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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20. 2020

호아킨 피닉스, 영화'조커'와
영화 '마스터'사이에서

 라깡과 푸코, 니체의 어귀

영화 마스터

영화 조커


조커를 봐야겠다가 아닌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영웅물을 좋아하지 않기는 하지만 다크 나이트만큼은 인상적이었던 만큼 조커라는 악당 이름의 제목은

 나름 관심을 끌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관에서 꼭 봐야겠다고 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호아킨 피닉스'


단순히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나 영화 허의 매력남 연기가 인상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학생의 추천을 받았던 전혀 존재조차 몰랐던 영화 '더 마스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김우빈 주연의 그 마스터인가 싶었다. 여하튼 전혀 다른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은 심오했고 그래서 지루했다.

하지만 지루한 영화에는 매우 인상적인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있었고

그 때문일까

분명 지루하게 봐놓고도 여운이 남았다.

영화 장면 장면 무슨 의미 일까 싶으면서도 호아킨의 전혀 다른 연기 변신이 놀라웠다.


그런데 이번 호아킨의 '조커'의 예고편을 보자마자

다시 이 영화 '마스터'가 떠올랐다.

분명 같지는 않지만 '마스터'에 나타난 그 고뇌에 찬 인간의 모습이

조커에게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호아킨의 연기는 조커에서 복제된 것일까?

아님 그 비슷한 느낌 가운데서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랬다.


결국 영화 '조커'는 배트맨의 조커가 아닌 호아킨의 조커로써 내게 의미가 있었고

그렇게 발길을 이끌었다.


조커를 보고 나오면서 '더 마스터'를 다시 안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조커와 마스터는 이란성쌍둥이 같았기 때문이다.

호아킨의 연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의 이 캐릭터는 마치 두 개의 갈림길에 마주하게 되고

하나의 갈림길은 '마스터'의 '프레디 퀄'로

하나의 갈림길은 '조커'의 '조커'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마스터]의 프레디 퀄

                                                                            [조커]의 아서 플렉
 


아서 플렉과 프래디 퀄의 절망적 상황


우선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의 절망적 상황은

'마스터'의 프레디 퀄과 그리 다르지 않다.

물론 광대라는 역설적 직업, 웃기지 않는데 웃기고자 하는 그의 비극적

희망 자체가 그 절망을 더욱 비참하게 보여주기는 한다. 정작 자신의 삶에 웃을 일이

없는데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역설은

어쩌면 자신의 불행했던 가정폭력의 상흔인 시도 때도 없이 웃는 그의 질병으로 인해 유발된 강제적 꿈이 아닐까 싶다. 즉 어릴 적 당한 폭행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닌 슬픈 일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폭행 부작용이 바로 웃음이다. 즐겁다고 느끼지 않았음에도 비어져 나오는 웃음은 그만큼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웃어대는 자신을 '잘 웃는 아서 플렉'이라고 규정한 엄마의 말은 그의 평생에 꿈꿔야 할 직업으로 호명되고 그를 맹목적으로 코미디언의 꿈에 종속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니 정작 그런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치닫게 한 장본인인 엄마를 죽일 때 했던 말이 어찌 와 닿지 않을까. '내 삶은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미디 었다'는 그 말.


한편 '마스터'의 주인공 '프레디 퀄'은 세계대전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역시 정신적 장애를 안게 되고 사회에 적응하고자 노력하지만 결코 쉽지가 않다. 사진사로 취업했으나 그의 어울리지 못하는 성향과 순간적인 폭력성은 직업을 잃게 만들고, 농장에서도 일하다가 자신이 제조한 술이 문제를 일으켜 독약을 먹였다는 의혹 가운데 

하염없이 도망치게 된다. 


 


여자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 즉 아서 플렉과 프레디 퀄 모두 여자와 관계 맺지 못한다.

