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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l 08. 2020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1편

전경갑[욕망의 통제와 탈주] 중에서



이론적 위상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그들은 기분좋게 해놓고 정작 주머니를 털어가는 소비자본주의의 이중적 면모를 혼을 빼가는 사회라면서 비판한다.

 주체의 해체를 선언하고 반인간주의를 제시했던 기존의 데리다,보드리야르,라캉, 푸코등은 정작 변혁의 가능성, 대안에 있어서는 매우 회의적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물론적 욕망이론은 포스트모던 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변혁의 이론적,실천적 가능성을 탐색하였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하버마스처럼 소통적이성을 통해 대안을 제기한 방향성도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성이 아닌 욕망의 열정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갈구하는 광기어린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이성을 통한 해방보다 감성의 역동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들은 '분열적 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광기는 정신적 병리의 의미라기보다는 역경과 시련, 유혹과 경직된 구조적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니체적 의지의 신들린 열정으로 해석해야 한다.

암울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증한 의식보다는 무의식적 역동, 냉철한 이성보다는 출렁이는 감성, 인지적 능력보다는 정의적 열정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고원


 여기서 그들의 이론적 위상은 탈현대적 이론이라기 보다 탈형이상학 이론이고, 동일성 이론과 의식철학을 거부하는 포스트형이상학이론이면서도 변혁의 가능성에 회의적인 포스트모던과는 또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그리고 변혁의 가능성에 있어서도 욕망의 열정에 기대를 둔다는 점에서 소통적 이성을 강조하는 하버마스와 다시 거리를 둔다.


 -주체개념을 거부하고 의식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해체한 라깡에 동의하는 한편 실재의 갈등과 대립의 이질적 특성을 종국에 신학적 통일성에 흡수하는 헤겔의 변증법에 반대한다. 그 대안으로 니체의 계보학을 가져오는 데, 이는 푸코와도 동일한 지점이다.

단 푸코는 모더니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데 비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특유의 역동에 따라 해방된 욕망의 에너지를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마르쿠제의 역승화와도 결을 달리한다(그는 욕망을 해방시키는 자본주의 현실원칙 자체가 억압적 역승화로 보았다)

푸코가 지식과 권력의 연계로 형성된 비가시적 통제장치가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 확산된 모더니티의 억압적 측면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담론을 통해 욕망의 에너지가 갖는 그 특유의 능동성과 생성의 힘을 상실하고 식민화된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욕망의 시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은 만족을 모르는 자본의 욕망과 그것에 호락호락 호명당하는 인간의 욕망을 문제삼는다.

예시)오늘날 여성의 화장. 여성의 얼굴은 욕망이 등록되어 자아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욕망은 여성 개개인의 욕망이 아닌 더더욱 가꾸고 싶도록 유도된 욕망이다. 본래의 꾸미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그 이상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역사적 구성물의 문제인 것이다.  그 유도된 욕망의 주체는 결국 여성도, 모델도, 방송국도, 자본가 개인도 아니며, 진정한 주체는 주체불명의 주체고, 자본의 생리와 그 운동법칙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국 이 중간의 매개자들은 모두 가치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운동의 역할 대행자일 뿐인 것이다. 결국 자본의 욕망은 인격적 주체나 의식적 주체가 아닌 셈이다. 그래서 이 같은 욕망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기계적 흐름'이라 불렀다. 화장 예시에 나왔던 여성 얼굴에 상륙한 욕망의 분열적 흐름은 정착민이 되는 걸 거부, 경직성을 비웃으며 남성,여성의 이원화를 넘어서고, 자유롭게 가로질러 남성의 육체에 상륙하여 남성용 화장품 코너를 만들어낸다. 결국 욕망은 본질상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적 흐름이다.

 이러한 욕망은 산 사람 뿐만 아니라 장례 이후의 서비스도 만들어낸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마저 자본의 욕망을 실현하는 지형으로 개간한다. 스마트폰의 확산이 이를 증명한다.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셈이다.  스마트폰 그 쓰임새 자체는 지금 시대에 필요하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 필요없는 청소년이나 초등학생까지도 모두 소유하도록 만드는 힘은 자본의 욕망에 있는 것이다. 통신수단이 목적이라기 보다는 스마트폰 자체를 소유하고 탐닉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나아가 지식산업, 여가,문화산업 등 일상으로 확장되어 가는 자본의 욕망이다. 예전같은 경제적 영역만이 아닌 일상적 삶의 모든 영역을 자본의 욕망은 침투한다. 결국 욕망의 본질적 속성은 유목적 성향이며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격하게 흘러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욕망의 흐름을 기계적이라고 했고, 자본은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유물론적 욕망개념


 전통적으로 욕망은 결핍으로 생각되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망의 헤겔, 상실된 대상에 대한 환상적 원망충족으로 파악한 프로이트,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 간의 괴리로 인한 영원한 결핍으로 본 라깡등 욕망을 결핍으로 생각했다. 즉 결핍된 것을 획득하려는 심적 역동으로 본 셈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쇼펜하우어,니체의 욕망이론은 전통적 관점과 다르다. 들뢰즈는 특히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가타리는 정신분석이론을 배운 정신과의이자 맑스주의 정치활동가였다.

