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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l 09. 2020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2편

전경갑 저 [욕망의 통제와 탈주]요약

자본주의와 파시즘

결국 그들은 두 책(안티오이디푸스와 천의고원)을 통해 파시즘을 비판하는데, 여기서 파시즘은 히틀러같은 역사적 파시즘이 아니라 우리시대 자본주의적 파시즘을 의미한다. 즉 우리 내면의 파시즘, 일상적 사고와 행동에 스며들고 스스로 착취하게 하는 파시즘을 비판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 착취하고 억압하는 권력을 욕망하는가. 결국 이는 정치철학의 근본문제이자 욕망의 왜곡의 관점으로 봐야한다.  욕망의 동원측면에서 보면 전체주의적 통치와 파시즘은 구분된다. 스탈린식 전체주의적 통치는 경직성과 획일적 총체화의 표본이며, 욕망의 탈주를 철저히 봉쇄하는 거시적 현상이다.

 성적으로 억압된 사회구조가 왜곡된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가져와 파시즘이 생겼다고 보는 라이히의 분석을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인정한다. 기존의 맑스주의는 파시즘을 그저 대중의 무지로 설명해온 것에 대한 비판에서 말이다. 한편 그들은 객관과 주관, 합리와 비합리의 이원적 대립을 벗어나서 라이히가 비합리적이라고 본 욕망의 생산이나, 합리적으로 본 사회적 생산 모두 동일한 본질의 상이한 양태로 보았다. 즉 중요한 것은 욕망의 무의식적 리비도가 투여되는 양식이라고 보았다.(스피노자) 욕망의 무의식적 리비도가 경직된 구조의 틀을 탈주하는 탈영토화운동에 투여되면 분열증적, 분자적 투여라고 볼 수 있고,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을 위계적이고 구조화된 질서로 조직하는데에 투여되면 편집증적, 몰적투여라 할 수 있다.

 분자적 현상은 욕망하는 기계같은 미시적 단위들과 관련되고, 몰적 질서는 유기체,사회체 같은 거시적 기계와 관련된다. 이는 단순한 규모의 차이가 아닌 대중이 분자, 계급이 몰적구성인 것처럼 조직의 양식에 따라 다르다.즉 몰적인 사회적 생산이나, 분자적인 욕망의 생산은 조직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은 동일하다.

 따라서 리비도는 사회적 장에 아무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투여가능하다고 보고, 파시즘의 출현 또한 히틀러가 대중을 성적으로 흥분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의 선동적인 선전효과에 대중적 욕망의 흐름을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단절시켜 거대한 사회적 집계로 재영토화한 셈이다. 따라서 이는 이데올로기 효과가 아닌, 그보다 심층적 층위에서 작동된 욕망의 도착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을 동원하고 단절시키는 그 힘이 파시즘의 억압적 기계를 작동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파시즘은 부락,학급,농촌,청년등 다양한 미시적 분자적 단위에서 발생하는 만큼 고유성과 자율성을 갖으면서도 거시적 집계로 '공명'시키는 유연성, 욕망의 흐름을 봉쇄하지 않고 강력한 탈주선을 스스로 만든 후 스스로 가차없는 파괴와 죽음의 흐름으로 전환시켜버린다. 따라서 파시즘이 위협적인 이유는 전체주의 권력의 가시적 폭력때문이 아니다. 바로 사회적 암세포처럼 분자적,미시정치적 메커니즘에 의해 대중의 욕망을 왜곡시키는 마력 때문인 것이다.

 결국 파시즘을 출현시킨 힘은 우리 내부의 욕망이고, 억압받고자 하는 왜곡된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것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권위주의적 정치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행동속에서 움트는 파시즘, 자본주의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왜곡된 욕망의 파시즘을 비판하는 것이다.

 

분열증과 미시정치학


 자본주의는 생산과 교환, 욕망의 흐름을 구속해온 전통적 코드와 가치관을 탈코드,탈영토화하는 만큼 엄청난 분열적 에너지를 생성시킨다. 그런데 이 욕망의 흐름을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등가성의 논리로 다시 재코드화시키고, 국가,법,종교,교육,가족등의 제도로 재영토화한다. 분열증과 편집증의 교차.