물론 차이는 있다. 아서 플렉은 그 기회조차 없다. 어떤 여성도 그를 매력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의 직업인 광대, 그의 초라한 재산, 치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삶은 결코 연예를 할 수없게 만드는 삶이다. 따라서 그의 망상 속에서나 연예가 가능할 뿐 현실에서 그를 안아주는 사랑의 대상,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스터의 프래디 퀄은 더욱 독특하다. 그는 여성에게 과감하게 작업을 걸고 데이트를 하고 성관계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데이트 장면에서 애인을 놔두고 옆에서 술에 뻗어 잠들어 버린다. 해변가에서 모래로 만든 나신의 여성을 만들어 거기다 성행위하는 묘사나 해댈 뿐 

현실에서 그는 여성을 안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아마도 그가 미래를 약속한 채 남겨둔 진짜 연인 도리스에 대한 죄책 때문일 것이다)


 


담배와 술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 영화에서 담배와 술은 중요한 도구다. 아서 플렉은 항상 담배를 입에 문다. 

마치 유아기적 부재했던 엄마의 젖가슴과 사랑을 애걸하듯 그는 담배를 피워댄다.


프래디 퀄에게 술은 더 의미심장하다. 그냥 시중에 파는 술이 아닌, 그가 제조하는 술이다. 정상적? 방법을 벗어나 배 기관실에서 연료를 섞거나 화학약품 등... 즉 인간이 삶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무엇을 섞어 상당히 독한 술을 만들어내고 그는 그 독한 술에 항상 젖어있다. 생각해보니 독한 술이 아니라 정말 독인 셈이다. 자신에게 독을 주입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견뎌내기 힘든 것이다. 자신을 죽여가며 살아내야 하는 지독한 현실이다.



아빠의 부재와 엄마의 정신병


놀랍게도 두 영화 모두 가정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아서 플랙은 아빠가 애초에 부재한 셈이다. 영화 속 자신과 평생 함께 해온 엄마는 자신을 입양한 새엄마이기에 아버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셈이고, 엄마의 애인들에게 죽도록 두드려 맞던 과거만 있을 뿐이다. 뜨거운 난방기에 묶여있어 지금의 그 웃음병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현재의 엄마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제대로 된 생활조차 못하고 그저 자신이 가정부로 있던 집의 주인이었던 웨인과의 관계에서 아서 플랙을 낳았다고 망상장애에 빠져 주인의 도움만을 바라며 삶을 보낸다.


프래디 퀄 또한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는 정신병으로 병원에 있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그는 고모와 근친상간을 3번을 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을 갖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가 여성과 관계를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자기 행동에 대한 죄책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신분석의 도식을 적용해볼 여지가 있다.

프로이트
라깡

조커를 보는 내내 '아버지의 부재'가 정신분열증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와 라깡의 이론이 사로잡았었다. 즉 정신분석은 인간이 법률, 질서, 제도라는 사회문화적 인간이 되기 위에 필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은 거친다고 본다. 즉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성적 욕구는 아버지라는 제삼자의 방해를 통해 이뤄질 수 없는데 이는 내 욕구를 실현시키려다 거세될지도 모른다는 거세 불안을 경험함으로써 아버지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이는 곧 엄마와 아빠의 자녀라는 지정된 자리를 진정으로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아버지의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사회의 질서와 법, 제도 등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근친상간의 위험을 벗어나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아버지, 대타자의 역할이 부재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생물학적 아버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엄마가 아이를 혼자 키워도 아버지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제대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조커의 아서 플랙의 상황은 참담하다. 아버지는 애초에 없을뿐더러 그 역할을 대시할 엄마는 무능력하며 대행 아빠가 될만한 엄마의 애인들은 하나같이 폭력적이었다. 즉 아버지는 전적으로 부재했고 어서 플랙은 정신분열증에 걸릴 조건을 충족시키게 되는 셈이다.


