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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l 08. 2020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본 [롤즈의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본 [롤즈의 정의론]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에 있어서 롤즈는 명확한 원칙을 제시한다. 즉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의 동의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 원칙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집단의 삶을 지배할 원칙을 정할 때,혹 법을 정할 때 어떤 원칙을 따라서 사회계약을 해야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계약을 제시할 것이다. 갖가지 도덕적 신념.사회적 지위가 반영된 선택을 말이다.

그러나 가장 공정한 원칙합의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회적 위치를 갖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을 가정해 봐야 한다. 즉 ‘무지의 장막,(무지의 베일)’뒤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일시적으로 전혀 모르는 상태를 가정했을 때, 자신의 계층,성별,인종,민족,정치견해,종교적신념은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남보다 유리하고, 무엇이 내게 불리할지를 모르는 상황이 되는데, 이는 자신의 건강,교육수준,집안재력 등이 어떻게 정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실제 현실은 전혀 이런 상황이 될 수는 없지만, 무지의 장막을 굳이 도입해서 적용하는 이유는 이 방법이 가장 공평한 분배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지의 장막 뒤에서는 모두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 즉 위치가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총 쾌락을 위해서 일부 소수의 고통은 눈을 감는 공리주의를 택할 것인가? 자신이 소수의 고통을 느끼는 위치가 될 수도 있기에 공리주의를 택하지는 않는다. 자유지상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장 가난한 계층으로, 가난한 국가의 빈민으로 태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에 자유지상주의원칙으로 시장경제논리를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롤즈는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언론의 자유,종교의 자유와 같이 기본자유를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누린다는 원칙이다. 이런 자유의 평등은 사회의 공리나 일반행복보다 앞서는 토대적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경제적 평등과 관련하여 불평등이 현실적으로 인정되려면 그 사회의 이익이 사회의 최소수혜자(가장 어려운사람)에게 돌아갈 때만 가능하다는 조건원칙을 내건다.즉 최소수혜자의 상황이 개선되는 과정일 때라면 불평등이 축소되고 평등으로 나아가는 사회이기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그 때는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롤즈의 정의에 관한 원칙의 타당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계약의 도덕적 한계

-실제 계약상황에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계약의 약속과 합의 그 자체때문인가, 아니면 계약을 통해 발생할 상호호혜성을 통해서일까?

샌델은 한 사람이 가재를 잡은 어부에게 돈을 주기로 하고 계약을 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여기서 첫 번째 계약을 추진한 당사자가 어부가 열심히 일해서 잡아온 가재를 맛있게 먹어놓고도 돈을 내지 않는 상황에서,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서로 한 약속과 어부의 노동을 통해 가재를 맛있게 먹은 당사자의 이익이 근거로 제시될 것이다.

두 번째로 어부가 가재를 잡으러간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서 계약을 취소했다면, 자신은 가재를 맛있게 먹은 이익!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부가 노동이라는 고생!을 했으니 이를 근거로 약속을 이행해야 할까?

세 번째로 어부가 가재를 잡으러 가기도 전에 마음이 바뀌어 계약을 취소했다면, 서로 손해도 이익도 없는 상황이지만, 먼저한 약속이라는 합의 자체를 근거로 들어서 약속이행을 당사자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결국 이러한 예시를 통해서 자율과 호혜의 두가지 이상이 계약상황에 영향을 복합적으로 미침을 알 수 있다.문제는 현실에서 이 두가지의 이상이 언제나 일정한 방법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합의만을 강조했을 때의 문제

만약 계약을 하게되는 두 당사자사이에서 한 쪽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면, 부당한 계약을 하게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악덕 상인이 물가를 모르는 할머니에게 부당한 금액을 청구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경우 자발적 동의로 서로 계약한 것이니 정당한 거래라는 주장은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즉, 자발적 합의라는 것 만으로는 계약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샌델은 이와같은 예시를 제시하면서 합의는 도덕적 의무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좀더 논의를 확장한다. 즉 합의하지 않았더라도 도덕적으로 호혜원칙을 주장할 수도 있는 상황이 그러하다.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상황(호혜성만을 강조하는 문제)

데이비드 흄은 자신의 집을 임대했는데, 임대사용자가 집의 시설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공을 불러 수리를 했고, 그 청구서를 흄에게 보냈다. 물론 사전에 흄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황이기에 흄은 부당한 계약이라며 지불할 의무가 자신에게 없음을 주장했다. 반면 세입자와 수리공은 어차피 고장난 시설이었고, 꼭 고쳐야만 생활이 가능한 사안이었기에, 이미 수리공은 자신의 노력과 기술을 통해 그 이득을 결과적으로 집주인 흄에게 누리게 한 셈이므로 호혜성을 근거로 지불을 계속 요청했다. 이 역사적 결말은 흄의 패배로 끝났는데, 결국 자발적으로 쌍방이 합의한 계약이 아니었음에도 호혜성을 근거로 계약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혜성만의 강조는 되려 시장의 강매현상을 얼마든지 부추길 수 있다. 구두닦이가 지나가는 사람의 구두를 허락없이 닦으면서 자신의 노고와 깨끗해진 구두의 호혜성을 근거로 지불을 요청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익인가합의인가?