 자본주의는 분열증과 편집증이라는 두 극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자본주의 흐름을 벗어날까 하면, 새로운 공리를 추가해서라도 탈주의 흐름은 차단하려 하기에 그 통제효과는 이전사회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자본주의는 자유를 표방하는 새로운 억압이라는 점에서 노동자에게 자유를 주는 동시에 효과적으로 착취한다는 맑스의 관점과도 같다. 그러나 맑스는 해방과 소외의 역사를 의식적 생산노동에 입각해서 설명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의식적 욕망의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비판정신을 계승하되 이를 니체적 관점에서 재개념화 한 것이다.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나타나는 분열증은 결국 자본주의의 삶의 조건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으로 탈코드화된 심적상태'로 볼수 있고 이는 억압적 제도, 초자아, 삶을 고양시키는 욕망을 왜곡시키는 오이디푸스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심적상태이기도 하다.  그들은 바로 이 분열적 흐름에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분석하는 것을 '분열증분석'이라고 명명했다.  이 분석은 우선 정신분석에 대해 비판적인데 정신분석이 욕망을 억압하고 분열적 흐름을 재영토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오이디푸스과정을 통해서 욕망이 사회적 장에 투여된다고 본다는 점. 즉 프로이트는 상징적 표상체계에 동화된 욕망으로, 라깡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으로 본다는 점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상실시킨다고 보았다.

 결국 분열증 분석은 욕망의 흐름을 몰적집계로 재영토화하려는 편집증적, 파시즘적 조작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주체, 분열적 주체의 출현가능성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과정을 차단하는 혁명적 전략보다는 탈영토화 경향과 분열증적 경향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가속화시키려는 역설적 전략을 짠다.  몰과 분자간의 대립을 넘어 노마드라는 삼원적 관계까지 확장하여 리좀적 사고방식을 도입한다. 기존 서구사상전통이 수목형 모델이라고 보고 비판했으며 그 대안으로 근경적, 리좀적 사고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이는 현대적, 탈현대적 사고방식의 은유로 이해해야 한다.

 수목형 모델은 모든 현상의 제1원인처럼 궁극적 근원, 뿌리를 찾고자 하는 기존 서구사상을 대표하는 은유이다. 이러한 모델로는 현상들간의 차이나 다원성을 이해할 수 없고, 그저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폭력을 보여줄 뿐이다.  신학과 철학,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촘스키의 언어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모두 수목형적이다.

반면 리좀은 땅속으로 뻗은 줄기를 뜻하는데 이는 곧 뿌리이기도 하다. 뿌리와 줄기의 구분이 사라진 리좀을 반수목적 사유의 은유로 활용한 셈이다. 따라서 중심이 없고, 비위계적이며, 일자에 환원될 수 없는 다원성을 제시한다. 게다가 무작위적이고 불규칙적인 그물망을 이루어 다양한 접속도 가능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고원에서 우리의 삶을 선으로 개념화하는데 경직된 선, 유연한 선, 탈주의 선으로 구분한다. 즉 몰과 분자, 노마드 순으로 접목되는 것이다.  사회도 상호내재적으로 관련된 이 세가지 선으로 이루어진 가변적인 배치로 개념화할 수 있다. 즉 기존의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주체를 구조에 의해 부여된 역할,위치로 보는 기능론이나 구조론적 관점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즉 개인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유동적으로 본다.

 첫째 경직된 선은 사회제도를 표준화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구성하는 몰적 선이다. 욕망의 흐름을 코드화하고 영토화하는 선, 사회질서에 기여할수 있으나 그 특유의 선택과 배제로 억압적권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둘째 유연한 선은 제도적으로 형성된 개인의 정체성에 균열이 생길때 느끼는 분열성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분열적 흐름만으로 혁명적 인 것으로 동일시했으나 천의고원으로 넘어오면 분열적 흐름을 탈영토화하는 측면만 있는것이 아니라 다시 봉쇄하고 경직된 선으로 회귀하는 재영토화로 작용할수도 있는 이중적 상태로 개념화한다. 즉 유연한 선은 경직된 선과 탈주의 선 사이에서 동요하는 위치이다.

