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구나라고 납득할 수 없듯이 인생은 충분히 무겁고 누구에게나 섣불리 행복하다고 말할 권리를 허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 '작은 빛'은 버거운 삶 속에 희망을 담아내는 빛인가?
빛의 통상적인 상징적 쓰임새를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작은 빛'이란 어두움에 가까운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상태에서 이제야 빛이 들어오는 상황을 누군가는 희망으로,
누군가는 그저 아직도 어두침침한 상황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 초반 보이는 엄마의 집 자체, 햇빛이 비스듬히 비추이는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그 공간은, 이미 삶의 남루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2미터도 안 되는 폭에 부엌까지 함께 달린 원룸형 방식의 직사각형 공간, 물이 새고 곰팡이가 몇 번이고 피었다가 지고 얼룩으로 남은 벽지, 그것을 가리고자 한 것인지 필요 이상의 덕지덕지한 액자들은 더더욱 탄식을 내뱉게 만든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가족의 공간인 '반지하'의 모습 자체가 영화적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작은 빛' 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간인 엄마의 집은 그렇게 한없이 초라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는 너무 반지하스러워서 '인위적'인 냄새가 강했다면 '작은 빛'의 엄마의 공간은 그 자체로 리얼리티 하다. 아니 그냥 리얼이었다. 절대 세트로 꾸밀 수 없는 정말 현실적인 공간이기에 장면만으로 삶의 고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실제로 영화상 모든 집들은 감독의 가족들 집을 그대로 섭외한 것이라 해서 놀랐다) 이러한 집의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언젠가 살아봤던 힘겨웠던 그 시기의 공간이라면 아련함을, 지금 현재의 공간이라면 삶의 무거움을, 앞으로 살아야 할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미래적 가능성에서는 왠지 모르는 불안함을 주는 그런 곳이다.
그럼에도 '작은 빛'에서 이 공간은 엄마와 진무, 그리고 누나와 아들이 채워준다. 이 작은 공간에서도 누구도 불편함 없이 함께 밥을 먹고 우리네 일상처럼 담소를 나누는 가족의 공간이 된다. 나와 같은 3자 적 시선에서 엄마의 집은 인생의 고통이자 불안, 남루함의 상징처럼 보이다가도 그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거기서 함께 밥을 먹고, 자고, 즉 모이고, 고된 몸을 다시 회복시키는 집의 역할을 오롯이 해내는 대견한 공간임을 당당하게 보여주기에 지금의 우려 섞인 나의 시선과 생각에 민망함을 주기도 한다.
영화 '작은 빛'에 등장하는 진무, 엄마, 누나, 형의 삶은 등장하지도 않은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 남편에 의해 영원히 고통받는 공동의 피해자들이다. 형의 경우 친엄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 떠나버리고 지금의 진무와 현을 낳은 새엄마를 보게 된 셈이기에 자신을 버린 친엄마의 빈자리, 그러고도 새엄마에게 폭력을 자행한 아빠의 모습, 그리고 자살해버린 아빠의 부재까지 모두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누나 현은 또 어떠한가. 이미 친아빠를 잃고 홀로 된 엄마 밑에 있다가 새아빠를 맞이하는데 폭력을 일삼는 새아빠와 폭행에 시달리는 엄마를 보는 심정, 역시 그런 새아빠의 죽음. 진무는 바로 누나 현의 친엄마와 형 정도의 친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셈이다. 즉 이 복잡한 가족의 구성 속에서 유일하게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모두 받은 중간적 인물이기에 영화 속에서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 된다.
