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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n 27. 2020

[영화분석]위플래쉬(Whiplash) -한없이 정치적인

한없이 정치적인, 그래서 치열한  영화


위플래쉬(Whiplash) - 정치적관점에서의 분석

: 삶은 혼자만의 채찍질 같지만 철저히 타자중심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Whiplash


명사  1.[C] [주로 단수로] 채찍질 


정치: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 ·협력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의 총칭.  

[네이버 지식백과] 정치 [politics, 政治] (두산백과)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네이버 지식백과] 민주주의 [democracy, 民主主義] (두산백과)









스토리는 한 없이 단순하다.




야망이 있는 어린 드러머가 


음악적 광기에  휩싸인 선생을 만나면서


자신도 그 광기에 휩싸이며 성장하는 영화.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누구도 지루하지 않을 듯 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심장을 울리는 드럼소리 이면의 복잡한 심정이 아로 새겨진다.


혹자는 영화상의 화려한 드럼사운드와 


자기 목표를 향해가는 광기어린 열정(스승이나 제자나)에서 많은 감동과 함께 영화에 몰입하게 된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 조금은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 '정치적'이며 '민주주의'의 냄새를 환각처럼 맡으며


Whiplash(채찍질)가 무엇을 향해야 하며, 누구에 의한 것인지를 고민해봐야 했다.


즉, 그냥 즐기는 영화가 아닌,(100분간 시원한 영화한 편 잘봤다! 정도로는 치부할 수 없는! 그건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가장 큰 미덕일뿐) 

곱씹어보게 하는 영화다. 

그래서 추천할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앤드류 - 친구가 아무도 없지만, 그렇다고 홀로일 수도 없다.




앤드류는 최고의 재즈음악학교에 들어가서 최고의 드러머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다. 그리고 그 열심만큼 그의 주변에는 어떠한 친구도 동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경쟁자인 시스템이다. 그렇다고 경쟁자를 다른 방식으로 험담하거나 괴롭히는 그런 유치한 설정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실력으로 보여주는 경쟁시스템일뿐이여서 통속적인 영화나 드라마처럼 등장인물들이 대놓고 악하게 보여지거나, 유치한 질투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여하튼 앤드류는 사회적 관계가 부족한, 그래서 친척들 사이에서도 꽉 막힌 집안의 걱정거리에 불과했다.(그러나 알고보면 친적들이 얘기하는 사회성도 결국은 세속적인 허영과 허세에 불과하다. 차기 UN총장이라는 대사에서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들의 허세에..)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친구도 자신의 드럼 연습의 몰입을 위해 차갑게 잘라낼 정도로 그는 혼자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1차적 사회관계는 단절과 외로움속에서 형성되어 있으나, 그의 삶 자체는 철저히 사회적이다. 즉! 사회의 인정과 명예, 최고가 되고자 하는 그의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철저히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가 최고의 뮤지션이 되기위해, 최고의 학교에 다니고, 그 안에서도 플레쳐(스승)가 지휘하는 최고의 교내 밴드에 들어가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 모두가 사회적 인정을 받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순수하게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냐고? 영화를 잘봐라.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중에 하나일 듯 한데, 기존 영화처럼 음악을 즐겨라! 이 딴 메세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마치 삶의 현실성을 차가울 정도로 잘 보여주고 연출한 공로일 듯 하다. 앤드류는 연주를 하면서 즐기는 표정이 없다. 정말로 손에서 피가 철철 나는 연습만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할 뿐이다. 왜? 인정받기 위해서. (영화상에서 앤드류의 웃음은 몇번 안나온다. 특히 드럼을 연주할때~, 하지만 가장 중요한 웃음은 영화 마지막에 나온다. 그게 중요하다)




 플레쳐- 연습실과 무대라는 두 공간만이 존재하는 자







이 영화를 찍는데 17일밖에 안걸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영화상 나오는 장면이 몇 군데 없기 때문일 듯 하다. 학교와 주인공집. 친척집, 공연장 몇군데.. 즉 영화는 끊임없이 두 주인공의 관계와 열정, 그 변화만을 집중한다.


