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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Nov 29. 2020

[ 한국적 지형에서 바라본 한병철교수의 ‘피로사회’]

들어가며     

2012년에 가장 인상깊었던 책을 꼽으라한다면 나는 단연 한교수의 [피로사회]를 선택할 것이다. 이 얇은 책에 들어있는 주장은 책의 두께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해오던 이분법적인 부정성의 도식을 단번에 깨뜨리는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까지는 나같은 아마추어 인문학도에게는 푸코의 규율사회이론을 현 사회에 접목해보는 것만으로도 신지식이요. 일종의 감동을 주고는 했다. 프로이트,푸코 등으로 이어지는 금지와 억압, 배제의 시대적 고찰이 지금 한교수의 주장을 통해 통렬하게 반박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새로운 분석도구를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현대인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고 있는 질병인 우울증, 소진증후군, 경계성성격장애, 어린아이들에서 자주 보여지는 과잉행동장애 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존의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성과시대에 놓여진 성과주체의 과잉행동을 통한 좌절과 허무함을 통해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수회독을 하고 요약본을 만들면서도 자꾸 생기는 의문이 있다. 바로 이 이론이 과연 지금의 내가 살고, 사유하고 있는 한국적 지형에서 적합한가이다. 물론 일단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내 자신이 이 책의 내용을 보고 감명을 받고 깨닫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이 사회의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었기 때문에 찔림을 받는 것이고, 그 안에서 시원한 원인분석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는 찝찝한 구석이 생기는데, 꼭 한교수의 분석틀로만 한국사회의 우울증 및, 정신질환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다는 반증가능성에 있다. 따라서 이 리포트는 한교수의 피로사회의 핵심내용을 간추리고, 이 내용을 토대로 내 나름대로 피로사회의 보석같은 가치를 한국적 지형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짧은 코멘트를 남겨보고자 한다.     


피로사회 핵심정리

먼저 간략하게 정리된 표 안에 있는 용어들을 근대와 후기근대라는 시대적 차이 안에서 읽어보면 [피로사회]의 핵심적 내용이 모두 이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근대와 후기근대라는 시대적인 사상의 배경지식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표를 통해서 근대를 대표하는 용어들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한교수가 워낙 다양한 사례와 용어들을 활용해서 복잡해 보일뿐 결국은 이분법의 경계적 분열사회에서 현대사회(후기근대)로 어떻게 전환되어왔는지를 논증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서구근대사상은 결과적으로 이성중심의 문명과 문화를 주축으로 타문명과 문화를 배척하고 규제하는 권력적인 성향을 확대,견지해 왔다. 한교수는 이러한 근대성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외부의 박테리아를 항생제를 통해 방어하는 면역학‘의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놀랍게도 사상사의 흐름과 똑같이 인간 면역체계의 기술도 그러했던 것이다. 외부의 침입자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에 대한 연구, 이는 생물학적 질병에 대한 분야든, 거시적인 인간문명과 문화사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온 것이다. 물론 그 중심은 서구의 이성, 서구의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중심의 배제와 억압, 감금의 논리를 계보학적으로 밝혀낸 푸코의 논리를 한교수는 적절하게 배치하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시기적으로 그 전부터 서구사상을 뒤흔든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원리도 같은 맥락에서 배치하고 비판의 대상으로 둔다. 즉, 한교수는 푸코와 프로이트의 분석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두 학자의 분석도구가 오늘날 시대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한 시대의 거대한 패러다임이 지나갔는데, 기존의 분석도구로 얽어 맞추려 한다면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즉 잘못된 분석을 통해 잘못된 대응과 대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기존의 한계를 냉철하게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의미인 것이다.     

