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병은 오랜 전에 시작되었다]-2015년 11월 13일 파리 테러에 대한 알랭 바디우의 강의
이 참사로 인해 우리가 겪게 될 정신적 외상과 정동의 절대적인 압도가 안겨줄 위험요인들
1, 국가로 하여금 무의미한 규제들을 취하게 하는 것을 용인하게 될 것임. 마치 국민통합의 보증인 역할을 하려고 자임할 것임. 정치지도자들은 이러한 테러현상을 분명히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정체성의 충동이 강화된다.가족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가족이 결집하는 것처럼 이러한 테러로 인해 삼색기,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등 정체성을 강화되는 우려의 측면이 있다. 무서운 대량학살은 전 세계적인 문제이지, 국지적인 지역 정체성의 범주로 가둬서는 안된다.
-정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적 정동의 공간을 넓히고 정체성의 축소에 항거하는 것임. 정체성으로 결집되면 결국 피의 복수를 양산할 뿐임.
프랑스의 테러에 대한 오바바의 성명도 결코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님, 왜냐하면 다른 테러피해국의 사례에서는 정작 어떤 성명도 발표하지 않는다.이럴 경우 서구라는 문명과 그밖의 비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왜곡의 인식이 강화될 뿐이다. 서구인 한 명의 생명과 아시아,중동,동유럽 등지의 희생자 한 명의 생명의 가치는 같아야만 한다.
3. 살인자들의 의도한 바대로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것. 테러에 흥분하고 복수를 당연시 하게 되어 이성이 사라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 그리고 국가 및 공식적 복수자들의 어떠한 행위도 용인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결국 똑같은 폭력적 주체로써의 대칭을 이루게 되는 것일 뿐이라는 점.
이러한 세가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사유’해야만 한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도 ‘사유불가능함’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며 포기하지 말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사유를 멈춰서는 안된다. 비이성적,범죄적,병리적 행위의 이면에도 해석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야만 한다.
1.글로벌 자본주의의 승리
-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장은 곧 자본에 대한 규제의 약화를 의미하여, 탈국유화와 사유화 현상이 대표적이다. 노동법, 사회보장제도, 교육제도등의 입법영역의 붕괴, 자본주의의 객관적 리는 주관적 승리를 가져오는 데, 즉 자본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점. 자본에 대항했던 공산주의의 가능성의 말살.
2.국가의 약화
-국가는 국지적인 관리인에 불과하다. 자본의 대리인이자 대기업의 존재보다 미약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3.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의 강압적 행동양식(새로운 제국적 행태)
-국가를 해체시켜서 새로운 제국적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약하게나마 국가를 형성시키면 기업의 이익과 거래를 확장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서구기업의 입장을 중심으로 세계는 거대한 제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 리비아 사태등 서구가 개입해서 국가를 해체한 후 제대로 안정화가 된 적이 없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불평등의 심화가 국가의 약화와 맞물리며 인구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인구의 1퍼센트가 세계 전체부의 46퍼센트를 차치하고, 세계인구의 10퍼센트가 부의 86퍼센트를 차지하는 현실. 세계 인구의 50퍼센트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결국 새로운 과두정, 계급사회의 도래다. 세계인구의 40퍼센트는 중산층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세계 부의 14퍼센트를 나눠갖는 현실이며, 이들의 주된 목적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빈곤층으로의 전락을 막는 것에 혈안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이 인종차별주의나 외국인 혐오, 빈곤층 경멸에 노출되기 쉬운 것이다. 결국 ‘우리의 가치를 수호하자’는 민족 정체성적 발언들은 결국 14퍼센트를 나눠갖는 40퍼센트의 중산층의 비참에 호소하는 셈이고, 이 전략은 먹혀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50퍼센트의 빈곤층에 해당되지 않는 ‘무’의 존재 20억명이 있다. 이들이 ‘무’로 판명되는 기준은 바로 자본에 의해서이다. 세계의 구조적 발전의 관점에서 무이며,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압박속에 있는 셈이다.그들은 노동자도 소비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과두정의 소수 일원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에게는 두가지 역할만이 주어진다. 노동과 소비. 이러한 역할에서 벗어난 20억명의 난민은 부정되어야 하고 막아야할 존재로써 선전되어 진다.
정작 이러한 20억명의 ‘무’의 존재를 양산한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자본가의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전략에서 노동시간을 축소시키면서 까지 일자리를 제공할 필요가 없기에,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존재들인 셈이다. 그리고 방치된 그들은 결국 파시즘적 갱단 및 권력에 의해서 착쥐당하게 된다.