플레쳐는 오직 실력으로 인해 독보적인 존재이다. 영화초반에 앤드류를 기존 밴드에서 빼내올때 연습도중에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장면은 상식을 초월한다. 기본 매너도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박력과 카리스마는 보는 관객을 압도한다.


여하튼 플레쳐의 개인은 영화상 어디에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최고의 뮤지션을 키우겠다는 광기어린 교사(아니 조련사란 말이 더 어울린다) 의 모습만이 나온다. 그는 오직 연습실과 무대라는 두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그의 개인적 삶은 오직 연습실이고, 그의 공적인 삶은 무대일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 공간은 철저한 폭압과 공포의 수업만이 존재한다. 그의 인격모독을 감미한 새디스트적 수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팀실력을 키워낸다.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그는 무대라는 자신의 공적인 삶의 장에 매너있는 지휘자로 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삶을 끌어내는 것도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달려있는 셈이기에 그조차 무대에서는 젠틀할 수밖에 없다. 


바로 플레쳐의 이 무대적 삶의 기준이 영화를 반전으로 이끄는 키포인트가 된다. 




* not quite my tempo와 I'll Cue You!!! 사이의 대반전 




not quite my tempo!

앤드류가 갓 들어왔을때 플레쳐는 자신의 템포에 맞추지 못한다며 눈물이 쏙나오도록 모독을 준다. 그렇다. 플레쳐의 템포에 모두가 맞춰어야 하는 것이 이 곳의 절대적 법이었고, 플레처는 자신의 기준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I'll Cue You!!


앤드류 자신이 사인을 줄테니 그 때 따라 들어오라는 것!


 감히 누구에게 하는 소린인가? 


이런 대사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시간의 변화를 통한 앤드류의 자신의 변화도 있지만 결국 이를 가능케한 것은 바로 장소! 의 변화때문이다. 연습실에서 무대로의 변환은 


철저히 정치적인 공간이다.




한없이 정치적인 곳, 무대


사전적 정의에서 보듯이 정치란 결국 '통치와 복종'이다.  연습실에서는 민주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플레쳐 개인의 독재적 공간이다. 그 곳은 밴드멤버들의 복종만이, 플레쳐의 통치만이 가능하다.


무대라고 이 틀이 그냥 변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에서도 그들은 엄연히 지휘자와 연주자의 관계이며, 그 적막함 속에서 실수없이 연주를 해내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의 몫을 다할때 결국 세상은 그들을 칭송하고, 그들의 명예를 높여줄 것을 알기에 그렇게나 채찍질을 감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무대의 주인은 더이상 플레쳐가 아니다. 무대의 주인은 철저히 관객들이고, 그 관객안에는 그들의 명성을 평가할 전문가들이 포진해있다.


결국 플레쳐를 학교에서 잘리게 만든 공연도 '무대위에서' 드럼을 뒤집어 엎고 , 플레쳐에게 달려든 앤드류의 '정치적 액션!'에 의해서다. (물론 앤드류는 이미 광기에 빠져들어 철저히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한 것일테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무대밖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과 무대위에서 피우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이다)  '무대위에서'의 난동으로 관객들은 충분히 우려를 표했을 것이고,이를 계기로 플레쳐의 제자로써 심적부담에 자살한 케이시의 사례도 겹쳐서 그는 학교에서 물러나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드럼을 포기하려한 앤드류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 연습실도 무대도 아닌 그 곳에서의 플레쳐, 그리고 마지막 공연



역설적이게도 드럼을 포기한 앤드류를 다시 살리게 되는 것도 플레쳐이다.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여전히 프로밴드를 지휘하게 된 플레쳐는 자신의 가치관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하며, 최고의 연주자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방식임을 앤드류에게 설명한다. 결국 이 과정에서 앤드류는 다시 드럼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는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 마지막 무대에서 플레쳐가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즉 자신을 쫓아내게 만든 앤드류가 다시는 이 바닥에서 성장하지 못하도록 혹독한 망신을 주고자 그를 다시 밴드로 영입권유를 한 것이었다.


플레처가 거듭 강조하듯이  무대를 통해서 연주자들은 음반계약을 하고, 유명인사가 될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영원히 이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타격이 크다고 했다. 왜냐하면 평론가들이 그들의 실수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때문이다. 결국 플레쳐가 앤드류에게 복수하는 방법도 결국 '무대'라는 '정치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는 



 I'll Cue You!!