 근대사회의 주된 질병은 유형적 증상을 동반한 신경증이었다. 프로이트식으로 분석한다면,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는 초자아의 억압을 자아가 어떻게 견뎌내는가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징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외부의 억압, 칸트식의 도덕적 규율과 양심의 억압이 주체의 행위에 끊임없는 간섭과 스트레스를 만들어내고, 이는 신경증적 증상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후기근대사회는 이러한 억압적 사회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안과 밖의 이분법적인 사유, 공격과 방어, 배제와 제거라는 부정적 폭력에서 벗어난 시대이며, 따라서 나와 너의 경계가 해체되고, 국가와 국가의 국경의 개념이 해체되면서 탈규제, 탈경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관용과 평화를 추구하는 현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우울증의 질병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신경증이 유형적이라면 우울증은 무형적 특성을 갖는다. 오늘날의 인간은 무형적 형태여서 끊임없이 친구맺기가 가능하다. 페이스북의 친구맺기를 생각해보라, 자신에 대한 정확한 유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 수많은 사람과 친구맺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보기에 따라 긍정적 평가로 연결될 수도 있으나, 한교수는 분명하게 부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없기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의 관계성이 가능한 것인데 이는 허구적인 관계일 뿐이다. 어쩌면 실재적인 관계가 아닌, 가상의 관계, 허구의 관계의 양산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주의만 더욱 짙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는 이러한 인간의 실재성을 끊임없이 지워내는 역할을 한다. 현실에 있을 때 우리는 타자의 실재성을 목도하고, 느끼며, 그로인한 부정성을 경험하며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상세계는 실재적 타자를 만나는 곳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나, 곧 나르시스적인 허구적 주체만 가득한 공간 안에서 자기 분열만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르시시즘의 원리를 좀 더 살펴보자. 이전에는 프로이트의 초자아가 되었든, 칸트의 내면의 감시가 되었든 간에 분명 타자의 억압이 존재해 왔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주체는 복종적인 수동성을 보여야 했으나, 성과사회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억압의 주체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억압의 주체가 사라졌다 하여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유를 얻은 것 ‘처럼’ 착각에 빠지게 되어 오히려 더 열심히 자신을 소진시키게 된다. 즉, 이제는 자기 자신이 억압의 주체로 전환되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이제 자신을 경영하는 경영주체가 되는 것이고,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보상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칸트가 요청한 신의 개념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노력과 열심에 대한 정당화와 완료의 구실을 했다. 즉,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렇게 자기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윤리적 실천을 해간다면 언젠가 신이 이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해줄 거라는 믿음에서 신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신의 보상은 모든 일에 대한 완료의 가능성을 준다. 그러나 성과주체는 이제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홀로 자신을 경영해야 한다. 문제는 처음과 끝이 없어진 이러한 행위체계에서 무한성과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행위를 멈춰야 할지 알 수가 없기에, 게다가 자신이 ‘자유롭다’는 착각에 의해서 더더욱 자신을 착취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의 사라짐은 성과주체를 홀로 남겨둔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나눌 수 없으며 연대할 수도 없는, 오직 자기자신의 나르시즘적인 도취적인 착각 속에서 스스로 고통을 감내해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자기 안에서 고통을 삼켜가며 점점 더 소진되어 가는 것, 

 결국 한병철교수가 제시하는 오늘날의 피로사회는 시대적 변화에 중점적인 논증을 하면서 규율사회의 종결과 성과사회의 등장, 과잉성과의 시대적 고통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과사회에서 홀로 남은 성과주체는 가시적인 억압의 타자가 사라졌다는 현상 속에서 자신이 자유하다는 착각에 빠지고, 끝없는 자기착취의 상황에 침몰하게 된다. 문제는 무한성과를 내기위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성과의 목적자체가 정해져 있지 않는 무한한 경쟁 속에서 결국 좌절하게 되는, 그래서 소진되고 우울하고, 경계성 성격장애를 일으키게 된다는 결과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전체적인 논리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성과사회에서 탈진하고 우울증에 등 떠밀린 현상 속에서 한병철교수는 나름대로 대안을 제기하고 있다.


 깊은 심심함깊은 사색성찰무위,참선중단하는 법부정적인 힘공동체의 가능성, ...