당연히 이 세 아이들의 엄마로서 살아온 당사자의 삶은 오죽했을까. 첫 남편을 잃은 상실 속에서 딸아이를 위해 급하게 재혼한 대상이 바로 진무와 형 정도의 아버지이다. (수녀에게 소개받은 남자이니 얼마나 어린 엄마의 심정이 급했을지 납득이 간다) 즉 그의 폭력의 희생자로서, 곧 죽어버린 남편 때문에 다시 과부가 되는 박복한 팔자? 에 그렇게 홀로 아이들을 키워내고 지금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영향에서였을까. 자식들 모두 힘겹게 살아가는 삶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형 정도는 세차장에서 세차 일을 하면서 저 높은 계단을 오르고 올라 작은 집에서 홀로 살고 있고, 누나 현은 엄마의 젊었을 적 삶을 복제하듯, 이혼하여 초등학생 아들을 홀로 키운다. 진무는 선반공으로 2,3명만 있는 작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옥탑방에서 홀로 산다. 진무가 36살임을 기억한다면 세 자녀 모두 배우자 없이 홀로 살아가는 것이 그저 자발적이고 주체적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특히 정도와 진무는 제대로 결혼해서 살만한 여유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충분히 파악해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엄마 또한 식당 설거지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삶은 시지프스의 신화 같다고 할까, 무거운 돌을 힘겹게 올리면 다시 떨어지고, 이를 다시 끌어올리고, 무한 반복되는 삶의 권태는 이들 가족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듯하다. 각자의 노동은 그렇게 반복적이고 엄마의 삶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반복된다. 다만 이들이 겪는 고통의 뿌리에는 '아버지'가 있다. 폭력적 아버지의 제왕적 군림과 그러면서도 한없이 초라하게 갑자기 삶을 비겁하게 끝내버린 나약한 아버지의 이중적 모습이 살아남은 이들의 발목을 썩은 나무뿌리처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꿈이 있었다. 형 정도는 진무가 해달라는 요구에 못 이기는 척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 요구한다고 진짜 골목에서 춤추는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정도는 지금도 춤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누나 현은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어릴 적 동시를 짓고, 커서는 신춘문예에 도전했었던, 그러나 현실 앞에서 접어버린 꿈. 엄마 또한 행복한 적 있냐는 진무의 질문 앞에서 겨우 찾아낸 장면은 바로 의상실 다닐 적 출퇴근하는 나뭇길 그 풍경이라고 했다. 영화상에서 유일하게 빛이 가득하고 천천히 천변을 거니는 엄마의 모습은 두어 번 나온다. 여기가 엄마에게는 행복의 장소이자 기억인 셈이다. 혹은 의상실이 꿈이었기에 그곳을 다니던 길이 행복으로 남은 것일 수도 있다. 진무는 딱히 나와있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인 캠코더를 찍는다는 것에서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 영화인만큼 정말 그런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꿈이 있지만 현실은 거기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진 채 표류한다.
게다가 진무는 뇌수술 이후 기억을 잃을 것이라는 판정까지 받는다. 하지만 이 글에서 진무의 기억상실을 어떤 삶의 비극이나 고통으로 보지는 않으려 한다. 영화상 진무의 기억상실은 가족 모두의 삶의 고통과 그 뿌리를 상기시키고 마주하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작은 빛'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상실이라는 주인공의 비극적 소재가 아니라, 그 기억상실을 수단으로 가족들 한 명 한 명을 캠코더라는 렌즈의 시선 앞에 세우는 것, 그렇게 자신을 다시 보게 하고 기억을 더듬고, 고통의 근원인 아버지와 마주하는 것, 거기서 삶의 빛을 다시 찾아내게 하는 것이다.
빛은 무엇인가,
태양빛, 영화 속에서 비추인 엄마의 집 지붕은 반은 어둡고 반은 해가 든다. 밝으면서도 어두운 그 공간에서 방안은 곰팡이가 피고 물이 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가 없지 않기에 말라비틀어진 화단에 다시 새 생명을 싹트게 할 고민을 딸과 할 수 있다. 엄마의 행복했던 그 기억과 공간으로써 천변은 어두움 한 곳 없이 밝게 처리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진무가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내려오는 그 장면에서도 빛은 나뭇잎 사이로 작게 비추인다.
시선의 빛, 인간의 눈동자 또한 빛을 반사하기에 또 하나의 빛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작은 빛은 바로 영화의 등장인물 모두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빛으로 비춰주는 셈이다. 고통스러운 각자의 삶이면서도 그 뿌리는 연결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삶을 가족이라는 애정 가운데 바라봐준다. 서로의 시선이 있기에 이들은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 렌즈라는 빛, 영화 속 캠코더는 이들 사이에 새로운 빛으로 등장한다. 진무가 든 캠코더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엄마, 형, 누나의 입장에서 짓무를 보게 하지 않고, 제3의 시선, 제3의 빛을 보게 하는 셈이다. 녹화되는 것을 인지하면 말투가 바뀌고 몸짓도 바뀌듯이 평소라면 답변하지 않을 내용도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워하면서도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말하게 된다. 누나 현의 작가의 꿈, 현 정도의 춤, 엄마의 의상실의 좋았던 기억도 진무의 캠코더의 빛이 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진무가 각기 촬영한 영상은 때로는 엄마에게, 누나에게, 형에게 서로 전달되어 보임으로써 떨어져 있던 그들을 다시 연결되게 하는 힘이 된다.
한편으로 이 캠코더를 찍는 진무와 가족들을 찍는 영화 촬영의 카메라 렌즈는 바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자 빛이다. 반대로 우리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의 빛을 통해 진무네 삶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거기서 모두가 삶이라는 보편성, 삶의 고통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보편성을 통해 공명하게 되고, 거기서 드러나는 작은 빛의 힘과 효과 또한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힘이 된다.
