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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22. 2020

영화 [매트릭스]

[매트릭스]를 통해 본 현실과 가상, 인간과 기계의 대립



*두 개의 줄기

현실에서 인간을 죽이기 위해 찾아다니는 센티넬

1) 인간과 기계의 대립-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 에너지원을 얻기 위해 인간을 숙주로 삼아서 배터리? 로 사용하는 암흑의 세계,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지하세계의 깨어난 인간들, 

네오를 찾아온 모피어스 일당은 바로 이 저항군 내의 정예팀으로서 현실적으로 가망 없는 기계와의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구원해줄 메시아인 '네오' 를 찾아온다.


가상현실에서 가상의 신체로 훈련하는 네오

2) 현실과 가상의 경계- 우리가 현실이라고 당연하게 믿고 왔던 세계가 바로 가상이라는 역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준 매트릭스의 공간에 불과하다. 평생을 현실로 믿고 살아온 앤더슨은 모피어스의 부름에 의해 네오로 인식을 바꾸고 현실에 눈을 뜬다.     


*꼭 인간이 기계를 제어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기계를 모두 파괴하는 미래 인간

- 애니매트릭스를 통해 보면 왜 인간과 기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배경이 나온다. 사실상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를 인간이 제어할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이미 실생활의 공유를 하고 있던 인공지능의 기계들을 일방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방어를 위해 국가를 설립하는 기계들의 협상 또한 무시하고 인간은 끝까지 자신의 주도권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인공지능이 있어, 인간의 사유 능력을 뛰어넘고 물리적인 힘 또한 압도적인 기계의 진보를 과연 인간이 막을 수 있는가? 차라리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나아가 왜 꼭 인류가 주인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들게 한다


아이로봇

인간과 기계는 무엇이 다른가? 그 다름이 존재적 우열의 척도가 될 수는 있는가? 바이센테니얼맨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사랑과 결혼의 가능성을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인간의 감정과 유기체적 특성도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척도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이로봇에서 로봇이 제어를 벗어나는 이유는 정작 인간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라는 역설이 있다. 인간 스스로 악하기에 내버려 두면 멸망하는 상태를 막기 위해 로봇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려지는 로봇들 또한 자신들이 로봇인지도 모른 채 인간처럼 살아가는 예도 있으며, 나아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과 명예로움에 대한 가치를 안다.      

블레이드 러너 


현실 같은 가상가상 같은 현실무엇을 현실로 인식해야 하는가?

-현실은 기계를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에 불과하여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항시 느껴야 한다. 한편 매트릭스의 가상세계에서는 우리의 일상과 같이 평온하고 안정적이다

현실은 멸망한 도시







현실의 의상은 남루하다.

-옷 또한 대조적이다. 현실에서는 남루한 헝겊 덩어리를 잘라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가상세계인 매트릭스 안에서의 의상

반면 가상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옷으로 마음껏 골라 입을 수 있다. (검은 슈트)

-음식. 현실의 음식은 아무 맛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영양소만 맞춰놓은 콧물과 같은 점액질에 불과하여 음식을 먹는 쾌감을 전혀 누릴 수 없고 그저 생존하는 실용성만 있는 곳이 현실이다. 한편 매트릭스 세계에서는 설령 가짜라 하더라도 맛을 느끼는 감각이 실재하기에 다양한 음식을 누리면서 쾌감을 얻을 수 있다.

- 따라서 팀을 배신한 사이퍼의 갈등과 성적 욕망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마우스의 주장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생긴다. 가상의 세계에서 깨어나라고 하지만, 깨어난 현실이 감각적으로 오히려 마비된 사회라면 진짜 현실의 의미가 있는가?      

배신자 사이퍼는 오히려 남루한 진짜 세계보다 화려한 매트릭스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인간은 포유류가 아닌 바이러스인간과 자연의 관계,

- 모피어스를 잡아 가둔 스미스 요원은 인간을 극히 혐오한다. 원래 초기의 매트릭스는 완벽한 세계였다. 악하지 않고 선함이 가득한 세계,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완벽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에러를 일으켰다고 한다. 완벽함보다 불완전함을 필요로 하는 인간성. 이러한 시행착오 끝에 현재의 매트릭스 세계가 안정화되었다고 스미스 요원은 말한다. 이 대목은 마치 신이 왜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답변과도 같다. 