앤드류는 플레처의 악독한 복수방법에 걸려들었다. 위플레쉬를 연주할거라 믿고 왔는데 처음듣는 신곡을 지휘함으로써 앤드류의 드럼은 버벅대면서 완전히 합주를 망쳐버린다. 이제 영원히 무대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삶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영화상 그가 드럼을 접었던 상태였다하더라도 그가 위대한 연주자라면 분명 언제든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플레쳐는 그 싹조차 잘라내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위로를 뒤로하고 다시 무대로 오른다.


그렇다. 그의 삶은 사적공간이 아닌, 공적 공간에 있다. 관객의 인정과 사회의 인정, 즉 민주적 공간에서의 인정에 달려있다.


드럼이 합주에서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리듬이고 템포다.


지휘자와 상관없이 그가 연주를 시작할때, 모든 권력관계는 뒤바뀐다.


지휘자인 플레쳐는 분노해도 분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인, 즉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눈뜨고 지켜보는 그 공적 공간에서 플레쳐는 앤드류의 리드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앤드류를 따라가지 않으면 둘다 영원히 이 바닥에서 끝일 것이다.




저항과 복종을 넘어서, 하나의 사운드가 된다는 것


그러나 앤드류의 속주는 플레처를 변화시킨다. 즉 누가 누구를 복수하는가!라는 


관계는 더 이상 아무의미가 없는 순간이다. 플레처가 앤드류를, 앤드류가 플레처를 엿먹이는 관계가 아닌, 그들의 공동의 목적, 공동의 꿈인 위대한 재즈의 전설이 되는 것, 그 순간에 와닿아있음을 서로가 직감했을터이다. 


그리고 플레처의 지휘와 앤드류의 연주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영화상 앤드류의 처음보는 행복한 미소가 활짝 나타난다. 누가 이끄는 가가 아닌,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호흡이 되어가면서 마지막 곡 '위플레쉬'의 합주가 시작되며 앤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 마지막 연주장면은 단순히 '드럼 잘친다' 혹은 '와 개반전이네' 정도의 감탄 이상을 준다. 즉 예술을 통한 '승화'의 기분이 바로 이런거다를 보여주는 것, 장인이라 부르던, 마에스트로라 부르던 간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고, 그 현장에 있는 '관객'들도 그 '경지'에 참여해서 하나될 수 있음을 놀랍게도 영화라는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생뚱맞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여기서 보인다.


이 영화를 끌어가는 두 주인공은 앤드류와 플레쳐이다. 하자만 이 둘은 자신의 사적공간에서의 치열한 연습과 연습,연습을 거쳐 결국 무대로 오르기 위해 존재한다. 즉 관객들이 있기에 연주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 연주자들간의 정치적 관계, 힘의 역학관계는 결국 관객이라는 절대 권력앞에서 언제나 의미없는 싸움이 된다. 즉 플레처와 앤드류, 혹은 연주자들간의 권력관계가 어떠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들이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어떠한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가 되어야만 하고, 그것이 균형이든, 승화든, 초월이든, 경지든 간에 그 환상적인 경험을 관객에게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훌륭한 연주자는 커녕 합주도 전혀 안되는 쓰레기에 불과한 수준인지 모르겠다. 각자의 이해관계, 힘의 세습과 학연 지연등 온갖 문제가 다 산적해 있기에 발생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엉망인 결과물을 내어들고 있는 것은 관객의 존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적 역학관계를 그들 내부에서만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관객에게도 해당되는 소리다. 관객이 스스로 자신의 힘이 어느정도인지를 자각하는게 우선이다. 엉망인 공연과 악단은 관객의 힘에 의해 해체시켜야 하고, 다시 새로운 팀을 꾸리면 그만인 것이다. 어떠한 천재 아티스트도 대중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이 없으면 아무도 그가 천재인줄 애초에 모르고, 아무도 들어주는 이도 없다. 우주가 듣는다고? 웃기지 마라, 자연은 인간의 최상의 음악도 수준낮은 유치원 송에 불과하지도 모를테니 말이다.


한국 정치인들도 웃기지 마라, 관객이 아직 버젓이 객석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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