이는 마스터의 프래디 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정신병, 그리고 고모와의 실제적 근친상간은 그가 이 사회에 바라는 질서와 체계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큰 장애로 다가올 법하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는 이 과정이 자칫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현병 환자는 위험하다는 무조건적인 또 다른 망상에 빠지게 할 만한 위험성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관객의 망상일 뿐이니 부디 그 망상에서는 깨어나시길, 조현병 환자분들은 조커로 인해 괜스레 또 다른 상처를 입을 듯하다.


 


두 영화의 분기점


지금까지 살펴 본 것만으로도 두 영화는 매우 닮아 있다. 주인공의 상황은 정말 똑같아 보인다. 그래서 이 과정까지의 호아킨의 연기에 있어서도 그 연기선은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진부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극강의 연기력은 이미 그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관객을 빨아들인다. 

마스터가 지루했어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연기력 때문일 게다.


여하튼 두 영화의 분기점은 결국 타자에 있다.


즉 나를 배제하고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타자가 가득한 세상이 일단 두 영화 주인공의 삶인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런데 영화 '마스터'에는 정말 마스터가 나온다. 즉 정처 없이 떠돌다 자기 배에 올라탄 프래디 퀄을 받아주는 타자, 환대하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점이 두 영화의 결정적 분기점이 된다. 반면 조커로 돌아가 보면 아서 플랙을 받아줄 타자는 어디에도 없다. 광대 연기를 같이 하는 동료들 대다수는 그를 경계하고, 심지어 총을 주어 회사에 쫓겨나게 하는 계기가 만드는 악독한 동료도 있다. 그리고 엄마는 평생 의존조차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고, 사장은 악독한 자본가 그 자체이며, 그가 존경한 로버트 드니로는 그의 연기를 조소하고 자기 쇼에 써먹을 궁리나 한다. 그나마 자신이 반했다고 생각한 옆집 여성은 그의 존재조차 제대로 관심 갖지 않으며 유일하게 자신의 아빠일 거라 생각하고 희망을 가졌던 웨인은 그를 매몰차게 대하며 주먹을 날린다. 

결국 아서 플랙은 현실의 삶에서 그가 기대거나 그를 끌어줄 누구 한 명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래디 퀄에는 거울과 같은 존재, 랭커스터 도드가 있다. 난동을 피운 프래디를 그대로 받아주고 자신의 정신치료과정에 넣어주고 식구로 받아준다. 주변에 기댈자가 한 명도 없는 아서 플랙의 삶도 비현실적이지만 반대로 이런 프래디 퀄을 받아준 마스터의 도드역시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도드는 프래디가 만든 술에 반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볼 수는 있다. 마스터에서 도드는 신흥종교의 창시자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정신치료를 하는 신비한 집단의 리더로 나온다. 

그런데 오직 그를 바라보는 그의 일가와 멤버들의 기대는 한편으로 그런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프래디는 도드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된다. 게다가 그가 만든 술, 아니 독은 반대로 도드에게도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오는 역설적 매개체 된다.


프래디를 받아준 도드는 영화상에서 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준다.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받아준다. 한편 조커에서도 아서 플랙을 상당해주는 상담가가 나온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공무원에 가깝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고 국가가 준 예산안에서만 그 일을 할 뿐 아서 플랙이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그저 자기 생계의 수단이자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다른 기관에서 갇혀있는 조커를 상담하는 역할로 이 상담가가 다시 등장할 때 이 영화가 비웃는 사회적 현실, 정상이라는 것의 민낯의 진부함과 경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조커는 이를 비웃는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며 상담실을 나오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도드와 프래디, -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여기서 마스터의 프래디 퀄과 도드의 관계를 다시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층위를 나눌 때 초자아와 이드를 구분한다. 즉 이드라는 무의식은 본능적 욕구 그 자체로써 내가 원하는 대로 발산하고자 하는 무의식이다. 위에서 언급한 아버지의 부재, 정신분열증은 바로 이러한 이드가 통제되지 않고 발산할 때 발생하는 문제의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이드를 억압하고 조율하고자 하는 질서와 억압의 무의식이 바로 초자아다. 법과 질서를 대변하여 인간의 자아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이드의 폭주를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억압이 되려 강하면 ,  즉 아버지의 엄격함과 과도함은 신경증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를 마스터에 접목해보면 도드는 바로 초자아의 역할을, 프래디는 이드 그 자체와 같다. 