바이러스 같은 방식을 따르는 유일한 유기체가 인간!이기에 이를 혐오하는 스미스 요원

- 문제는 인간은 포유류와는 다르다는 점을 스미스는 발견한다. 원래 포유류는 어떻게든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으로 생존해 간다는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이 아닌, 자연을 끝까지 파괴하고 기생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기적인 방식이라며 혐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생존 패턴과 똑같은 것이 바로 바이러스라고 한다. 

- 재미있는 점은 만약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매트릭스 세계를 오히려 현실로 인식하고 싶다면 영화의 선과 악의 구도는 바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스미스 요원들은 안정적인 시스템이 돌아가게 하는 컴퓨터 백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모피어스 일당은 인류를 구원할 자들이 아니라, 안정적 시스템을 파괴하는 해커에 불과하고 바이러스인 것이다. 바이러스를 잡기 위한 스미스 요원들의 모험! 의 관점으로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굳이 매트릭스의 세계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면 말이다. 감각 및 쾌락의 상실을 가져오는 암울한 현실보다 비록 가상이더라도 현실처럼 철썩 믿는 역동적 세계가 더 좋지 않은가?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는다 정신과 육체의 연결성

-

 매트릭스 세계가 현실이 아닌 이상 이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벌어지는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꿈과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날고, 총알을 피하듯이 이들 또한 이러한 능력이 가능하다. 훈련이라고 해도 육체를 강화하는 훈련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현실과 가상을 확실히 구분하고, ‘믿는 것’ 이 중요하다. 공포를 이겨내는 것, 자신의 빠름을 믿는 것. 거기서 능력이 실현되는 것이다. 문제는 가상의 세계에서 죽어도 현실에서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영화의 특성상 스토리 전개가 불가능하다. 요원에게 죽어도 현실에서 아무 영향을 안 받으면 결국 불사조인 셈이니까, 따라서 네오가 점프 훈련에서 빌딩에서 떨어졌을 때 현실에서도 피가 나는 장면을 통해서 설명해내는 것이다.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는 것이라는 대사를 통해서 정신과 육체가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구원론적 관점에서의 분석

이 영화는 기독교의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모티브로 한다. 기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현실은 로마의 압제에 자유를 잃어버린 유대민족과 같다. 하지만 광야에서 메시아의 나타남을 예언하는 예언자가 있듯이 영화에서 오라클은 이러한 존재다. 인류를 구원한 구원자가 분명 나타날 것이고, 그에 관련한 아리송한 예언을 하는 자. 그리고 모피어스는 마치 세례 요한과도 같다. 예수님의 나타남 직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구원자가 나타날 길을 마련해 주는 자로서 말이다. 결국, 앤더슨, 네오는 예수를 모형으로 한 모델이 되고, 네오를 사랑하는 트리니티는 말 그대로 삼위일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처럼 네오는 혼자로서는 완성되지 못한다. (참고로 모피어스의 함선 이름은 '느부갓네살' 바로 유대민족을 지배했던 바벨론 왕 이름이다. 아마도 이 정복자의 의미보다는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한 성경 이야기에서, 즉 예언적인 꿈을 꾼 그의 이름을 감독이 차용한 듯하다.)

 네오는 자기 스스로가 구원자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심지어 오라클 또한 아직 ‘그’가 아니라고 한다. 오라클의 예언은 틀린 것이기도 하지만 맞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함으로써 악의 세력을 점령한다. 즉 네오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모피어스와 자신의 생명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오라클의 예언의 성취인 셈이며, 자신은 자기 생명을 기꺼이 버린다. 네오 역시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믿는 그 믿음 속에서 스미스와 대등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지만, 완전히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즉, 거듭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다. 

점점 자신의 능력을 믿기 시작하자 능력치가 바뀜


 네오가 트리니티와의 연합을 통해 (결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같이 키스로 깨어나는 동화의 모티브가 아니다) 네오는 부활하고, 이제는 그 전의 존재가 아니다. 네오의 새로운 시각을 보라, 모든 세계가 현실의 피사체가 아니라, 기호와 문자의 나열인 매트릭스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세계의 모든 원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된 경지에 이른 것이고, 이는 곧 신의 재림과도 같다. 그래서 황당할 정도로 총알을 막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총알의 운동 자체를 지배한다. 

