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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22. 2020

지젝 4편-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하는 법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요약문

세계 변화보다 종말이 더 쉬운, 이데올로기의 농간 

불과 20년전만 해도 공산주의,자본주의, 심지어 파시즘까지 나서서 치열한 논쟁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냉전 종식 이후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생산양식은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생산양식의 온건한 변화를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쉬워 보인다.' 생태학적 파국 속에서도 살아남을 '실재'인 것처럼

 이런 현재상황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증명한다.  이데올로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마르크스가 제시하였는데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무지. 현실을 왜곡한 잘못된 인식이 이데올로기이기에 이는 인식론이자 지식의 문제였다.

 우리는 대학에 들어가서도(노동자,관리자,기업가) 자기가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매일 행복하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투표를 하는 순간에도 이미 현재 상태를 승인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그리고 종교적 믿음이 실제로는 우리를 유순한 시민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에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다. 

 결국 이러한 마르크스가 분석한 이데올로기의 비판절차는 단순하다. 어리석은 주체를 일깨우기 위해선 그들의 현실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임이 드러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의 지적은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현실에 대한 왜곡된 왜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대학에 들어가면 자신은 사회체제를 지탱하는 구성원으로 훈련받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투표장에서 나의 투표가 실질적으로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즉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현대의 우리는 냉소주의적 주체인 것이다.


자기가 하는 것을 잘 아는, 냉소적 주체의 등장. 


우리는 현실인식의 왜곡을 알면서도 과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집착한다.

그래서 슬로터다이크는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지만 그렇게 행동한다'는 냉소적인 공식을 제안한 것이다. 지젝은 냉소주의와 슬로터다이크의 냉소를 구분한다. 냉소는 권위에 대한 풍자적이고 반어적인 반응의 하나로 지배질서의 위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냉소는 정치인,정치제도에 대한 대다수 인민들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슬로터다이크와 지젝은 냉소가 이미 공식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본다. 냉소주의는 냉소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냉소주의는 이러한 키니컬한 전복에 대한 지배문화의 대답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가면과 현실 사이의 거리와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가려진 특정 이익을 알고 있으며, 계산에 넣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면을 유지할 핑계들을 찾아낸다. 냉소주의는 직접적으로 부도덕한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부도덕성에 봉사하는 도덕성에 가깝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중-) 냉소주의적 주체는 현실에 대한 공식적인 전망이 이미 왜곡되었다는 것, 왜곡된 전망을 피할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한 주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이데올로기 속 주체들에게 그들이 속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없는 것이 그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탈이데올로기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가? 현실의 구분이 문제되지 않는가? 지젝은 아니라고 한다.

이데올로기적 환영을 구성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이런 ‘행동’에 있다. 즉 알다,알지 못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는가, 하지 않는가이다. 화폐의 진정한 가치가 상품을 생산하는 이들과 그들의 노동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 간의 관계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화폐 그 자체로 가치있다고 여긴다. 이미 화폐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 예를들어 내가 하루종일 페미니스트 저작을 정독한들, 정작 차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밥을 하지 않았다고 아내를 야단친다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이다. 나의 앎이 기준이 아닌 나의 행동이 나를 남성우월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놓치고 있는 것은 상황의 현실성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환영이다. 나는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는 것을 잘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사회를 살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진지하게 믿지 않는 냉소주의로 우리 자신을 속인다. 이데올로기적 환영은 우리가 행하는 것의 현실 속에 있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있지 않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행동속에서 자신들이 환영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잘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행동한다;로 다시 쓸 수 있다. 


믿음의 물질화,자동화된 신념 


지젝의 공식 중 가장 이상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신념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있지 않고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라는 공식이다. 우리의 내밀한 감정 또한 사회적 행위 속에 물질화된 것일 뿐이다. 진실한 믿음은 오직 의례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고 파스칼은 말한다. 믿기 전에 이미 성수를 받고 미사를 드릴 때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것,의례는 믿음을 위한 선차적인 전제조건이고 이런 의례들이 내적 신념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 그것은 미리 상연된다. 내가 믿고 있음을 실제로 믿게 될 때 우리가 하는 거라곤 단지 우리의 믿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며, 그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보다 미리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믿음의 의례는 소급적으로 의례에 대한 믿음을 생산한다. 티벳의 회전식 기도통처럼 자동화된 신념이 기계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째깍거리며 작동하는 셈이다. 이는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인 교육시스템,교회, 가족과 같은 제도들이 그 사례로 나타난다. 물론 알튀세르는 주체를 이데올로기에 기입하는 방법을 ‘요청, 호명’이라고 한다. 경찰이 ‘거기 당신!’이라고 부를 때 나는 틀림없이 호명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호명 모델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을 창출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호명되는 것만으로 이데올로기를 믿을 수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파스칼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기계로 봐야 한다.  우리가 미처 깨닫기 전에 그 체계의 올바름에 대한 신념을 창조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인 셈이다. 이 장치들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선취하고 우리를 적응시킨다. 


이데올로기의 세가지 양태

이데올로기의 세 부분, 교리와 믿음과 의례.

*교리- 이데올로기적 교리는 그 사상,이론, 믿음과 연관되어 있다. (자유주의 교리는 존 로크의 사상에서 발전했다.)