영화 전체적인 흐름은 이 두 대립의 모순적 갈등 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프래디가 폭주하는 것을 도드가 막아주고, 한편 도드 역시 프래디의 이드적 성향이 자신의 억압적인 위치, 사람들의 기대에 묶여있는 갑갑한 삶 속에 욕구를 되살려 주는 도움이 된다


한편 정신분석 치료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정신분석 치료에 있어서 분석가는 먼저 환자, 즉 분석 주체의 증상에 있어서 전이의 과정을 거친다. 즉 환자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 그 대상에 있어서 고통받고 있다면, 예를 들어 프래디의 경우 아버지의 부재에 있어서 그 아버지는 다시 소환할 수 없기에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이 되고 이 결핍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분석가가 바로 아버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분석 주체에게 분석가가 자기 아버지로 전이되어 이 과정을 받아주고 분석 주체의 필요를 어느 정도 채워주거나 욕망을 좀 더 자신이나 타인이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일단 분석가에 대한 전이만으로도 환자의 증세는 어느 정도 안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 마스터에서도 도드는 프래디에게 그러한 존재로써 전이되고 프래디가 모욕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하면 프래디는 그를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야수성을 드러낸다. 그만큼 프래디는 이제 도드에게 의존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치료는 바로 분석 주체가 더 이상 분석가에게 의존하지 않게 하는 것에 있다. 언제까지 분석가가 분석 주체와 함께 할 수도 없는 데다가 언젠 간 분석가의 역할이 분석 주체에게 어떠한 감흥도 줄 수 없는 시점이 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정신분석에 있어서 분석 주체인 환자는 스스로 자기 욕망을 '발명'할 수 있어야 하고, 분석가를 떠날 보내고 '독립'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것을 피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여서 다른 의미로 재창출한다거나 자신의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는 정도로 자기 자신을 믿어가기 시작하는 것.


마스터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변화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에 있다.  마스터에서 프레디는 결국 도드를 떠나게 된다. 즉 도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방법을 찾아낸 셈이다. 광야를 오토바이로 질주할 때 도드와 정반대의 방향을 달리는 모습은 바로 프래디가 이제는 도드에 대한 의존을 끊어내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를 얻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길로 그는 그렇게 자기의 길로 질주한다. 그리고 그동안 찾아가지 못했던 도리스의 집으로 용기를 내어 찾아간다.(비록 도리스는 기다림에 지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프래디가 자신이 도피했던 현실을 마주했다는 것이고 그녀의 삶을 축복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순간부터 그는 다른 여자와도 잘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도드가 오히려 프래디에게 역전이가 된다는 점이다. 즉 분석가로서 분석 주체를 놓아주어야 하는데 프래디는 모순적으로 그를 가라고 하면서도 있고 싶으면 있으라고 한다. 즉 그의 본심은 프래디와 계속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정작 프래디가 자신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래디는 이제 도드가 필요 없다. 

물론 그를 마스터로써 사랑하지만 그가 이제는 자기 자신의 마스터가 되었기에 어떠한 초자아에도 억눌리지 않은 채 자유로이 살아갈 용기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스터'는 도드만이 아닌 셈이다. 처음에는 도드가 프래디의 마스터였으나 영화 중반이 넘어가면서 이 둘은 서로의 마스터가 되기도 하는 셈이고 결국 최종적으로 자신의 삶에 마스터가 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도드에게도 원래 마스터가 따로 있었던 점이다. 

즉 바로 그의 아내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도드의 아내는 그의 옆에 자리하면서 그를 컨트롤한다. 

즉 이 집단의 공식적 리더는 도드이지만 도드조차 그의 아내의 권력 앞에 어린아이와 같다. 