무장세력의 본질은 무엇보다 파괴된 자본주의의 땅을 차지하여 돈벌이가 될 갱단을 구축하고 , 반항적 청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종교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종교는 마피아적 행태와 결합되어 또다른 폭력을 만들어 낸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구호는 그저 파시즘적 권력집단을 가리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적 상황이 나은 전형적 주체성은 세가지로 분류 가능하다.
첫째 서구의 주체성, 둘째 서구의 욕망의 주체성, 셋째 허무주의적 주체성이다.
첫 번째 서구적 주체성은 중산층의 주체성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적 교만(서구제국주의 역사)에 의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기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항구적인 공포가 있다. 바로 빈곤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그들은 어떻게든 빈곤층과 선을 긋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만족과 공포라는 변증법적 관계를 이용하여 오늘날의 민주정부는 이러한 시스템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즉 중산층들은 그 공포의 원인을 정부가 아닌 이들에 대항하는 이주노동자, 그들의 자녀, 망명자, 게토의 주민, 무슬림에게 돌리는 것이다.
두 번째 서구적 욕망의 주체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과 과두정에 속하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된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계층은 대중매체의 선전에 의해서 현실에 대한 실망과 함께 질투와 반항의 고전적 혼합이 나타나게 되다. 분명 중산층의 행동과 소비를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이룰 수단이 없는 현실속에서 난민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절망의 땅을 벗어나 선망하는 서구의 땅으로 넘어가는 것. 만약 넘어갈 수 없는 현실이라면 자신의 지역에서 서구적인 삶을 표방하면서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유형도 있다.
마지막 허무주의적 주체성은 복수과 파괴의 욕망이다. 떠나고 싶은 욕망과 소외된 모방의 결합이다. 자신의 삶이 무로 산정된 자들의 허무주의인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서구적 욕망과 대치되는 듯 하지만 본질에는 그 욕망이 숨겨져 있다.
결국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과 복수와 파괴의 허무주의적 주체성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한 쌍이 서구적 지배가 키워놓은 매혹의 둘레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대안이 전무한 상태에서 현대적인 파시즘이 움트게 된다.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되고 촉발된 대중적 주체성을 ‘파시즘’으로 부를 수 있다. 세계화는 자본주의 확장인 동시에 유휴 노동력 전체를 가치화 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무능력 또한 보여준다. 파시즘은 반동적 주체성으로써 자본주의의 이행불능을 비판한다. 즉 서구적 욕망에 실망한 자는 스스로 파시스트가 되어 서구의 적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의 대상이기도 한 서구를 가질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허무주의적이면서 폭력적인 충동이 조직화 된다.이러한 현대적 파시즘은 죽음충동이며, 종교는 이 충동을 표현하기 위한 완벽한 요소로 작용한다. 제국적 지역화로 인해 국가가 파괴된 곳의 이슬람이 특히 파시즘적 성향이 강하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는 본질이 아니며, 서구적 욕망의 만연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들이 보이는 폭력과 약탈적 행위 이외에 세계시장 안에서의 편입 또한 중요한 성향이다. 그들은 여전히 서구의 현실과 직결되어 실질적으로 다양한 무역을 행하고 있다. 즉 파시즘은 좌절된 서구적 욕망의 이면이며, 마피아 조직의 유연성을 모델로 한 군사조직이며, 형식상의 종교를 빌린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시스트적 주체성이 젊은이들에게 유혹거리를 던지는 셈이며, 테러 당사자들 또한 프랑스의 젊은이들로써 이들에게는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배재된 자들이었다. 그러한 소외속에서 파시즘적 주체는 그들에게 범죄적인 영웅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죽음의 영웅적 제안과 동시에 이들에게는 자본의 단맛도 선사된다. 즉 서구적 부패가 혼재된 파시즘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가해자들의 출신, 정신과 종교적 뿌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들의 욕구불만이 만들어낸 선택인 것이다. 즉 이슬람의 파시즘화가 아닌 파시즘의 이슬람화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11월 사건의 살인자들은?? 오늘날의 살인자들은 좌절된 서구적 욕망의 전형적 산물이며, 억압된 욕망으로 이루어진 자들이다. 그들의 행위는 테러가 아닌 맹목적 대량 학살에 불과하다. (바디우는 테러 11월 사건을 테러가 아닌 학살로 명명한다) 이러한 대략학살의 바탕은 허무주의일 뿐이다. 터무니없고 인공적이고, 범죄적인 영웅주의에 자신을 불사른 것에 불과하다. 이 현상 안에서 야만과 문명의 대립은 무의미하다. 서구도 문명이 아니다.서구는 최근 개발한 드론을 통해서 인명을 살상하는데, 실재 표적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주변의 9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서구는 자행하고 있는데 이 또한 야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및 이라크 분쟁지역에서 서구의 희생은 최소화하면서 그들의 희생은 극대화하는 것을 용인하고 수백명의 아동이 폭격에 희생되는 것을 용인하는 현재의 서구도 결국 살인자들이다. 전쟁은 전쟁일 뿐이고 비열한 대량학살일 뿐이다. 그렇다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는 서구 정부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결국 또다른 학살을 계속해서 불러올 뿐이다.