이 단어들을 보면 의외로 대안적 사유들이 새롭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탈근대적 시대 속에서 여러 학자들을 통해 제시되어 왔던 동양적 사유, 느림의 철학 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시대적인 문제제기는 기존의 푸코 등의 현대철학자의 사유를 넘어서는 지점에 있음으로 새로움을 주었지만 대안에 있어서는 새롭지 않다는 점, 그것은 곧 이 책의 핵심적인 존재이유를 밝혀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동안 현대사회에서 나타난 수많은 문제들을 여러 학자들이 나름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기해 온 상황 속에서 한교수는 대안에 비판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원인을 밝혀내는 틀이 잘못되었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물론 우울증 등의 현대적인 정신질환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안도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프로이트와 푸코의 틀 안에서 본다면 억압이 문제이기에 오히려 주체성의 회복을 외칠 것이며, 자기주장, 자기성과, 자기노력에 대한 경주가 대안적 방식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이 오히려 한교수가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자기착취의 방법론이다. 그래서 한교수는 너무나 빠른 사회, 복잡한 사회에 대한 부정성의 기존대안들처럼 깊은 사색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오늘날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멀티태스킹 개념이야말로 원시적인 특성에 불과하다고 일갈하면서 오히려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사색이야말로 인류를 진보시킬 핵심적 요인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겉핥기 식의 멀티태스킹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와닿는 적용점이 될 수 있다. 창조적 과정은 멀티행위가 아닌 깊은 심심함에서 솟아나는 것이며 이러한 사색 속에서 정신이 이완되면서 나와 너의 차별성이 무차별성으로 섞이는 현상과 함께, 타자를 위한 우애의 자리가 가능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사색’이라고 하여서 피안의 세계, 초현실적인 관념의 세계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물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파악케 하는 힘이 사색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색을 통해 찰나적이고 미시적인 사물의 실체를 인지하며, 귀기울임으로써 타자의 소리, 공동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분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아무 대안없이 그저 ‘짜증’만 내는 것과는 확실히 구분하면서, 분노야말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다시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즉, 멀티태스킹이 아닌, 깊은 사색과 집중, 분주함.산만함이 아닌 깊은 심심함, 짜증이 아닌 분노, 긍정의 힘만이 아닌 부정의 힘을 통해 끊임없이 지금의 현상을 멈춰서게 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안들은 한트케가 제시하는 ‘근본적인 피로’ 로 수렴된다. 즉, 자기착취를 통한 ‘분열적 피로’와 대조되는 대안적 피로가 된다. 분열적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이는 폭력이 되어 공동체, 유대감, 언어까지도 파괴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한트케의 근본적인 피로는 모두를 화해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을 통해 피로가 나와 너를 무차별적으로 하나되는 매개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신뢰하고,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피로로 설명한다. 

 그런데 대체 근본적인 피로는 무엇을 얘기하는 것일까? 책에서는 자세하게 근본적인 피로가 무엇인지 확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데, 과잉의 피로, 탈진의 피로와 대조함으로써 그 윤곽을 잡아낼 수는 있다. 그리고 놀이, 유희의 관점에서도 적용점을 보여준다. 즉, 즐거움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로가 바로 근본적인 피로의 모습이라는 듯한 서술을 보여주는데, 이 지점에서는 호모루덴스의 개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조심스러우면서도 직접적으로 제시된 사례가 있는데, 바로 기독교 오순절다락방의 사건과 안식일의 예가 그 것이다. 성령을 기다리는 다락방의 예수의 제자들,바로 그들의 피로를 근본적인 피로의 예로 들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과잉활동성이 아닌,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피로, 이는 태평함과 무위의 능력을 허락해준다. 아마도 성령의 임재함을 기다리고 고대하는 제자들의 열심 속에서 발생한 피로는 자신을 소진시키는 피로가 아니라는 것이며, 성령의 임재함 자체가 결국 나의 열심과 나의 노력을 버려두고 자신을 맡기고자 하는 비움의 자세를 요청하기에 이 피로를 예로 든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안식일의 피로를 예로 든다. 영감을 우리에게 주는 피로로써 안식일 역시 자신의 과잉활동을 억제하고 부정하는 피로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피로, 모든 목적지향성에서 해방되고 염려에서 해방되는 막간의 시간이며, 쓸모없는 것의 쓸모인 셈이다. 안식일은 곧 피로의 날이다. 공동체에 평화를 주고, 태평함을 주는 피로의 시간 말이다.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와 한국적 상황의 적용점     

