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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ug 08. 2020

한병철의 [투명사회]2편- 긍정사회


2) 긍정사회 

투명사회는 모든 부정성을 거부하며 긍정성을 추구한다. 사물은 부정성을 버리고 아무 저항없이 자본과 커뮤니케이션을 받아들이며 순응할 때 투명해진다. 행위는 조작적, 계산적으로 통제하고 순응하며, 시간은 가능한 현재들의 긍정속에서 평탄화되어간다.  연극적인 연출이 배제되고 포르노처럼 모든 것이 투명하게 노출되어 버리는 그런 이미지의 시대가 바로 투명사회이며 긍정사회의 모습이다. 즉 동일한 것의 지옥이 긍정사회인 셈이다.

다름과 낯섦을 부정하고, 같은 것끼리 연쇄반응하며 최대속도에 도달하는 삶, 시스템의 안정성을 추구하며 획일화시키는 투명사회.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영혼이 살아가려면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혼자있어야 할 불투명의 공간이 필수적이라고 반박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이기에 이 공간까지 비춰진다면 영혼은 불타버리고 소진상태에 빠질거라는 것이다.언어학자 훔볼트 역시 언어의 불투명성이 본질적이며, 어떤 이성으로도 그 현상 이전의 완전한 원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함을 주장한다.

포스트프라이버시의 이데올로기는 사적영역을 거부하며,완전한 긍정성을 강요하지만 거기에는 몇가지 오류가 있다. 일단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할 수가 없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처럼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또다른 무의식적 자기를 갖고 있기에 그렇다. 자기 안에서의 분열과 부정성은 자연스레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틈새를 만든다. 그런데 타자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에서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이 열린다.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이미 타자의 대한 매력을 상실케 한다. 투명성의 강제는 오히려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시각인 것이다. 따라서 적정한 너와 나의 거리의 파토스가 투명성의 파토스를 대체해야 한다. 

개인의 자율성은 타인을 이해하지 않을 자유를 전제한다. 즉 불투명한 평등이 있어야 관계적 활기가 가능하지 그렇지 않은 투명성은 죽은 관계를 만들어낸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완전한 투명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서로의 관계에서 더 알아갈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획일화된 존재가 될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계몽이란 니체적으로 표현했을때 무지에의 의지를 깨달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가 없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니체는 주장했다.

정보는 아무리 많아도 좋은 결정을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는 직관이 더 의미있을 때가 많다.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생산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의 사유도 영감에도 빈자리,빈틈이 필수적이다. 시각의 빈틈이 없다는 것은 포르노와 다를 바가 없으며 빈틈이 없는 사유는 그저 계산적일 뿐이다. 

긍정사회는 변증법의 방법론을 비판한다. 변증법은 부정성을 전제로 하는 사유방식이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성을 촉발하며 정신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러한 부정성의 머무름을 명백하고 빠름을 주장하는 긍정사회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긍정사회에서의 주체는 항상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그저 가속화하기 위한 극단에 처할 뿐이다. 

긍정사회는 부정적인 감정인 괴로움과 고통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임을 부정한채 오직 편안함, 안락함만을 허락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감정까지도 고통없이 즐기기만을 강요하여, 결국 소비와 안락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전락하게 된다.결국 이러한 긍정은 소진,피로,우울한 심리적 장애를 가져올 뿐이다.

이론이란 부정성의 현상에서만 나올 수 있다. 무엇이 속하는지 아닌지를 냉철하게 판단하는 결단,선택이 이론인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론은 폭력성과 구별성을 갖는데, 긍정사회는 이런 사태 자체를 싫어한다. 그저 어마어마한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만으로 이론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인 것이다. 데이터의 알고리즘만으로도 기존의 인과적 이론을 대체한다는 것인데 필자는 이론이 데이터 자료 이전의 근원성이라며 반박한다. 즉 어떤 데이터자료를 모은다 하더라도 이러한 계산적인 실증과학은 이론의 원인이 아닌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으로써 이래저래 이론의 필연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정치분야 역시도 비밀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비밀,기밀이 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며, 그저 벌거 벗겨진 정보덩어리에 불과하여 진정한 정치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실제로 독일의 포스트정치를 상징하는 해적당의 사례는 어떤 가치도 색채도 없는 투명성의 정당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즉 진짜 정당은 색깔이 있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를 긍정하며, 가치에 대한 판단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투명사회의 포스트 정치에서는 해적당처럼 그저 의견만을 갖는 집단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지만, 이는 그만큼 기존정치의 문제, 변화를 마비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그저 있는 것만을 긍정하고 최적화하는 기계적 장치와 공간에 불과하다. 

긍정사회의 상징은 바로 페이스북의 `좋아요'버튼이다. 부정성의 버튼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이 긍정의 디지털 공간은 긍정의 커뮤니케이션만을 추구하며 정보의 양과 속도만을 가치있다고 여긴다.그러나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으로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따라서 진리는 부정성에서만 가능하지 긍정성만이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하다결국 과다정보와 과다커뮤티케이션은 진리의 결핍과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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