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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09. 2020

슬라보예 지젝3편 -포스트모던의 끔찍한 탈근대성

새로운 시도가 또 다른 위험 낳는 '탈근대적 위험사회' 


 지젝의 탈근대적 분석은 영국의 앤서니기든스와 독일의 울리히 벡이 주장한 '위험사회'이론에서 출발한다.

위험이란 단어가 지시하는바는 지구온난화,유전자변형 등의 문제, 또 이로인한 화학적으로 내성을 갖춘 곤충의  증가 등, 확률은 낮지만 심각한 위험들이다.

이러한 위험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제조된 위험'이라는 점이다. 이는 인간들이 자연세계에 개입함으로써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런 개입은 너무나 커서 더 이상 자연 스스로 치유하고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이러한 위험 확률을 낮추기 위해 인간은 또 다시 과학기술의 개입을 늘리게 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위험을 만들어낸다. 이를 '자기재귀적인' 올가미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지젝은 탈근대성을 이해하는 열쇠가 이러한 '재귀성'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이 짠 거미줄에 잡혀있다.

'새로운 불투명성과 불가해성은 우리가 어떤 초월적인 힘에 조종되는 꼭두각시라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아무도 책임이 없으며, 그런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타자의 타자'가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지금 완벽하게 인간중심적인 주관적인 세계, 오직 우리 자신에게만 물어볼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자연세계,전통,관습의 해체의 세계.


대타자의 붕괴, 허구적 질서의 붕괴 


 재귀성의 보편화가 지닌 핵심적인 측면은 대타자의 최종적인 붕괴, 사회제도,관습,법등의 붕괴이다.  라캉은 오늘날 신이 죽은 게 아니라 언제나 죽어 있었는데 다만 신 자신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대타자는 애초부터 물질적 존재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언제나 죽어 있었고, 지금까지 대타자는 순전히 상징적,허구적인 질서였다고 지젝은 말한다. 정작 우리는 모두 실재 너머의 상징적 세계를 위해 날 것의 실재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최소한의 이상화에 참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도 부인어법을 통해 지젝은 분석을 하는데 (~아닌 것처럼) 판사 앞에 섰을때 그가 무식한 노인이 아닌것처럼, 벌거벗은 왕의 모습을 보고도 충실한 신민으로 남기위해 벌거벗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대타자는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사기다. 우리는 모두가 안다. 왕이 벌거벗었음을(실재계), 그럼에도 새 옷을 입고 있다는 기만에 동의한다(상징계). 지젝은 '대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왕이 옷을 입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대타자의 말, 상징계를 벗어나면서 위선을 벗어 던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지젝이 보기에 이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자체가 해체되는 의도한 것 이상의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본다. 상징적 효력의 치명적 손상.

 상징적 효력이란 어떤 사실이 진실이 되려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며, 그 사실이 상대방, 대타자에게도 알려졌음을 당사자가 알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미친 사람이 치료가 끝나고 퇴원했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닭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다고 의사에게 하소연 한다. 그러자 의사는 화를 내며 당신은 인간이라고 소리치는데 환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알아요. 그런데 그 닭도 내가 인간인 것을 알까요?' 

결국 세계육상연맹이 입증해주기 전까지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육상선수가 아닌 것이며,  시가 출판되기 전까지 나는 시인이 아니다. 면허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무면허 운전자일 뿐이다. 상징적 제도라는 대타자에 의해 등록되기 전까지 그 사실은 나에게나 다른 관계자들에게 모두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탈중심화된 인격을 지닌 주체들에게 동일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대타자'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회,경제적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상징적 효력을 공표하는 대타자에 의해 등록된 자기,혹은 자기들 뿐이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상징적 허구, 즉 자신의 고유한 구조와는 아무 상관없는 우연한 이유들 때문에 수행적 힘을 발휘하는 상징적 허구의 차원이다.'

 대타자와 맺는 관계의 양상이 바뀌는 순간 동일한 사람의 지위가 바뀐다. 의료행위를 평생해왔던 의사가 무면허로 밝혀졌을때,그 이전과 이후의 비교. 


탈근대적 초자아의 귀환, 섹스 강권하는 사회 


 지젝에게 정신분석의 기능은 상징적 효력의 소멸을 한탄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정신분석이 이러한 소멸의효과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가져다 준다고 보았는데, 가장 분명한 것은 대타자의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자연,전통의 주체가 아닌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관습적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결과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의 문제만 남는다.

