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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ul 13. 2020

한병철의 [투명사회]요약 1편-통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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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총 8개의 투명사회의 하부사회의 케이스들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투명성의 위험성을 변증법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은 철저히 변증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투명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진보적 개념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핵심어휘 중에 하나다. 기존시대를 불투명성으로 비판하면서 서로가 소통하고, 신뢰, 관계성이 회복되는 투명성의 개념을 거시적 화두로써 보편적으로 통용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주요한? 어휘를 한병철은 역설적으로 비틀어 오히려 얼마나 위험한 용어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본인의 주장을 끌어가기 위해서 반대 입장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다시 재비판하는 과정의 방법을 거치고 있으며, 어쩌면 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결론 자체도 독자들은 변증법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소목차 순서는 긍정사회-전시사회-명백사회-포르노사회-가속사회-친밀사회-정보사회-폭로사회-통제사회 순으로 되어있는데, 투명사회의 투명성을 비판하는 취지이듯이 긍정,전시,명백,포르노,가속,친밀,정보,폭로,통제라는 언어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마지막 통제사회를 통해서 정리되는데, 이 글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요약의 순서를 바꿔 통제사회를 가장 먼저 정리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된다.     


 1)통제사회     


 현대의 인터넷 수준을 목도하지 못했던 보드리야르는 텔레비전의 기술 앞에서 기존의 원근법적 공간과 파놉티콘은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했었다. 즉, 절대적인 감시의 기원인 중앙탑과 감시의 대상인 원형의 독방들은 원근법적 구도 안에 들어와 있고, 이러한 일방향적 감시와 내면화된 감시가 근대사회의 위기이자 우려의 측면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푸코는 이런 측면에서 벤담의 판놉티콘을 다시 꺼내들었던 셈이다. 그러나 디지털네트워트의 사회는 판옵티콘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디지털판놉티콘의 사회를 창조했다는 것이 한병철의 견해이다.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비원근법적 파놉티콘은 기존의 중심, 전능한 감시자의 시선을 부정한다. 그리고 중심과 주변의 구별도 사라졌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전방위적으로 도처에서 모두에 의해 훤히 비춰지는 세상이다.


 기존 벤담의 파놉티콘은 규율사회의 현상이며, 감옥,공장,병원,학교를 통해서 드러난다. 감시의 절대적 권력과 시선의 시작점, 그리고 감시당하는 대상은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고립된 상태에서 감시를 내면화한다. 


 그러나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감독관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존재한다. 즉 네트워크화되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 맹렬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한다. 이 과도한 커뮤티케이션은 투명성의 상징이다. 주민들 스스로는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하는 새로운 감옥이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스스로 노출하는 포르노적 과시는 노출증이며, 동시에 상호적 관음증의 특성을 보여주며 인터넷을 살찌우고 있다고 한다. 통제사회는 디지털 판놉티콘의 자발적 노출의 욕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

    

 데이비드 브린은 감시기술의 진보에 직면해서 오히려 모두에 의한 모두의 감시,즉 전진하는 도주의 길을 제시한다. 기존의 비대칭적인 정보의 흐름을 비판하면서 이제는 쌍방향적인 감시와 조명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까지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데이비드 브린의 이상사회는 오히려 비인간적인 통제사회이며, 획일화를 가져온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 보통 감시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래로부터 위로의 역감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투명사회의 논의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반쪽짜리 대안일 뿐이다)     


 저자는 투명성과 권력을 이분화하면서 권력은 비밀,기밀의 영역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즉 상호투명성은 영구적인 감시사회를 가져와 행동의 자유를 제거한다. 자유로운 행동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신뢰라는 가치인데, 투명성의 사회는 신뢰의 공간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셈이다. 사람들은 지배자를 믿고 신뢰함으로써 지배자 역시 일정한 행동의 자유영역을 얻고 일할 수 있는데 투명성의 사회는 지배자의 자유를 착취함으로써 그의 행동을 억압하게 된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 속에서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하는 힘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애당초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지고, 진실성,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투명성의 과다현상에 있는 것이다.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투명성은 강제적으로 집요하게 요구되어 진다.     


 결국 투명사회는 저자 한병철이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주장했던 성과사회의 논리와 같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성과 주체는 노동을 강제하는 외적인 지배구조에서 자유롭고 자신이 자기 주인이며 경영자가 된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오히려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이다. 자신이 착취자인 동시에 피착취자인 사회가 바로 성과사회인데 이러한 자기 착취의 원리는 자기 감시의 투명사회의 원리와 똑같은 논리를 갖는다.   

  

따라서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공동체는 형성될 수 없으며, 오직 공동의 관심이나 상표만을 추구하는 에고의 집합에 불과하다. 즉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이지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능력은 전혀 없다. 집합이 아닌, 무리, 정신이 결여된 가상적 구성체일 뿐이다. 최근 유행하는 소셜미디어 역시 상업과 맞물리고, 자유와 통제가 하나가 되어 사회적인 것은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 전체는 외부가 없는 거대한 파놉티콘에 되어간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구글과 소셜네트워크 역시 파놉티콘적인 형태를 취해가며 자유를 빙자할 뿐 거대한 자발적 감시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맡긴 사람들은 지금도 열렬히 디지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가 통제가 되는 사회, 자유의 변증법이 바로 이 것이다.     


 이와 같은 통제사회의 디지털 파놉티콘은 이 책을 열고 닫는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이제 다시 원래 순서로 돌아와서 긍정사회부터 드러나는 투명성의 문제점을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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