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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23. 2020

'나를 위한 자유'와 '모두를 위한 자유'

미국과 한국이 바라보는 자유의 간극

*이 글은 시사인 666호 기사 '우리는 미국식 자유와 분명히 결별한다'를 읽고 남기는 단상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직면해서 

미국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며 무장한 시위대가 주의회 건물을 점거했다고 한다.

정작 총기를 들고 점거했음에도 총기면허가 있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미시간주의 법이 더욱 놀랍지만.......

여튼 이들은 체포되지도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내면서 그렇게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my body,my choice' 라는 구호는 원래 임신중절에 대한 자유를 외치는 여성운동가들의 구호였는데 지금은 괴상하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의 구호가 되어있다고 한다. 하긴 '자유지상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건지도 모르겠다. 철저한 나의 소유권을 지키고 내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데 정부도 규제해서는 안된다는 자유지상주의에 충실하다면 코로나 사태로 인한 정부의 각종 규제는 그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질 터이다.

 이러한 미국식 자유를 '나를 위한 자유'로 지칭한다. 사실 이는 '소극적 자유'의 원리와 상통하는데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나에게 마스크를 강제로 씌우고, 안전이라는 이유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등의 국가의 '간섭'을 거부하는 것, 전통적인 보수적인 자유의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유럽의 경우 자유가 아닌 '평등'의 가치를 중시해서 사회복지 안정망이 촘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럽이야말로 '자유'의 가치를 중시한다고 한다. 단! 그 자유의 정의가 미국과 다르다. 유럽은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미국이 어떠한 간섭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유럽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위험이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험의 원리를 통해서 위험을 분산하는 시스템이 발전한 것이다. 

 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처럼 4대보험은 결국 대놓고 평등을 추구하는 정책이 아니라, 결국 언제 나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 해결책이라는 점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위험을 분산,부담해줌으로써 갑자기 닥친 위험앞에서 유럽인들은 예상치못한? 장수를 통해 겪게 되는 빈곤의 문제를 연금을 통해 해결하고, 건강의 위험에 대한 걱정은 건강보험을 통해 자유로 바뀌고 실업과 산재 또한 미래의 불확실한 위험에서 현재의 자유를 가능케 한다. 

 한편 이번 세계보건기구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문에서 언급한 '모두를 위한 자유'가 바로 이런 유럽식 자유와 상통하는 셈이다. 나의 안전을 위하여 이웃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이 바로 마스크쓰기, 공공장소 외출 자제등응 코로나 사태에 맞춰 모두가 힘들더라도 지키고자 하는 그 실천수칙들이 바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실헌하는 방법인 셈이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도 진정한 '자율'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나라는 (누구라 말하지 않겠다) 집단면역 운운하면서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 통에 결국 고 위험군 환자들의 생명만 앗아가야 했고, 어떤 나라는 극단적인 봉쇄와 통제조치를 통해 코로나 확산을 막았다. 환자 발생의 결과만 따진다면 후자가 더 낫겠지만 그렇다고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한국은 유일하게 국가가 앞장 서 통제를 하지만 이는 원천봉쇄방식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실천을 독려하는 방식이며, 부득이한 상황에서만 영업을 못하게 하거나 안전수칙을 어겨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시민에 대해허만 처벌 혹은 구상권을 청구하고 있다. 즉 개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밖에 나가서 쇼핑을 할 수도 외식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당연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래도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는 모두가 실천하고 있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자 노력한다. 자율에 맡긴 측면도 강한 만큼 누군가는 이 룰을 깨고 사회공공체,지역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으며 6월 말 현재 한국 또한 코로나 방역의 성패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 즉 설령 이 방역이 실패가 될지언정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나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우선한다면 결국 타인을 배려할 수밖에 없는 상호호혜성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 실험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마치 국민 모두가 이타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기대보다 얼마나 현실적인가) 

 결국 세계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한 실험대에 서 있다. 미국식의 '나를 위한 자유'인가, 유럽식, 혹은 포스트 유럽형의 한국식 '모두를 위한 자유'인가. 

 생각해보면 '모두'라는 단어에 이미 '평등'의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나를 위한 자유'애는 평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결국 '모두를 위한 자유'에만 펑등과 자유의 가치가 동시적으로, 종합적으로 실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갈 길은 자명하다. 이 얼마나 섹시한 방법인가. 자유와 평등의 동시적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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