그러나 관습적 차별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인가? 지젝도 일단 좋다는 쪽에 동의는 하겠으나 문제는 우리가 결별한 것이 전통과 관습만이 아닌 모든 종류의 행위양식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면 ? 오늘날 증가하는 재귀화와 그로인한 상징적 효력의 붕괴 역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그 문제중 하나가 점점 강화되는 '복종에 대한 집착'이다.  대타자에서 벗어나면 공식적인 권위의 상실을 벌충하기 위해 '사적인 법'이나 지배종속 관계에 호소하기 쉽다. 지젝은 가학-피학적인 성애의 증가를 든다. 주인이나 지배자의 자발적인 피지배자 또는 노예가 됨으로써 리비도적 만족을 얻는다. 가학-피학적 성애의 증가는 오늘날 성취한 공적인 평등이, 가혹한 개인적 지배관계로 은밀히 전복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욕망은 그 자체로 불만족을 나타내기에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라캉의 상식,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단지 종식될뿐 결코 충족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히스테리 환자에게 이 욕망의 실현불가능성은 도리어 실현되지 않고자 하는 욕망으로 재귀적으로 전환된다. 또한 강박신경증자는 욕망의 규제를 규제에 대한 욕망으로 전도시킨다. 지젝에 따르면 이 모든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사회 이론가들이 간과해온 주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재귀성이다. 이론가들은 탈근대적 주체의 재귀적 자유를 찬미하게 바빴을 뿐이다. 소위 관용적인 서구 사회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향락의 이미지와 쾌락에 대한 몰두를 보면 이젠 더 이상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성적 희열은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고 이제는 섹스를 즐기라고 강요받는다. '즐겨라'는 이 명령은 초자아의 귀환을 표시한다.

 흔히 초자아를 내면의 금지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지젝은 라캉을 좇아 초자아는 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초자아는 법이 억압하는 것을 자양분으로 삼는 법의 이면이다. 법이 향락의 포기로서 우리가 할수 없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면, 초자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즐기라고 명령한다. 즉 초자아는 허가된 향락, 향락에 대한 자유가 향락에 대한 의무로 전도되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향락이 강제적이 될 때 그것은 더이상 즐겁지 않다. 향락은 직접적 자발적 상태가 아니라 초자아적 명령에 의해 지탱된다. 즐겨라라는 명령이 어떻게 그 명령 자체의 효과를 무효화시키는지, 그 명령의 수신인으로 하여금 향락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끔, 무관심하게끔 하는지를 초자아의 '즐겨라'가 보여준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이 성행위에 대해 점점 더 흥미를 읽어가고 있다는 여론조사.

 비아그라 또한 초자아의 화공학적 형식으로 드러난것이다. 남자들의 심리적인 문제를 우회하여 그들이 원할때 언제든 발기할 수 있게 해준다. '너는 섹스를 즐겨야 한다.이제 더 이상 하지 않을 변명거리가 없다. 그래도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결함이다'

 결국 초자아의 '즐겨라'는 명령이 향락에 대한 법의 직접적 금지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향락에 대한 접근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허풍]이라는 코미디에서 딸의 어머니는 지극히 자유로워서 마약,섹스, 술, 돈낭비 등을 딸과 함께 공유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성이 오히려 딸을 공포에 몰어넣어 관습적으로 하던 위반행위들을 못하게 만든다.딸은 지극히 보수적인 생활태도를 갖게 되어 오히려 얌전한 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머니에 대한 위반을 하는 행동인 것이다. 딸의 피학적 위치, 어머니의 초자아적 명령 아래에서 딸에게 남겨진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고통의 강도에 개입하는 것 뿐이다. 


 탈근대성의 역설, 혹은  타자의 귀환, 규제에 대한 욕망 


탈근대성의 역설은 대타자의 붕괴로 생겨난 자유가 실제로는 어떤 부담으로 다가와 규제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우리의 지적 창조성은 어떤 강제된 개념 틀의 제약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제약 틀의 결여는 필연적으로 참을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그런 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모든 경험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심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

 제약 틀의 대표적인 예가 언어이다. 문법과 통사규칙을 숙달한 후에야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사전을 펼쳐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때 언어 속에서 자유롭게 사고 할 수 있다. 탈근대의 자유는 문법적 틀이 없는 언어활동의 자유와 유사하다.  아무런 해석 규칙이나 규범도 없는, 대타자의 붕괴가 이를 보상하고자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 것이다. (과학기술의 성과에서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또다른 전문가 위원회의 난립의 경향성이 생기는데 사이버스페이스, 유전자 생물학, 의학 등에 관한 규제 원칙을 창안한다. 윤리적 난제의 해명책임을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체들은 자기 몫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털어버린다)

 대타자의 붕괴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은 진짜 실재 속에 존재하는 대타자를 구성하는 것이다. 실재 속의 타자, 타자의 타자에 대한 믿음, 배후에서 사회를 조종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존재는 편집증의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기구를 은밀히 통제하는 비밀조직에 대한 믿음처럼 대타자의 붕괴는 이러한 편집증적 징후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이를 병 자체로 오인하지 말라는 프로이트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편집증적 형성물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실재적 병,세계의 종말, 상징적 우주의 붕괴에서 우리 자신을 구해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탈근대적 주체란, 공식적인 제도에 노골적인 냉소를 드러내는 동시에 모든 것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타자나 음모의 존재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지젝은 정의한다. '냉소와 믿음' 외관상 모순된 대립항은 대타자의 붕괴와 상관이 있다. 대타자의 소멸->상실감->참을 수 없는 자유를 회피하기 위한 타자의 타자의 구성, 반대로 타자의 타자를 믿는다면 우리는 대타자를 진지하게 취할 필요가 없다.  즉 냉소와 믿음은 동등한 무게로 드러난다.