*믿음- 이데올로기적 믿음이란 교리의 물질적, 외적 표출과 기제들을 가리킨다. (자유주의 교리는 언론독립,민주선거, 자유시장으로 물질화된다)

*의례-이데올로기적 의례는 교리가 내면화,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방식

이 세측면은 서사를 형성하는데 교리의 국면에서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발견-> 진리라고 주장된 명제나 기득권을 은폐하는 논증의 형식(정치형태의 로크의 논증이 대영제국의 식민주의가 아닌 혁명적인 미국인들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사례)  둘째단계,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그것에 대한 믿음을 생산하는 물질적 형태를 갖는데 가장 강력한 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셋째 이데올로기는 자생적인 것처럼 거의 자연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상품물신주의 사례)

결국 이러한 세 측면에서 이데올로기와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교리 같은 경우 우리가 어떤 명제를 중립적 객관적으로 비판하겠다는 생각자체로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될 수 있기에 어렵다.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 시대다. 

실재계에는 어떠한 과잉이나 결여도 없다. 따라서 인종주의 이데올로그를 설득하려해도 불가능하다. 사실에 입각한다고 해도 우리고 실재의 상징화를 거쳐야 하기에 상징적 질서속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처럼 이데올로기라면 우리는 현실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을 포기하고자 하는 몸짓이야말로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제스처이다.그것은 굴복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와 비이데올로기를 구분할 수 있는 ‘비어있는 장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내용없는 형식, 현실의 유령적 보충물) 


현실에 들러붙은 이데올로기 ‘유령’


현실과 이데올로기라는 이원체계가 사실상의 삼원체계를 왜곡한다고 지젝은 보았다.

셸링은 안/밖, 삶/죽음.육체/정신등 상보적 부분만이 아닌 두 항에 더하여 유기적 총체를 교란하는 배가적 보충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가령 육체 정신관계에는 동물적 자성 같은 육체적 측면도 존재한다. 삶/죽음의 이항대립은 상징계 바깥에 사는 이들의 살아있는 죽음, 실재계의 광기 속에서만 존속하는 신체들로 보충된다고 주장함.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상징적 기계 자체의 죽어있는 생명으로 보충된다.이러한 셸링의 논의는

상품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서 이런 잉여의 효과를 목격할 수 있다. 상품물신주의 관련, 상품의 ‘신체’는 그것은 가치가 언제나 다른 곳에, 그것을 생산한 노동력 속에 있다는 점에서 ‘정신화’되어 있다.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이데올로기적 교리에 물질적 실체를 부여함으로 이데올로기 정신에 ‘신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사물질성, 유령 같은 보충물이 모든 이데올로기의 토대를 구성하며 현실 자체가 이 보충물에 의존해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는 결코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상징계에 매개되어 있기에. 그래서 우리가 아는 현실은 언제나 상징계이다. 그러나 실재의 상징화는 완전할 수 없기에 상징계는 실재를 봉합하지 못한다. 상징화되지 않은 실재의 조작이 ‘근원적인 적대’를 생산한다.  실재의 조각이 유령 같은 보충물로 돌아와 현실에 들러붙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유령은 현실이 상징계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 버려져야 하는 실재의 조각을 은폐한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의 근거, 중핵이 있다. 현실과 이데올로기는 상호함축적관계로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없다.

 계급투쟁이라는 사례의 구체화. 계급투쟁은 실재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징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를 접할 수 없다. 계급투쟁이 실재적이라는 것은 그것이(계급투쟁이) 상징계 안에 장애를 형성함으로써 그것을 상징화하려는,곧 현실로 회복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로 표출된다.

지젝은 계급투쟁이 사회를 형성하는 ‘구성적 분열’이라고 본다. 사회를 결합시키는 우리의 상호결속이면서 사회를 유기적 총체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시적인 계급투쟁의 부재는 일시적으로나마 이 투쟁에서 어느 한쪽이 승리했음을 뜻하는 증거이다. 계급투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특수한 주관적인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으로 그것을 보거나 보지 않을뿐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유령이 실재적 계급투쟁의 적대성이 상징화되는 데 실패했음을 은폐8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적대의 심연을 메우고 현실내부의 구멍을 메운다.  의미가 없는 것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령 사회에 내재한 적대성이 ‘상호보완적 대립항’으로 해석됨으로써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음과 양, 남성과 여성같은, 우주적 쌍으로 이해하는 뉴에이지, 적대는 그저 불균형의 결과로 이해되고 이런 이해방식은 세계가 구성적으로 이미 불균형이라는 사실을 은혜한다.


 우리는 어떻게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할 수 있는가?


현실은 상징계로 구성되어 있고, 허구가 진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

유일하게 비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실재, 적대의 실재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실재의 위치에 서지 못한다.

실재의 적대는 사회적 현실(상징적 질서)의 존재론적 상수이다. 이 적대는 실재에 속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적대의 효과가 이데올로기적 신비화 속에서 가시화된다. 결국 이데올로기적 형식자체는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전제되어야 하는 것.

 지젝에게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이 이론적 전제이다. 우리가 현실이 구성적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판의 도마위에 올릴 수 있다. 궁극적으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목표는 좌파이데올로기가 한물 갔다고 얘기되는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의 비판의 기획을 살아있는 것으로 유지시키려는 시도이다.

 현대정치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점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단계가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을 위한 첫걸음이 비판의 실행가능성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 요약에 대한 해설강의 링크입니다]

https://youtu.be/pkJKEFm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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