 셋째, 탈주의 선은 극단적으로 탈영토화되고 탈코드화된 흐름을 상징한다. 사회구조,질서를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새로운 접속을 추구하는 욕망의 능동적 에너지를 탈주의 선이라 한다. 다만 탈주의 선은 창조적일수도 있고, 파괴적일수도 있다. 미시적 파시즘이 바로 왜곡된 탈주선이라 볼수 있다.

 전체주의적 통치는 경직된 선이고 중앙집권적, 획일적, 총체화이다. 한편 파시즘은 미시적, 분자적이며, 각기 고유한 특성과 자율성을 견지하면서 끊임없이 상호교류하는 미시정치적 현상이다. 전체주의국가는 탈주선을 원천봉쇄한다면 파시즘은 강력한 탈주선을 형성하고 가차없는 파괴와 죽음의 선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파시즘은 분자적이고 미시정치적인 매커니즘에 따라 대중의 욕망을 왜곡시킬 수 있기에 위협적이다. 소비사회 및 미디어 사회는 욕망의 무의식적 흐름을 차단하지 않고 탈코드,탈영토화하여 욕망의 흐름을 한 껏 해방시키는 동시에 탈영토화된 흐름을 포획하여 자본주의 현실원칙에 예속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분명 파시즘적이다. 즉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미시적으로 분자화하는 동시에 몰적 집계로 통합한다.

 게다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정당,노조같은 영토에 대중의 능동적 욕망을 포획하여 재영토화시키는 반동적 작태를 비판한 것이다.

 결국 미시정치학의 과제는 분자화된 파시즘과 대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목형적 사고틀에서 벗어나 제도에서 호명하는 자리를 벗어나 탈주의 선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탈주의 선 자체가 해방적인 것은 아니기에 기존의 경직된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되 새로운 예속으로 초코드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거듭나고 변화하는 주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탈주의 주체

 

결국 들뢰즈와 가타리의 현대사회비판은 푸코,마르쿠제의 비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안이 분명치 않았다. 또한 권력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한 푸코와 달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우선성을 부여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끝없이 탈주하는 욕망자체의 본질적 속성에 근거해 권력에 저항하고자 했다. 다만 욕망의 흐름이 항상 해방적실천에 투여되는 것이 아니기에 탈주의 주체를 개념화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모든 유형의 수평적,수직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능력을 가진 주체가 필요하다. 횡단성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변혁의 주체가 된다. 기존 가치에 속박되지 않고 확립된 기존가치를 문제삼을수 있는자. 자본주의 공리체계를 벗어나고 그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새로운 주체성, 유목적 주체.

 단, 욕망의 본질을 의식적 주체가 아닌 기계적 흐름으로, 유물론적 욕망개념으로 주장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이 맞다면 끝없이 탈주하는 주체의 노력은 의식화되지 않을수 없기에 둘이 조화되기 어렵다는 한계점이 있다.

 

 요약과 평가

 

결국 욕망은 정착이 아닌 유목, 인격적 주체가 아닌 기계적 흐름, 결핍이 아닌 생산적 흐름,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 흐름, 그리고 분열적 흐름이라는 점에서 기존 욕망이론과는 다른 유물론적 욕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적인 탈영토화과정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가속화시켜 자본주의 병폐를 내파시키려 한다. 따라서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하자는 주장을 거부하고, 오히려 범세계적 자본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되는 분열적 과정을 극단화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탈영토화,탈코드화된 욕망의 분열적 흐름을 자본주의 현실원칙에 다시 재코드화시키려는 편집증적 경향을 방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들 주장의 한계점으로 첫째, 탈주의 주체를 설득력있게 개념화하기 어렵다. 탈주의 주체는 의식적일수 있는가? 그들의 원래 주장은 욕망의 기계적 흐름이기에 변혁해나갈 주체를 설정하려면 다시 의식있는 주체를 불러와야 하기에 모순점이 생긴다.

둘째 욕망의 다원성과 복수성을 강조하면서도 다원적 욕망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 왜 혁명적 욕망이 반동적 욕망보다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할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이다. 즉 차이와 다양성은 강조할수는 있겠지만 다양한 욕망들의 가치위계를 주장할수는 없게 된다. 결국 기준의 해체를 가져오는데 이는 자칫 상대주의를 넘어 회의주의와 혼란을 가져올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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