프랑스 정부가 삼색기라는 낡은 민족주의를 동원하여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일단 ‘프랑스’라는 단어 자체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는 하나의 기표에 불과하다.원래 프랑스적 가치라 하면 혁명의 전통이 그것이다. 1789 대혁명으로 시작된 공화주의 혁명부터 사회주의 혁명, 공산주의 혁명이 있었고, 좌파혁명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끝이 난 상황이다. 오히려 이제는 빈곤층 일부와 관련된 노골적인 차별법안으로 그 이미지를 드러낸다. 히잡 금지법안처럼...낙인과 분리의 이분법적 법안은 결국 비곤한 인구를 겨냥한 폭력인 셈이다. 프랑스의 자본주의가 빈곤을 만들어 놓고, 그들을 배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에 제3세계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1950년 대 이후 프랑스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민을 권장해서 프랑스 경제를 살려놓고, 이제 와서 그들을 다시 내쫗기 시작한 것이다. 혁명의 전통에 담긴 보편적 의미가 상실된 오늘날의 프랑스는 그저 폭력적 정체성을 새로이 강조하는 셈이다. 타자를 박해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역설인 셈이다. 결국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야만인들’이 아닌, 기업을 뒤쫗고, 미국인을 뒤쫗고, 비열한 제국 사업에 관여하는 프랑스 정부 자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프랑스’와 허구적 프랑스인으로 정의된 공간을 정신적, 실질적으로 국제적인 공간으로 대체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 초국가적 사유 방식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 자체, 작금의 국가에 관심을 끊어야 한다. 더 이상 투표하지 말 것 (?) 통치자들의 거짓되고 허황된 선언에 관심도 주지 말자는 것이다. 인민의 의지가 실재하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
욕구불만의 파시스트적이고 범죄적인 운명과, 자본주의와 그 대중적 지지인 중산층의 세계적 발전 사이에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관계가 있다.그러나 이 모순도 결국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한 주체적 모순이다. 따라서 이 관계를 선과 악이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이는 서구의 무능일 뿐이며 세계의 젊은이들 모두가 살 수 있는 주체적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한 자본주의의 무능일 뿐이다.
그럼에도 모든 폭력은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파시즘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리인이 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세계적 차원의 정치가 필요하다. 세계적 정치의 부재가 파시즘,강도질, 종교적 환각의 가능성을 만들었다. 어찌보면 이 모든 고통의 시작은 공산주의의 역사의 실패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즉 자본주의의 패권적 구조와 분리된 전략적 사유에 주어진 역사적 이름으로써의 ‘공산주의’ 말이다. 오늘날 우리를 도울 표상으로써 가장 황폐화된 지역에서 온 유목 프롤레타리아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전 세계화 되어 있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다양한 유목 노동자들 말이다. 또한 지식인, 중산층 출신들이 있다. 이 두 주체가 관계를 맺고, 의견을 구하며, 대화를 해야 한다. 정치의 새로운 사유란 이처럼 전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평등한 관계의 동맹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세가지 유형의 주체 어디에도 안주할 생각이 없다. 서구의 찬가를 부르고 싶지도 않으며, 그런 욕망에 좌지우지되지도 않으며, 죽음의 허무주의에 빠질 생각 또한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 번째의 전형적 주체성이 요청된다. 서구적 욕망의 죽음의 화신인 허무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를 넘어서려는 주체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위해 특별한 동맹과 다른 차원의 사유가 필요하다. 국지적으로 다양한 젊은이들의 경험이 필요하며 점차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해 가며 동맹해야 한다. 무엇보다 유목프롤레타리아를 향해 행동해야 하며 그 길을 만들고 실천적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