 탈근대적 주체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문신,피어싱,신체훼손 등 지젝이 신체절단이라 부르는 행위다. 이런 절단 역시 상징계에서 실재계로의 이동을 보여주는 징표다. 지젝이 생각한 신체절단의 역사

 이교도 문화에서 신체 절단이나 각인은 그 사람이 해당문화의 사회적,상징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그 문화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 유대사회에서는 할례 때 딱 한번 하는데 이교도 문화의 절단과 동일하게 기능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금지를 표시하는 예외적 가치를 갖는다. 예수 이후에는 이 조차 내면화된다.

 신체절단이 실재(육체)에서 상징계(사회구성)로의 이동을 나타낸다면 이교도적 다수의 신체절단으로의 탈근대적 회귀는 상징계에서 실재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사회적 표식보다는 '살의 반항' 개인들이 자신의 개별성을 드러내고 대타자에 대한 종속에 맞서는 수단을 나타낸다. 


행위, 주체의 재탄생 


상징적 효력의 소멸은 탈근대적 주체로 하여금 절망적으로 실재 속에 있는 타자의 타자를 찾게 만든다. '상징적 효력이 중지될 때 상상계는 실재계로 전락한다' 라깡.

 지금까지 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우리 자신 속에서 찾으라.라는 말. 그러나 지젝은 이를 라캉 용어로, 대타자가 타자로 축소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타자란 그 자체로는 그/그녀의 주체가 못되는 상상적 사본, 사실상 그/그녀를 향한 메시지로 자기충족적인 자아의 측면이다. 이런 영적지혜는 자기 충족적인 소비자에게 던져진 대타자.타자 메시지 속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상품화된 사회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일한 방법은 '행위를 통한 해소'다. 행위는 주체의 재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상징적 질서, 주체에게 부여된 상징적 위임 내지 역할의 완전한 거부를 포함한다.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문자 그대로 사라진다.

 '행위는 능동적인 개입과 달리 그 행위자를 극단적으로 변형시킨다. 행위는 내가 '달성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행위 이후에 나는 문자 그대로 '이전과 같지 않다'  주체는 행위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겪는다'고 말할수 있다. 행위속에서 주체는 사라지고 그런 뒤 다시 태어난다.'

 행위는 회귀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까지 걸고서 세계로부터 제 자신을 철회시키는 광기의 행위이다.  행위는 자기 자신을 가격하는 방법, 즉 상징적 자살의 한 형식이다. 라이벌 조직의 인질로 잡힌 가족을 발견한 주인공이 항복하는 대신 오히려 가족을 쏴 죽이는 미친 행위를 통해 라이벌 조직을 쓸어버릴 수 있었던 영화의 사례처럼, 이 행위는 자기 자신을 향한 무력한 공격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을 발견하는 상황 좌표의 변화를 의미한다. 딸을 노예로 만들지않기 위해 차라리 죽여버리는 어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상징적 질서 속에서 딸의 존엄성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상징계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살해하는 행위 인 것이다. (차라리 키에르케고르가 주목했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어떠한가)

 행위와 관련하여 가장 탁원할 사례로 기독교의 십자가 고난을 들 수 있다. 신은 새로운 주체, 성령이 출현하는 신기원을 얻기 위해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희생시킨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극단적인 점은 우리가 모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거듭남) 단순히 자기 잠재성을 재발견하고 실현하라고 요구하는 뉴에이지, 영지주의 지혜와는 달리 기독교는 우리가 새로운 자기를 창조, 창안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재창조의 가능성을 여는 부정,행위의 측면에 지젝은 주목한다. 지젝이 탈근대에서 심각하게 결여됐다고 보는 정치적 참여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 탈근대적 정치담론은 자유주의-자본주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 왜 우리는 그 지평 내의 작은 부분들, 의료서비스, 공공부조를 어떻게 배분할지와 같이 , 세금의 비중은 어떻게 할지에 관해서만 고민하고 '자본주의 자체'는 문제삼지 않는가? 자본주의는 이런 논의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틀이 되어주기에 강력하다.

 지젝은 탈근대적 주체의 곤경을 해결하려면 탈근대의 가능 조건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곤경들이 갖는 지평, 상징계를 바꾸는 것. 그런 정치적 행위는 곧 혁명을 의미한다. 물론 혁명 이후 어떤 세상이 올지는 모른다. 여기서 지젝의 모호함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좀 더 나은 세계, 자신의 향락에 점령당하고 오직 노예 상태 속에서만 쾌락을 발견하는 편집증적 나르시스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열리리라는 희망속에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를 거부하자는 것이다.            


*이번 회차 요약을 해설강의 유튜브링크입니다.

https://youtu.be/VIlt37Bh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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