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시간과 단절된 공간의 변주곡,그 소통을 위하여
왜곡된 시간과 단절된 공간의 변주곡,
그 소통을 위하여
부족한 독서량의 문제로, 뒤쳐졌다는 강박관념은 언제나 나를 도서관 서가에서 고전 편에 발길을 머물게 하고, 결국은 언제나 손으로 고전을 집어 들고 읽게 만든다. 일단 고전이라도 다 읽어야 현대소설을 읽을 여유가 생길 것만 같지만, 그 때가 10년 후가 될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다 이 독서수기의 기회를 통해, 순전히 학교에 비치되어있다는 이유 하나로 ‘서울동굴 가이드’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작가가 김미월인지, 김소월인지 머리 속에 알아서 파편화되어 기호로 떠돈다.
책 제목과 같은 꼭지인 ‘서울동굴가이드’를 먼저 읽어보고 다 읽을지 말지 결정하자는 오만한 생각과 함께 책을 들었는데, 다 읽었을 때는 이미 책 앞 커버 뒷면의 작가란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 여자를 처음 알게 된 동자승의 마음이 이러할까? 고전의 그늘의 가려 현대사회를 보지 못했던 내가 장님이었던 게다. 새로운 파도가 마음 속에서 밀려오고, 이 시대의 아픔과 단절된 시.공간이 너무나 친숙하게 와 닿아서, 독특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동시에 나와 나이가 크게 차이도 없는 작가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부럽기 그지 없었다.
결국 책 전체를 다 읽어가면서 머리 속에 자리잡는 것은 정신분석과 장자의 소통에 관한 텍스트였다.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지만, 결국은 그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고,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서 흠뻑 젖은 축축함에서 여러 현실의 침몰된 조각들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유아기적의 억압과 왜곡된 기억, 혹은 경험들은 성인이 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이 소설의 모든 주인공들은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다. 그것도 1차 형성집단인 가족의 관계가 주로 그렇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혹은 아버지, 이복동생과의 관계, 새 아빠와의 문제들은 주인공들의 삶에서 왜곡된 시간으로 숨어있다가 틈새를 헤집고 나온다. 잊고 싶은 억압된 기억들은 언제나 명확히 떠오르지 않고, 기호화된 문자와 파편화된 그림으로 현재를 살아낸다. 과거는 기억만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미래로 나아가는 연장선에 있다.
이렇게 왜곡된 시간 속에서 주인공들은 단절된 공간을 만들어 내며, 상처받은 현실을 방어하며 살아간다. 극복의 수준에 닿지 못하고, 자신만의 이상적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다. 인터넷 게임과 고시원, 동굴, 대필의 직업 등을 통해서 견뎌가는 것이다. 특히 고시원과 동굴은 현대문명의 서울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이 현실을 극복하기 보다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기억 속에서 자신을 움직일 수 없도록 꼭 잡아주는 비좁은 고시원과 어두운 동굴을 어머니의 따스한 자궁처럼 여기고, 회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답은 언제나 입구와 출구가 같은, 신호등을 건너는 가의 여부와 같은 일방성에 있기에 비극이 생겨난다.
주인공들의 상처들은 성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관계의 부분으로 확장되어 나가기 때문에 이는 프로이트의 범위를 벗어나 언어적 기호의 문제인 라깡으로 연결되며, 단절된 타자의 소통의 문제는 들뢰즈나 장자의 사상을 살려낸다.
소통은 영어로는 communication 이다. 이 의미는 커뮤니티, 공동체에 속할 경우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소통의 단절을 일으키는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1차적으로 시간의 왜곡과 2차적으로 공간의 단절로 공동체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다면 현대문명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소통은 한자로 疏通(트일소, 통할통) 으로 쓰여지는데, 이는 나와 타자와의 길이 트이고 통한다는 개념이다. 장자는 이를 호접몽에서 현실과의 구분이 모호하지만, 분명히 길이 다름을 제시하고, 포정의 칼처럼 소의 근육과 뼈의 결대로 내지르는 것에서도 타자와의 조우를 대비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여기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이 진짜인지, 상상의 공간, 단절의 공간이 진짜인지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살아가려 하기에 관계의 단절을 심화시킨다.
인간이 먼저 갖고 있던 선입견(成心)은 낯선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판단정지를 일으키고, 이 갈림길에서 자신의 성심은 비우고,(虛心) 새로운 방법들을 타자에게 제시하는 양행(洋行)을 통해서야 소통에 이룰 수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김미월 작가의 캐릭터들은 모두 이러한 방법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며, 도저히 타자에 닿을 수 없는 미끄러짐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공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문명 속에서 위와 같은 판단은 타자에게도 주어지며, 타자가 주인공들에게 소통을 이루려 노력했다면 단절된 공간이 열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작가가 얘기하는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에 더더욱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타부타 여러 복잡한 생각을 떠나서, 작가는 내가 잊고 있던 삶의 군상들을 친절하게 그러나 묘하게 약을 올리며 보여주고 있는데, 그 읽어내는 과정이 여간 즐겁지 않다.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때의 거만함은 동굴의 암흑과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되려 너클의 신시아에게 영원한 꿈을 주며, 마지막의 공허함을 맞닥뜨리지 않으려는 주인공처럼, 나 역시 이 책의 마지막을 읽기가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책을 덮었을 때, 이미 나는 현대소설의 매력에 흠뻑 빠졌음이요, 그 처음을 알게 해준 김미월작가의 팬이 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그 동안 현대문명의 왜곡된 시간과 단절된 공간이,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소통의 길로 열려 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