안하는 이유는

이 항목으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재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재미로 하는 것에 뭘 그리 진지하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의 사회현상을 보면 결코 재미만의 영역이 아니다. 이미 타자를 규정하는 하나의 잣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 너는 이런 성향인데 왜 이런 선택을 해?'

라는 식의 판단 말이다.

'너의 MBTI 는 이건데 지금 너의 선택은 정반대야,

그럼 잘못된거지!' 라는 판단,


즉 나의 선택이 내가 아닌 타자의 선택이 되는 셈이다.

가뜩이나

현대 사회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아니던가?

거기에 내 성향까지 이름표를 붙여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써놓고 다니면

결국 내가 나 스스로 그 규정에 매이지 않을까?

'나는  I 성향이기에 이래서는 안돼!'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나는 그 순간 순간에도

분열적 주체로 존재하는 듯 하다.

나는 내 짧은 삶의 역사의 궤적을 봐도

성향 자체가 크게 변하고 있다.

결국 MBTI 검사는 그 때 그 때의 내 성향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어떤 통계의 수치로서

표기하고 진단하는데 유효성은 있겠으나

자칫 나를 규정하는 절대적 틀로 작용할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뭐 정말 재미로 그냥 해보는 거라면 문제될 것도 없겠으나나는 별로 그게 재미있지도 않으니괜한 곳에 에너지를 빼고 싶지도 않다.


뭐 정말 재미로 그냥 해보는 거라면 문제될 것도 없겠으나

나는 별로 그게 재미있지도 않으니

괜한 곳에 에너지를 빼고 싶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대학을 분기점으로 

내 캐릭터 자체가 극단적으로 바뀐 걸로 보일 수 있다.

고교시절까지는 엄청난 활동량이었다.

운동도, 써클도, 반모임, 동창모임도, 게다가 

내가 직접 주도해서 모이는 단체모임들도 있었던 만큼 

극히 외향적 성향이었을게다.

중학교 때는 항상 축구,농구, 교회활동,

고등학교 때는 60명이 넘는 합창부 부장으로 활동, 락밴드 드러머, 

그리고 중학교, 고교 반창회 모임주도, 등등.....


그런데 대학 이후로 책을 보는게 재미있었고 

고교 때 너무 놀아서인지 대학친구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못한 것일까?)

여튼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는 더더욱 

몇몇 있었던 친구들조차도 멀어졌다.

그냥 모든 에너지를 아내에게 쏟았다. (내 여사친들은 그래서 군대 간 남자동기 잘해줘봐야 하나 소용없다는 사실을 나 때문에 여실히 깨달았다. 미안하다....친구들아ㅠㅠ) 

그러다 가족을 꾸리게 되고

지금도 그 에너지는 가족을 위해만 쓰지, 거의 사회활동은 제로로 수렴 중이다. 

일 년에 친구들을 만나러 굳이 약속을 잡아서 

만나는 횟수는 2회 정도??? 

그냥 집에만 있고,

내 스스로 합정동 유령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러다 갑갑해서 못참겠다 싶으면

혼자서 국내여행을 다녀오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하긴,

나는 항상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을 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싶다.

즉 고3에서 20대 중반 이내의 학생들을 주로 가르치기에 

항상 수업을 통해서 젊은 에너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대리만족이 되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굳이 밖에서 사람을 안만나도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뭔가 충족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반대로 학생들은 나때문에 에너지가 빨리고 있는 것일 수도.)


가족이외에 누군가와 나가서 밥을 먹게 되는 때도 

거의 기존에 가르쳤던 학생들이 찾아왔을 때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함께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 

굳이 예전 친구들을 찾아서 안부를 먼저 묻고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변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또 돌이켜보면 

어릴적부터 나는 두가지 방식으로 놀았다.

즉 혼자서 노는 것도 정말 좋았고

친구들과 노는 것도 정말 좋았다. 

혼자서 장난감을 갖고 놀거나, 역할놀이도 혼자서 하는 것이 그렇게나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어렵거나 싫지 않았다. 항상 동네 친구들, 형들과 온갖 골목놀이를 하면서도 즐거웠다.

이처럼 두 방식 모두 좋았던 만큼 

이미 나에게는 이중적인 성향이 있었지 않았을까?

결국 내게 주어진 그 때 그 때의 상황이 

내 일정  성향을 촉발시켜서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난 그래서 지금의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지켜보는 중이다.

50대가 되면 또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나'도 '나'를 모르겠기에 

그래서 불안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기대도 된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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