그가 이성적 영역에서 벗어나 프래디와 같은 욕망의 분출을 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아내는 남편을 자위행위시켜주며 그 욕망을 바로 풀게 해 버린다. 즉 여기서 보이는 자위는 진정한 쾌락이 아니라 생물학적 해소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화 내내 자기 남편의 욕망을 본의 아니게 일깨우는 프래디를 못마땅해하며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도 프래디를 영국까지 오라고 한 도드의 입에서 네 갈길 가라고 말하게 만든 장본인도 바로 그녀일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는 프래디인 셈이고 

마스터는 또 다른 자신의 마스터에 의해 종속된다. 

그리고 프래디 없는 마스터의 삶은 분명 향유의 상실 속에 메마른 삶의 연속이 예상된다. 

마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주객이 돼 바뀌는 형국이다.


 


아서 플랙에서 조커로-푸코와 니체의 관점에서


자, 이제 나머지 갈림길이 남았다. 바로 아서 플랙에게 주어진 길은 프래디와 다른 길이다. 

프래디가 자신의 욕망을 발명하고 자기 삶을 스스로 조절해가는 삶을 찾게 되며 타자와의 관계도 해결하게 되는 그런 결말은 여기에는 없다. 오히려 영화는 더 거시적인 시야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즉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질서와 혼란의 구분점은 대체 무엇이고, 그 구분점은 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단 한 명의 자신을 위한 타자의 환대를 받지 못한 아서 플랙의 앞길은 조커로의 각성밖에는 없었던 셈이다.


바로 이 질문을 던지는 자. 

마치 니체의 철학처럼 선악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초인과 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강자로써의 면모를 선택하는 셈이다. 

물론 오해의 소지도 있다. 

자칫 이러한 니체의 적용은 마치 히틀러가 니체를 오용해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근거로 사용하듯, 자신의 초인됨을 주장한 니체와 같은 논거와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서 플랙은 총의 방아쇠의 위력, 자신이 한 행동이 사회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대중 폭동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바로 이 '힘'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사회는 웨인을 비롯한 지식인, 기업인, 정치인을 정상으로 두고 선이라 부르고, 사회를 좌지우지할 힘이라 부른다. 거기에 니체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인데 여기서 조커는 니체의 후예처럼 보인다. 

조커는 자신을 패배자로, 악으로, 약자로 규정한 사회의 힘을 비웃으며 정반대의 힘을 보여준다. 

즉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셈이다. 

그것이 우연이든 계획이 든 간에 결국 대중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왜 우리만 약자이고 패배자여야 하는가? 꾸역꾸역 집으로 가는 길에 올라가던 그 높은 계단의 고통은 이제 신나게 춤추며 내려가는 즐거운 공간이 된다. 완전한 되바뀜이 조커의 춤과 몸짓에 드러나는데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져 보이는 장면이었으니 이 영화가 폭력을 조장할지도 모른다는 이 영화 밖 사회적 질서, 즉 대타자의 위기감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영화 내내 억눌린 아서 플랙의 신체는 조커가 되어 생기를 얻고 활력으로 팔딱거린다.


 사실 푸코였다면 이러한 영화적 결말을 원하지는 않았을게다. 광기의 역사를 통해 광인들 또한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 즉 시대의 지식권력에 따라서 재규정되는 것을 밝혀왔기에 아서 플랙의 정신병적 장애는 이 시대 권력이 규정한 틀밖으로 배제된 소수자이자 타자일 뿐이다. 푸코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이분법의 권력 작용을 비판하였다 해도 푸코가 원하는 것은 그 숨겨진 소수자, 약자, 배제된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자 함이고, 그러한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이었지 그렇다고 이를 또 다른 폭력과 약탈의 방식으로 전복시키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혹여라도 니체와 푸코를 좋아하는 분들 중 

조커의 길이 바로 이들이 제시한 길이었던가라며 충격받지는 마시길…. 설마 그러할까.