 물론 이러한 신이 되어버린 네오가 스미스 내부로 들어가서 파괴하는 바람에 그의 신적 능력이 스미스의 잔재 어딘가에 복제가 되고, 스미스 또한 신神적 능력을 카피해서 2편부터는 엄청난 실력자로 다시 네오와 싸우게 된다. 여기서는 헤겔의 변증법과 같이 네오가 강해진 만큼 네오를 복제한 또 다른 적수가 나타나는 셈이다. 결국, 네오는 자신을 복제한 자기 안의 모순과 싸우는 셈이고, 이는 나중에 다시 종합된다.

 그렇다면 배신자 사이퍼는 유다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을 현실로 깨어나게 한 모피어스를 원망하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사이퍼의 선택은 배신자 유다의 원망과도 같다. 자신이 원하던 혁명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왜 이런 누추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선택실존적 선택의 무한한 반복

빨간약과 파란 약, 가짜 현실에 남을 것인가, 진실의 세계를 마주할 것인가

- 영화 매트릭스 안에는 운명과 예언의 실현이 중요한 틀이면서도 결코 네오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유의지에 맡기고 실존적 선택 속에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준다. 자유의지와 예정의 기막힌 조화, 기독교 신학의 관점을 감독들이 이해한 듯하다.

-처음 트리니티를 만나러 가게 되는 장면들도 모두 네오의 선택이다. 단지 모피어스 일행은 네오의 컴퓨터를 해킹하고 접속해서 사인을 주었을 뿐, 최종적 선택은 모두 네오가 한다.

 

-처음 모피어스를 만나서 빨간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의 선택, : 완전히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뜰 것인가, 아니면 예전의 삶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

-스미스 요원에게 인질로 잡힌 모피어스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구할 것인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모피어스와 자기 자신을 모두 구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정체성의 실현을 이룬다. 예언의 성취.

-영화 2편에서는 트리니티와 인류의 운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네오의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인류는 거대한 서사보다 자기 사랑을 택한다는 점. 결론은 우리의 예측대로다. 사랑을 택함으로써 아키텍처의 예상(필연)을 깨어버리고 세계를 구할 실마리를 얻게 된다. 


*영화의 결론
이 영화의 결론은 권선징악의 유치한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다. 영화의 갈등관계는 3자구도가 된다. 인간을 대표하는 네오와 인간세계를 사실상 지배하는 압도적인 기계, 그리고 매트릭스 세계에서 힘을 키워서 기계조차 컨트롤할 수 없게 된 스미스,
3편에서의 인간과 기계의 치열한 전투는 치열한 만큼 1편과 같은 극적인 내용이 나오지는 않다. (즉 덜 어렵다.) 이미 인간의 현실적인 열세는 확실하니 말이다. 끝까지 저항하는 정신의 승리는 보여줬을지언정 결과는 참담하다. 여기서 네오와 트리니티가 기계의 심장부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고, 거기서 트리니티는 네오를 위해 죽는다.  마지막으로 네오와 기계는 협상을 맺는다. 그렇다 바로 협상, 정치적인 결말이다. 이미 기계의 컨트롤을 벗어난 스미스를 네오가 처지해 준다면 인간에게도 자유를 준다는 것이다. 네오가 결국 스미스를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도 스미스에게 능력을 준 근원이었던 만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결국우리 역시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한다그 길이 맞는 길이냐고맞는 길이 과연 있을까설령 신이 예정한 그 길일지라도 그 선택이 맞았는지 아닌지는 선택 이후의 문제일 뿐이다결국우리는 과감하게 선택하고선택했으면 그것에 맞게 선택의 책임을 갖고 그 선택 이후에 유발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거나 맞서 싸워가면 되는 것이다그저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힌 선택이 사회세상이 요구하는 선택을 따라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같은 길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신 앞에 홀로 서서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 (내 옆에 있는 동료들도 결국 그 선택지 앞까지 함께 가주는 자이지 대신 선택해 주는 자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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