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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08. 2020

20세기 신학- 칼바르트 '하나님 자유로서의 초월성'


 세계1차대전은 19세기 지적사조의 몰락을 가져온다. 

진보주의의 종말과 비관주의의 흐름으로 넘어가듯이 19세기낙관주의 신학도 

칼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에 의해 무너질 조짐이 보임


-신정통주의의 등장- 기독교정통주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흐름. 


다만 계몽주의를 기정 사실로 바라본다는 점은 기존 자유주의자들과 같아 성서비평을 받아들임, (정통보수신학은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는 성경무오설을 주장하기에 성서비평을 받아들이지 않았음)

그럼에도 자연신학을 강조한데서 나온 자유주의적 문화 기독교에 대한 거부는 분명히 하였다. 자연신학은 결국 자연주의 안에서 신을 인식하는 방법이기에 결국 자연안에 내재한 하나님, 범신로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 하나님의 은혜, 개인의 결단을 중시하는 신전통주의는 공통적으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음. 진리는 주관적이며 인격적 주체가 마음을 다해 진리 안에 있고자 할때 생겨남. 

보편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상황 안에 있는 구체적 개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칼바르트


  초기의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나 자펜빌 목회를 통해

 자유주의 신학의 불필요함과 1차대전 전쟁의 정당화에 참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행태를 보고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고 19년에 그가 쓴 로마서강해는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축자영감도 역사비평도 옳다고 인정했으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축자영감의 우선을 두었다.


 - 자유주의신학이 아래로부터였다면

 바르트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보여준다.  전적 타자성, 복음, 영원 등을 강조한다. 


 -변증법적 신학-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이 아닌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변증법에 가까움.


학계에서는 로마서 강해가 나온 1919년을 19세기 신학의 종말과 20세기 신학의 출발점으로 본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관점도 하나님의 전적타자성에서 인간과의 화해와 만남에 대한 여지를 열어두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변화를 꾀하게 된다.(전적인 타자성, 절대적 타자성이라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과 화해를 설명하기 쉽지 않기에 )


중세신학자 켄터베리 안셈에 대한 연구서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통해 

기독교신학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는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로 정리하였다. 즉 신학적 해답을 찾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신앙적 삶이며, 성경에 대한 신뢰와 믿음에 있다.

 이제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저작인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인간 사이에 일종의 유비를 설정하고 계신다고 전제하였다. 이는 존재의 유비가 아닌 믿음의 유비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 인간안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신 예수 안에서 그것을 은혜로 허락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은혜로 인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기에 진리는 입증될 수 없다. 입증하려는 순간이 우상숭배의 가능성이다.

 62년 72세로 퇴직한 이후 68년 12월 자택에서 사망


신학적 방법


자연주의 신학에 대해 전적인 거부를 하였음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의 말씀외에는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인 자유와 은혜 안에서 자신을 인간 역사 안에 계시하였고 자신을 알 수 있는 기적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즉 역사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이기에 다른 어떤 곳이나 정보 지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님.


결국 신앙의 증거는 고백이자 선포에 있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진리라고 믿는 믿음은 스스로 진실성을 입증하는데 이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하나의 말씀과 성경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교신학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은 세 가지로 나뉜다.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와 계시 그 자체와 

쓰여진 성경, 

그리고 성경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설교를 의미한다.  

결국 성경 그 자체는 하나님 말씀이 아닌 셈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사건적 성격을 갖는데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진다. 즉 성경은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쪽의 비난을 받게 된다.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성경을 축자영감교리의 수준까지 격상시켰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보수주의는 성경을 바르트가 멋대로 낮춰버렸다고 ,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결코 고전적 정통주의에서 성경에 부여하는 지위만큼보다 성경의 위치를 낮게 본 것이 아니다. 그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면서도 성경의 의의를 높게 평가한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특권적 증거인 성경은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런만큼 성경의 신적 영감을 인간이 만든 가치판단이라고 평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히 경고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기적을 창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 교회는 순종과 순복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신학


바르트는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모든 교리의 시작과 중심, 그리고 결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이며 그의 생애,죽음,부활, 승천,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독특한 자기계시, 즉 인격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적 답변이라고 이해했다. 계시하는 하나님과 계시의 사건,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것의 효력 모두 하나님 자신이며, 연합이자 동일함이다. 따라서 예수는 반신,반인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이상적 인간도 아니다. 인격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육체 안에서도 능동적으로 임재하시며 진정한 인간존재와 활동의 주체이다.