따라서 안티오이디푸스에서 헤겔,하이데거,후설의 현상학적 관점과 소쉬르,레비스트로스,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관점을 동시에 극복하는 탈구조주의적 욕망이론을 제기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물론적 욕망이론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욕망은 결핍이 아닌 무의식적 에너지의 능동적 흐름이다. 스피노자나 니체가 주장한 신체적,생물학적 욕망개념과 같은 물질적 에너지의 흐름이다.(유물론) 즉 후기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전통적 관점은 관념론적 전제가 깔려있고,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고 해서 비판가능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비도 개념은 생물학적 개념이고 실재계에 근거하는 것이다. 결국 욕망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결핍을 욕망의 원인이 아닌 결과로 본 스피노자를 긍정하고, 능동적 힘과 권력의지를 예찬하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둘째, 욕망은 무의식적 흐름이며, 기계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이들이 기계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전통적으로 따라다니는 인격적 주체개념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그들은 욕망을 기계적이라고 하면서도 결코 은유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욕망하는 기계, 기관없는 신체, 자본주의 기계 등등…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 삶의 위협적 심각성을 욕망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비판할 때 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은 욕망의 흐름을 인격성과 무관한 기계적 흐름이라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공학적 기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관하게 작동되는 무의식적 에너지의 유목적 흐름으로 본 것이기에 일면 은유적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욕망은 고정된 표상체계에 구속될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기존 정신분석학의 표상이론, 오이디푸스이론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라는 전인적 인격체가 아니라 유방과 같은 '부분대상'에 투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세대가 아이에게 죄의식을 부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욕망의 본질 자체가 자유롭고 기계적인 생산적 흐름이기에 기존 정신분석처럼 욕망을 억압하고 승화하는 방식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관점을 비판한다. 욕망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다.

·        결국 욕망은 물질적 에너지의 흐름이자 무의식적으로 인격적 개념을 제거하며, 표상체계에도 구속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프로이트의 리비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니체의 의지개념과 유사한 유물론적 욕망이론인 셈이다.


통제의 코드와 영토

 

 정작 이러한 욕망의 특징은 그대로 방치할 때 에너지가 기존 사회질서를 와해시키는데 작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욕망의 흐름을 적절히 통제하고 순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코드화,영토화- 욕망의 흐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과정

 탈코드화,탈영토화- 억압과 통제를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욕망특유의 분열적 흐름

 재코드화,재영토화- 탈주의 흐름을 포획하여 다시 억압하고 통제하는 매커니즘

특히 강도높은 억압과 통제를 초코드화라고 함.

 욕망통제의 양식에 따라서 1,원시사회, 2전제군주사회 3자본주의사회를 범주적으로 구분가능하다.

1원시사회는 다양한 부족들로 이루어진 사회이며 다양한 코드가 존재,공존하기에 전면적 통제는 불가하다.

2 전제군주사회는 모든 것이 군주의 기호하에 예속되는 초코드화라고 볼 수 있다. 전제군주는 스스로를 신성에 연결하고 법률,관료제,,조세,공무,국가사업등 모든 것을 권위에 예속시키는 편집증적 사회라 볼 수  있다.

결국 원시사회에서 전제군주제로 이행하는데 중요한 변화는 군주 개인의 특성과 기능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모인 셈이다. 권력의 정점에 군주가 있고, 전달매개체인 관료기구, 하층부에 서민이 배치된 이러한 구조가 다양하고 수평적 연합이었던 원시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군주에 예속되는 초코드화사회는 편집증적 사회라 부를 수 있다.

3 자본주의사회도 국가사회이기는 하지만 화폐자본의 자유로운 흐름과 이중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출현을 전제로 하여 전통적 가치와 규범에서 해방된 탈코드화사회라고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은 분열증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경제 특유의 역동에 따라 탈코드화된 욕망의 에너지를 변혁에 동원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분열적 흐름을 그대로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장원리라는 자유경쟁의 규범에 따라 재코드화함으로써 법률,교육,관료제, 가족제도를 통해 욕망의 흐름을 재영토화시킨다. (코드는 욕망을 통제하는 규칙과 규범이라면 영토는 통제가 이루어지는 환경 및 제도를 의미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양면성이 있다. 마르쿠제 역시 이러한 이중성을 폭로한 바가 있는데 자본주의가 욕망의 해방을 조장하면서도 정작 창조적 승화를 가로막는다고 하여 해방과 소외의 사회로 비판했던 바,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이에 찬성한다. 탈코드화와 재코드화의 양면성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마르쿠제는 변혁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재코드화와 재영토화의 벽을 돌파할 수 있는 이론적,실천적 가능성을 탐색.제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을 구속해온 기존 전통을 탈코드화하는 반면 다시 자본의 가치증식이라는 1원칙에 벗어나지 못하도록 재코드화하는데 이를 공리계라고 한다. 만약 노동운동이 격렬해져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탈영토화의 흐름이 확산되면 노동자계급에게 단기적 이익을 양보해서라도 자본주의의 1원칙이 가능하도록 공리를 추가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공리계는 매우 탄력적이며 사회통제는 은밀하여 벗어나기 쉽지 않다.



https://youtu.be/S3QageGSN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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