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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04. 2020

전쟁영화를 통해 본 서구 우월주의와 국가주의 넘어서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그들의 시선에서의 문제 인식은 영화상에 보이지 않음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중심의 이분법적 사유는 그대로 존속되는 것이다.

1. 라이언 일병 구하기

2. 아버지의 깃발

3.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구해낸 개인의 실존 


98년 개봉했던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기존의 전쟁영화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리얼리티’,

 영화 초반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투신이 20여분에 걸쳐서 쉬지 않고 벌어지는데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리얼한 병사들의 죽음이 펼쳐지는 것이다. 

기존의 전쟁영화에서는 병사들의 죽음, 즉 주연과 조연들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병사들의 죽음은 대략적으로 처리함으로써 그들의 죽음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끔찍함이 느껴지기는 힘들었었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20여 분간 계속해서 불특정 다수의 미군 병사들의 죽음을 정말 리얼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영화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라이언’이라는 일병(고작 일병, 장군도 아니고 심지어 병장도 아니고 일병이다. 이 애매한 직급의 의미)을 구하기 위해 다수의 정예 멤버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적진으로 찾아서 라이언을 찾는 줄거리이다. 

왜? 알고 보니 라이언의 같은 형제 3명이 이미 모두 전쟁통에 전사해 버린 것, 이를 알게 된 국가는 마지막 남은 아들이라도 어떻게든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휴머니즘’적인 임무를 내린 셈이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폭력성 


주체------------------대상

국가--------->/----------국민(개개인) 

기존의 전쟁영화들은 언제나 애국을 강조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군인정신을 기리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자신이 태어난 국가의 위기 앞에서 희생을 감수하고 전쟁을 치르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영화는 필연적으로 만들어지고 홍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 과하게 만들어지는 이러한 매체들의 영향과 국가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우리는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 국가가 있어서 국민이 있는 것일까, 국민이 있어서 국가가 있을 것인가, 무조건적인 우위를 정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무조건적으로 국가를 우위에 두는 것은 당연히 반대해야만 할 것이다. 공동체와 구성원의 소통을 통한 공동체주의는 사적 개인의 자유와 전체 집단의 유기적 소통을 이뤄내는 역할을 할 수 있으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바탕으로 애국을 강조하고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시작점이 되는 셈이다.


기존의 전쟁영화들이 바로 그러한 선상에 있었다. 

그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써 적군과의 전투에서 우리 편이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그 와중에 이름 없는 수많은 개별 병사의 희생은 당연시되어왔던 셈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가치가 바로 여기서 빛이 난다.

장군도 아닌, 일병을 구하기 위해 최정예 팀이 투입될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스토리, 그리고 단 한 명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미안했었는지, 노르망디 상륙전을 통해 개별 병사들의 리얼한 희생을 보여줌으로써 전쟁 자체가 얼마나 큰 공포이며, 소중한 실존적 개인들의 생명을 얼마나 쉽게 빼앗아 가는지를 보여주게 된 셈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초반 전투신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승리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과연 맞는지 의구심이 계속 들 정도로 아군의 희생이 너무나 크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저 역사 속에는 사상자 통계로만 기록되고, 결국 승리했다는 영광스러운 작전으로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 현장에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소중한 생명 한 명 한 명의 희생이 있었던 셈이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줌으로써 기존 전쟁영화의 도식을 벗어났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계나와 너

서구 우월주의의 이분법 


주체----------------------대상

미국,연합국----->/-----------독일군

,정의------->/------------,불의 


그러나 이 영화의 한계는 자명하다. 라이언 일병을 비롯,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희생된 수많은 병사들 개개인의 목소리는 살려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미군과 독일군,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은 해소하지 못한 셈이다. 

