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 안에서 위로하는 것도 자칫 어줍짢은 훈수이자,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어서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로 불렸던 C.S루이스도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암으로 잃게 되기 전에는 변증가답게 '고통의 문제'에서 왜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지에 대한 논의를 점잖케 (그럼에도 날카롭게) 논증했었다면,
자신의 반려자를 암으로 잃고 난 후 출간한 '헤아려본 슬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가족의 그 아픔의 입장에서 감정적 고통과 분노와 좌절을 그대로 쏟아낸다.
나는 이 두 책을 모두 사랑하고 아낀다. 우리에게 때로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기독교 변증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커서 이해할 수 없는 신에게 분노하고 따지고, 까무러치는 고통의 모습 또한 그 자체로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슬픔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가득할 수 밖에 없는 이 날에
C.S루이스가 절절하게 써내려간 몇 개의 문장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여 몇 문장을 올려본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 세상과 나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다.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헤아려본 슬픔19P)_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21P)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때는 그렇게 보였다.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을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22P)
나는 죽음의 상징이다. 행복한 부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둘 중 하나는 언젠가 저 사람처럼 되겠구나(28P)
"죽음은 없다"라는가,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참아 내기란 어렵다. 죽음은 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발생하는 무슨 일이건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그 일과 결과는 회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32P)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는 상투어처럼 딱한 말이 또 어디 있으랴! 살아 있다고? 결코 그녀는 살아 있을 수 없다.무엇이 남아 있는가? 시신, 기억, 그리고 어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혼령."(41P)
착한 사람들은 "H는 이제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요"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슬픔과 관련지어 볼 때에는 결국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임을 알겠다. ......"그녀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돌아오라,돌아오라"하고 울부짖는다.(45P)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4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