 결국 조커와 방금 부모를 잃은 부르스 웨인(배트맨)의 입장은 이제야 동등해? 진다. 이미 부모의 부재 속에서 저주받은 삶을 살아온 조커와 달리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배트맨도 부모를 동시에 잃게 됨으로써 이 둘의 악연이 부모의 부재라는 고통의 상황 속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한편 베트맨이 있다고 고담시가 평화가 찾아온 적이 없듯이 조커가 있다고 꼭 악이 창궐하는 것일까라는 이분법적 틀에 대해 영화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의 조커가 말했듯 배트맨 또한 그저 조커와 다를 바 없는 별종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그 쓰임새가 다하면 대중에 의해 버려지는 신세라면 정말 조커와 배트맨은 이란성쌍둥이와 같다. 혹은 다른 방식과 다른 배치이기는 하지만 마스터의 프래디와 도드의 관계처럼 결국 조커와 배트맨의 관계도 같지 않을까? 

조커가 이드이고 배트맨은 초자아인... 결국 같은 인격체 안에서 둘...


 한편 시위대가 광대가면의 시위를 벌일 때 진정한 광대인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서 따뜻한 극장 안에서 박장대소하는 정장 차림의 기득권층의 위선은 현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찰리 채플린이 자본주의의 착취와 노동소외를 비판한 영화 모던타임스가 상영되고 있는데 그것은 정말 코미디로만 소비될 뿐 그것을 보는 기득권 누구도 밖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이런 사회를 선이고 질서이고 바름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 조커의 각성과 폭주는 권장하고 싶은 대안은 아니겠으나 최소한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 아니 이 코미디를 그대로 놔두는 것이 과연 괜찮겠냐는 그 사회적 질문의 지엄함은 마스터와는 또 다른 결론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인가 한 사회인가.


결국 비극적 한 캐릭터의 삶을 본다면 나는 영화 마스터의 프래디와 도드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싶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각성되지 않으려면 바로 마스터의 프래디와 같은 길이 대안이 된다. 누군가는 비참의 끝에 다다른 절망자에 손을 내밀어주고 그의 억압된 소리를 들어주는 것, 단 한 번이라도 따스하게 안아주길 바랬던 아서 플랙의 절규 어린 바람처럼 설령 친아들이 아니더라도 안아줄 수 있는 또 다른 웨인이 있는 사회라면

 결국 조커는 생기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 조커는 마스터와 달리 분명 사회적 문제의식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안에 있어 권장할 만 하지야 않겠지만(영화는 영화고 판타지는 판타 지니까, 그렇다고 조커가 누군가의 조언으로 폭주를 멈추면 그것도 식상하지 않은가) 최소한 현재의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빛과 어둠을 이분화하는 현실에 대해 재발견하는 것, 프래디가 새로운 자기 욕망을 발명하듯이 

사회적으로도 새로운 욕망을 재발명하여 힘의 관계를 바꾸는 것의 필요성의 요청은

 충분히 의미 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래디와 조커 둘 다 연기한 호아킨의 연기력에만 감탄할 때가 아닐 수도 있겠다. 호아킨 또한 불행한 유년시절을 경험했기에 그 또한 또 다른 프래디와 조커로써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고통을 연기라는 방법을 통해 승화하면서 삶을 살아내고 견뎌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 모두가 그러하다. 

인생 그 어디에서 행복하다고만 생각하며 살아갈까.

 다들 고통이 있다. 

어릴 적 결핍의 사건들과 상황이 있고, 악연의 끈들이 질기게도 이어진다. 

그 상황 속에서 다들 각자의 발버둥으로 살아가는데 

오늘 이 두 영화는 그러한 발버둥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현실에서 벗어날 

어떤 동력을 더해준다. 


리버 피닉스와 호아킨 피닉스, 리버 피닉스는  영화배우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의문의 약물 과다로 요절했고 이는 호아킨 피닉스, 그리고 리버 피닉스의 절친인 키아누 리브스의 삶에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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