즉 아군의 실존은 영화상으로 강조되지만, 여전히 적군의 죽음은 불특정 다수의 죽음, 즉 예전 전쟁영화의 전체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에 의해서 또한 죽어갔던 독일 병사들도 똑같이 누군가의 아들이며, 형제가 아니었을까, 

그들의 시선에서의 문제 인식은 영화상에 보이지 않음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중심의 이분법적 사유는 그대로 존속되는 것이다.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결국 두 가지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전쟁이라는 파국이 가져다주는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공포가 만들어내는 개인 실존의 파괴를 다시 구원하는 것, 

그리고 국가라는 전체주의적 폭력 앞에 서구도 동양도, 나와 너도, 아군과 적군도, 선과 악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여전히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상대방의 개별 실존 또한 구해내지 못하게 된다. 


주체----------------------------주체

개인,시민----------소통-------------집단과 국가

국가(미국)-------------소통-------------국가(독일,일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내는 영화는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두 작품을 통해서 완성된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둘 다 45년의 미국과 일본의 이오지마 전투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한 감독이 왜 두 편이나 같은 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것일까? 

[아버지의 깃발]은 미군 병사들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 군인들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즉 두 편이 함께 있어야만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이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각 영화 안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나아가 직접적인 국가주의의 폐해와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아버지의 깃발]은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꽂은 성조기를 통해 벌어지는 에피소드이다. 

성조기를 정상에 꽂아 넣는 병사들의 사진 한 장이 전쟁에 지친 미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마침 전쟁수행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국가가 성조기를 꽂은 병사들을 영웅화시켜서 전쟁 채권을 팔 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작 이오지마에서 사라져 간 실제 영웅들은 망각한 채 성조기를 꽂은 병사들을 영웅화함으로써 가짜가 실제가 되어버리는 역설 속에서 전쟁 또한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각본에 불과함을 폭로하게 되는 영화인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영웅대접을 받는 병사 당사자들도 결국에는 이오지마에서 희생된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다가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결국 국가를 위해 끝까지 이용당하고 희생되는 개개인들의 실존이 그려지는 것이다.

한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미국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본국에서 강제로 차출돼 온 병사들부터 본국 지원이 끊어져 패배가 자명함을 알고도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장교들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범하게 이제 막 임신한 아내와 빵집을 운영하다가 전쟁 동원령에 의해 반강제로 차출될 수밖에 없었던 말단 병사의 사연과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군사 엘리트로 성장한 사령관이 자신이 미국과 싸워야만 하는 얄궂은 운명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런던올림픽 승마 금메달리스트조차 장교로 와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수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결코 죽을 필요가 없었고, 서로 총부리를 겨눌 필요가 없었던 인재들이 결과가 정해진 전투 속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전투 후반부에 패색이 짙어지자 포로로 생존하고 싶어 하는 병사들을 윽박질러 수류탄으로 자살을 종용하는 군국주의에 물든 일본 장교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영화가 전혀 다르게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오지마 전투 장면에서 두 영화 모두에서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결국 같은 전투 안에서 희생된 것은 국가가 아닌 양국의 병사들일뿐이며, 이 상황 속에서 적군도 아군도, 선과 악도, 정의의 편도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감독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영화들은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등을 통해서 군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국가의 태도, 미사여구로만 치장된 전쟁 참전자들의 잘못된 예우들은 그대로 국가 내부의 시스템으로 고착되어 왔다. 군인 쿠데타로 얼룩진 민주주의는 잘못된 군사 시스템의 내재화로 인해 국민 인식 자체도 개인주의의 존엄성의 우선성보다는 가족, 학교, 회사, 국가라는 집단의 우선성으로 각인시킨 셈이다.

게다가 반공주의라는 절대적 이분법은 같은 민족도 이데올로기로 분열시켜 실질적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내부적 결속만을 다지려는 정치적 이용도구로 전락시킨 셈이다. 세계화 시대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혈연 중심의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배타적인 민족성을 만들어 낸 셈이다. 

따라서 사대주의적으로 선망하는 미국 및 서구의 백인 문화를 제외하면, 같은 동양 안에서도 동남아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도 배타적으로 폄하하는 근거 없는 우월주의는 이러한 폐쇄성 속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한 개인 실존의 구원과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한 민족과 국가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메시지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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