 그는 성육신에 관해서도 '위격'이라는 말보다 '양태'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현대인들에게 위격은 불가피하게 '인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인격을 갖는만큼 예수를 성부와 다른 인격으로 생각하면 안되며 그것은 결코 자기계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교회의 삶내에서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구별은 되어야 하기에 바르트는 예수를 하나님의 '두번째 존재 양태'로 부른다.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 정의하고  신적 탁월성에 있어 신적사랑과 신적자유를 구분하였다.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대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하며, 균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신 자신과 인간들 사이에 교제가 있도록 그가 자유로이 선택하신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을 어떤식으로든 제한을 두지 않고 , 이 사랑의 자유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정하며 영원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 분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교제를 갖기 전에 자기 안에서 삼위일체로써 완전한 사랑과 교제가 있었다. 이러할 때 범신론을 피할 수 있으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진정 은혜로운 것이 된다(자유가 없다면 은혜도 없다)


만약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써 세상이 필요했다면 그의 사랑은 순수한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은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위해 필요한 셈이 되는데 그 즉시 하나님의 신성도 사라지는 셈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이며 이는 그의 자유 안에서 그러하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강조에도 바르트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고 일시적 기분과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충만함은 피조적 생명과의 조화를 향하여 '기울어져'있다. 그분의 자유로운 창조계획 안에는 인간과의 교제가 들어있는 것이다.




선택의 교리


예수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선택받은 자이자 배척받은 자이고,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그분안에 포함되며 그분은 대표가 된다. 즉 바르트에게는 예수가 하나님의 선택과 저주의 유일한 대상이 된다. 따라 서 이중예정에 있어서 인류를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로 나누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인 예수 안에 포함되고 그의 구원 역사의 혜택이 그들 모두에게 미치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하나님의 배척을 당하며, 또한 당연히 그가 자신을 배척하는 하나님이 된다. 결국 예정론이란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자신에게 엄청난 대가를 돌리면서 인류를 사죄시키고자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예수그리스도만 진정으로 배척받은 유일한 사람이며, 모든 인간들은 그 안에서 선민이 된다. 설령 하나님을 부정하고 불의하게 살고자해도 그들의 그러한 욕망과 노력은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인간에게 놓여진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누리는 영생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편구원론이냐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 바르트는 직접적 응답을 피했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것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편적 구원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명백한 단 한가지 실재는 은혜이며 어떠한 정죄적 심판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카톨릭 신학자 발타사르는 말했다고 한다.




평가


자유주의 신학의 후예들은 바르트가 이성을 희생키시고 종교적 권위의 보호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 신앙주의라며 비판했다.


한편 보수주의 신학자들도 신앙주의라며 비판하며 기독교변증의 여하한 가능성마저도 훼손시켜 버리기 때문에 기독교적 증거와 전도를 위협한다는 것으로 보았다.(바르트의 초역사적 접근에 대한 비판)


그럼에도 바르트 신학방법의 강점은 '계시에 대한 전적 의존'이다. 어떤 철학이나 문화, 지적유행에 의존하지 않기에 무엇보다 '신학적'인 것이다. 즉 신학적 자주성을 보존하게 된다.


그러나 가장 큰 약점도 여기서 나온다. 신학적 자주성을 강조한만큼 계시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거부함으로써 신학의 고립을 가져오는 셈이다. 신학을 다른 학문 및 인간경험에 연결시켜주는 지성적 다리역할로 두지 못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불신자들에게는 이상한 비의적 밀교로 보이게 될 뿐이다. 믿음과 경험의 연관관계는 그래서 중요하다.


두번째 문제는 그리스도일원론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을 아는 인격적 앎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된 것으로만 제한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반계시도 부인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모든 교리가 기독론화된다.  예수그리스도는 예정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이론에서 하나님의 위치는 어디인가?


물론 성부와 성령의 구분도 잊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기독론 중심의 교리는 구원사 속에서 성부와 성령, 그리고 인간의 역할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자유주의입장에서는 고등비평을 무시하고 성경을 축자영감으로 보았다는 점이 비판이라면 오히려 보수주의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구분함으로써 무오설을 부정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시각차이에는 자유주의자들은 바르트가 말하는 성경의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그가 강조한 성경의 인간적인 성경은 무시된 것이다.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성경관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가 얼마다 성경을 신학에서 절대적인 권위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게 된 때문일수도 있다.


20세기 신학에 바르트가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은 삼위일체 교리의 회복이다. 슐라이어마흐 이후 삼위일체 교리는 그저 초기 기독교가 히랍화된 결과의 유물처럼 여겨졌었다.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다시 세웠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은 의의가 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하게 자유로울 때에만 은혜로울 수 있다.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가 가지는 은혜성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이 강조점으로 정작 인간적 측면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승리의 '예'가 인간의 모든 '아니오'를 무효화시켜 버리는 셈이다. 인간결정의 심각성말이다.


 슐라이어마흐가 인간에 대해 매우 큰소리로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 오류를 범했다면

#칼바르트 는 하나님에 대해 매우 큰소리로 말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 했던 실수를 범한 것이다. ;'


*이 자료는 [스탠리그랜츠/20세기신학/ivp] 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https://youtu.be/2Arn0s3xV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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