적어도 샌델은 롤즈의 사상을 설명하면서 도덕적 의무가 합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호혜성을 함께 따져야 한다며 의무의 적용범위를 넓게하고 있다. 즉, 현실적 계약상황을 고려해서 이러한 원칙을 찾아가는 것이다. 현실의 계약상황에서는 합의를 한다고 해도 누군가 비대칭정보를 갖고 있어서 크게 유리할 수 있고, 정보가 없는 쪽은 손해, 사기를 당할 수 있다. 정보가 아니어도 힘과 권력에 의해서도 부당한 계약이 가능하다. 즉 서류상으로야 합의이고 계약이지만 공평함이 철저히 배제된 계약이 자발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부당한 현실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롤즈는 ‘공정한 계약인가, 두 사람이 무엇에 동의했는가’를 항상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즉 힘과 지식,재산이 완전히 동등한 두 사람이 계약을 한다면 적어도 어떠한 불공정 요소가 계약에 끼어들 수 없게 된다.

결국 롤즈는 인간의 현실적인 계약,법,합의가 항상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를 정당화하려면 언제나 공평성을 따져야 하며, 이 방법으로 원초적인 평등의 위치를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무지의 장막이 바로 이러한 힘과 지식의 평등을 보장해준다.


*정의의 두가지 원칙

롤즈의 주장대로 정의로운 계약을 위해서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합의를 끌어낸다면 어떠한 원칙들을 선택할 수 있을것인가?

일단 공리주의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모든 인간은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존중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데, 자신이 민족,종교,에 있어 소수집단으로 속하게 된다면 다수의 이익을 위해 무조건적 희생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공리주의의 쾌락원칙의 총량 때문에 희생되는 소수를 누구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의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권!을 평등하게 누려야 함을 기본원칙으로 주장할 수 있다. 이 원칙은 만인의 행복보다도 우선시되어야한다. 즉 사회,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기본권리와 자유를 희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발생상황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여기서 롤즈의 차등원칙이 도입되는데, 이는 사회의 가장 큰 약자계층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의사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주되, 이 이익을 통해 가난한 시골지역의료 서비스가 개선되었다면 이는 차등원칙에 적합하다. 반면 의사의 보수가 증가하는데 정작 베벌리힐스같은 부유층의 성형수술만 늘어난다면 이는 롤즈의 차등원칙에 적합하지 않다.

롤즈는 이러한 차등원칙이 사회의 기본구조와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빌게이츠가 돈을 최고로 버는 만큼 이사회가 충분히 사회적 약자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구조가 되어있냐는 것이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어가는데 누진세는커녕 역진세를 도입한다면 이는 철저히 차등원칙에 어긋나는 사회인 것이다.

혹자는 아무리 무지의 장막이라도 결국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차등원칙보다는 자신이 부자가 되어 태어나는 것을 기대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심!조차도 무지의 장막 뒤에서는 알 수가 없다. 즉 모험심이 있다는 가정조차 모른 채 사회의 기본원칙을 정하는 것이기에 롤즈는 공평한 합의를 끌어낼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이 원칙의 토대에는 소득과 기회의 분배가 도덕적 관점에서 결코 임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강하게 베여있다.


도덕적 임의성 배제논리

먼저 타고난 환경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기에 삶의 전망이 이러한 임의의 현실,우연적 현실에 좌우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실제로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기회균등은 주장을 한다. 시민들은 기본자유를 부여받아 자신의 최선을 다했을 때 시장에서 소득과 부의 분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서 이러한 공정경쟁의 기회조차도 균등하지 않게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모든 사람에게 경기에 출전할 기회를 평등하게 준다고 해도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면 그 경쟁은 이미 불공정하여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 이미 교육자집안에서 태어난자와 막노동으로 힘들게 살아온 부모님 밑에서 자라온 자의 경쟁이 공평하게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재정적인 차이는 결정적인 불공정경쟁의 역할을 부추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바로 잡는 것이 공정한 능력위주의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된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출발선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까지 오면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인가? 롤즈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즉, 출발선이 아무리 같아도 ‘타고난 능력과 재능’ 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원래 공부를 잘하기위해 뇌가 발달한 아이도 있고, 공부외의 것에 발달한 아이가 있는데, 그 현실사회가 공부잘하는 사람을 키워주는 사회라면 이러한 타고난 재능도 불평등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롤즈의 주장은 지나친 평등주의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롤즈는 무조건적인 강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롤스는 차등원칙을 통해서 재능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도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능력을 더욱 격려하고 개발할 환경을 만들어주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얻게되는 이익을 공동체 전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강한 평등에 대한 사고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혜택을 받은 사람은 그들이 누구든,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한다는 전제에서만 자신의 행운을 이용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그렇다,롤즈는 재능조차도 행운!으로 본다)“