기억 또한 빛이다. 과거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 내는 것은 빛의 효과와 같다. 진무의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은 결국 빛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가 현재의 빛을 상실하는 것이라면 기억상실은 바로 과거의 빛을 상실하는 것이다. 진무에게는 이 기억이 고통이면서도 지워지고 잊히고 싶은 기억만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겨야 했던 것이다. 그에게 지금 현실의 기억도 곧 과거가 될 것이기에 기억상실 이후에 잃어버릴 것에 대한 아쉬움과 두려움이 캠코더를 들게 했듯이, 기억은 과거를 비추는 빛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고통으로 얼룩진 현실이든, 과거든 기억하고픈 것이고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망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그 고통을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가 드러나는 과정이 바로 이 '작은 빛'이다.
결국 진무는 아버지의 무덤으로 찾아가게 되고, 영화 마지막 장면은 판타지스러운 새로운 시공간(추웠던 겨울의 시공간은 땀이 흐르는 여름으로 옮겨왔다)에서 엄마, 진무, 형, 누나, 그리고 다음 세대인 누나의 아들까지 다 함께 모이는 유일한 장면을 연출한다. 물론 거기에 미라인 아버지도 함께다. 20년이 지나도 썩지도 않은 채 미라로 남아있는 아버지는 거대한 나무뿌리에 갇혀있다. 이는 마치 아직까지도 진무네 가족에게 고통의 기억으로 살아남아있는 진득스러운 아버지의 망령이기도 하다. 살아있을 때도 모자라 죽어서도 가족에게 들러붙어있는 가해자의 망령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아라된 아버지 역시 두꺼운 나무뿌리에 묶여있다. 이는 아버지 역시 고통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도 같다. 그 역시 삶에서 고통받았던 피해자였을 것이다. 영화상 그의 고통이 무엇인지 왜 폭력을 행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창고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작은 빛' 아버지의 카메라에서 남겨진 가족들의 사진, 아버지 자신의 젊고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들이 남겨져 있다. 그에게도 가족들은 행복의 원천이었던 순간순간이 있었고, 자신의 삶에 빛을 비추던 시절이 있었던 셈이다. 결국 자신의 폭력을 경찰에 신고한 진무와 현, 두 자녀의 판단을 직시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것은 그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엄마 집의 형광등이다. 오래된 유물 같은 낡은 형광등은 한쪽 등도 떨어진 채 힘겹게 천장에 붙어살았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형광등으로, 두쪽 모두 멀쩡한 형광등으로 새로 걸리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망령이 떨어지는 결과를 암시한다. 과거의 그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빛으로 대체되는 장면이다. 그리고 형광등이 똑딱 일 때마다 엄마와 진무, 누나와 그 아들, 형과 새엄마의 함께 있음의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형광등이 하나에서 두 개로 짝을 이루듯, 이제 하나가 아닌 둘의 함께를 보여준다. 일상의 삶 속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현실적 관계의 안정성이 찾아오는 셈이다.
형광등 빛이 보여준 행복의 암시는 아버지의 미라를 파내고 이장하는 진무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진무는 누구도 파내기 싫어하는 미라, 아버지를 무덤에서 끄집어내고 이장하기 위해 상자에 담아 이동한다. 이는 아버지의 상처부터 가족 모두의 상처의 근원을 캐내는 상징이자 새로운 삶을 향한 약동이 된다. 진무는 자신의 과거와 과감히 마주하고, 아버지를 용서? 함으로써 (나름 이장은 용서의 의미로 읽힌다. 저주스러운 아버지라면 무덤에 찾아갈 이유 또한 없을 것이니까) 자신의 삶의 무게를 거뜬하게 매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를 비추어주는 엄마, 누나, 형의 작은 빛이 함께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영화에서 보이는 나름 이상적인 가족 형태를 말하고 싶다. 분명 모두가 풍족하지 않은 삶이지만 각자가 자신의 삶을 버텨내고 살아낸다. 즉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무책임하게 의존하거나 내맡기려는 수동적인 궁상을 떨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오토바이까지 손수 운전하며 주방일을 하면서 자기 생계를 책임지고, 진무는 선반공을, 누나 역시 자기 직장일을 하며 떳떳하게 아들을 키운다. 형 역시 세차를 하며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이는 평소 노동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감독의 의지가 스며든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가족에게 서로 빛이 되는 존재가 되어준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육체적 노동을 긍정하는 것, 힘겹게 살아가더라도
누구 하나 섣불리 다른 가족에게 붙어서 '기생'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영화 '기생충'의 가족보다 떳떳한 삶이 아닐까. 비록 시지프스의 비극처럼 반복되는 노동일지언정 이제 진무의 가족은 서로의 작은 빛을 통해 아버지의 망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권태로운 삶의 반복성을 넘어서고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무는 수술 후 기억을 정말 잃어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