1.봉건제도, 카스트 제도: 출생에 따라 정해지는 계층

2. 자유지상주의 :기회균등을 인정하는 자유시장

3.능력위주: 공정한 기회균등을 인정하는 자유시장

4.평등주의: 롤즈의 차등원칙


롤스는 앞의 세 이론이 출생,사회적, 경제적이점과 타고난 재능과 같은 임의의 요소에 따라 분배몫이 결정되는 사회이기에 공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차등원칙만이 우연에 좌우되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롤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 두가지를 알아보자.


반박1: 격려금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사회구조가 세금을 높이고,임금격차가 줄어든다면 능력과 부를 갖고 있는 자들이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고 능력개발을 스스로 포기하여 사회전체에 해악을 미치는 결과가 오지 않겠냐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롤스는 차등원칙도 격려차원의 보상금으로 생긴 소득 불균형은 허용한다고 말한다. 즉 소득격차를 부인하고 절대평등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격려금이 매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불균형이 정당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노력을 이끌어내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고경영자나 유명선수가 공장노동자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항상 유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반박2. 노력,

롤스는 타고난 재능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의를 능력위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부자들이나 운동선수,스타들은 분명 수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롤스는 이러한 노력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롤스는 그 노력자체는 인정하지만, 노력조차도 가정환경의 산물일 수 있음을 과감히 주장한다.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다’

게다가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정작 이 사회가 노력만으로 되지는 않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즉 분명 누군가는 마이클조던보다 더 열심히 연습했을 수 있다. 조던이 연습을 게을리 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조던보다 더 노력했음에도 전혀 스타가 되지 못하고 무명으로 선수시절을 끝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부당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오늘날의 사람들은 노력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회에 기여한 내용과 업적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자격 거부하기

재능의 도덕적 임의성, 즉 재능조차 우연의 산물이어서 도덕적 칭송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롤스의 주장에 이르게 되면 결국 분배정의는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존에는 정의는 미덕을 기준으로 했었다면 이제는 공정성을 기준으로 하는 정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도 노력할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롤스는 도덕적 자격과 자신이 ‘합법적 기대를 요구할 권리’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낸다. 자격과 달리 합법적 권리는 특정한 게임이 정해진 후에 발생하지, 애초에 게임규칙을 정하는 것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내가 만약 복권을 사서 당첨이 되면 돈을 받을 권리!는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첨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복권은 확률게임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구나 당첨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롤스는 자신의 분배정의를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에 두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기는 합법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에 두고 있다.즉 정의원칙에 따라 자기가 벌어들인 정당한 수익의 권리는 발생하지만, 그 수입의 일부를 합의된원칙에 따라 최소수혜자를 돕는다해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겼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롤스가 도덕적 자격을 분배정의의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재능이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고난 부분, 환경적 부분의 영향도 강력하여 임의적 측면이 있다. 둘째, 특정한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두는 자질 역시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 당시 사회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받는 대우가 다르다. 예를들어 박명수의 개그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인기는 천차만별이다, 바로 사회의 유머기준이 바뀐 것이다. 즉,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타서 인기를 누린다면 이것을 전적인 자신의 재능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10년 전에 유행했던 농구대잔치가 지금은 시들하다. 그 때 활동했던 스타들의 농구실력이 지금의 후배들보다 몇십배나 뛰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농구를 대중들이 좋아하던 시대에 활동했던 나름의 특혜를 얻은 셈이고, 지금의 농구선수들은 아무리 잘해도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해 빚바랜 재능이 되는 일이 허다하다.


삶은 불공평한가?

롤스의 평등원칙에 대해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프리드만은 반대를 한다. 불공정한 상황은 인정하지만, 오히려 불공평과 더불어 사는법을 터득하고 그 결과 생기는 이익을 즐기라며 의도적인 분배를 반대하는 것이다.슈퍼스타의 재능을 즐길 대중의 권리도 중요하기에 그들의 차등적 수익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러한 즐거움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예를든다.

그러나 롤스는 이에대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며 비판한다. 자연의 분배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단지 그것을 다루는 제도가 불공정과 공정의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다.따라서 롤스는 이러한 불공정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자신에게 임의적으로 주어진 혜택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함께 동의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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