나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 적극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이 던져주는 시대적인 요청이 과연 현 시대 모든 공간에 허락된 자리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병철 교수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재독학자다. 그렇다면 한국적 지형을 정확히 인지했다기보다는 독일의 지형에서 이 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나는 독일에 가본 적이 없어서 독일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할 방법이 없다. 단지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한국 상황이 한교수가 이미 지나갔고, 이미 낡아버렸다고 말하는 규율사회에서 정말 벗어났다고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 유럽에서도 이러한 규율사회적 잔재가 남아있을 것이고,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는 부분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교수는 진보적인 시각에서 현재-미래를 동시적으로 예견하면서 성과사회와 자기착취의 분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현재의 한국은 너무나 근대적이고, 너무나 규율사회적이라는 것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사회가 얼마만큼 국민들이 감시당하고, 갇혀있는지, 여전히 근대법인 헌법의 기본권조차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인지 한병철교수가 좀 더 상세히 알고 있다면 적어도 한국적 분석에는 예외적 상황으로 제시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근대화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규율사회였다는 진단은, 적어도 근대화과정의 내실화의 과정을 거친 후의 비판적 사유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개별주체성을 쟁취하기위한 지난한 싸움이후 또 다른 극단의 선에서 발생하는 감시와 규율의 권력과 폭력성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은 어떤 단계인가? 이제야 우리는 민주화 투쟁을 통해 제도적인 민주주의만 실현시켰을 뿐, 실질적인 민주주의 단계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이 자기의 주권을 누리기도 전에 독재 권력의 횡포, 국가권력의 감시, 외환위기 이후로 급변한 신자유주의의 경제 권력의 새로운 감시 속에서 여전히 갇혀있는 것이다. 그나마 현대의 정보화통신, 소셜네트워크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세대의 규합과 기존권력에 대한 저항이 모여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규율사회적 현실인식 자체가 없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대적으로 다 지난 일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우울증증상도 생각해보자, 과연 우울증은 정말로 자기과잉, 자기착취에서만 벌어질까? 그렇다면 학교제도의 억압 속에서 자살하는 학생들은 우울증이 아닌, 다른 증세로 판별해야만 할까? 병영 안에서 권력의 폭압에 매년 수십명 이상이 자살하는 병사들은 우울증이 아니라고 판정해야만 할까??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가정주부들을 성과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육아,가사라는 현실규율의 울타리 안에서의 억압을 통한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근대의 신경증적 증세에서 오늘날 우울증적 증세로 시대적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정작 우울해서 자살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한국사람들은 여전히 억압과 금지의 권위 앞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국이라는 독특한 나라는 현대적인, 즉 후기근대적인 특성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교수의 성과사회적 특성 또한 한국에도 모두 존재한다고 나 역시 믿는다. 단지 한국이라는 곳이 근대와 후기근대를 분리할만한 지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한국은 근대와 현대가 중첩되고 뒤엉켜서 오히려 정신분열적인 현상에 시달리는 나라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여전히 억압과 금기에 못이겨 괴로워하는 주체들,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접목으로 성과와 자기계발에 목매여 결국 제 풀에 지쳐 쓰러지는 주체들, 이 두 주체가 다른 주체인가? 한국에서는 누구나 이 두 가지 현상 모두를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적 억압과 자기착취적인 성과주체의 우울 모두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시대적 선후관계로 배열하는 것보다는 공간적 개념을 넣어서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입체적 관계로 배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는 한국에서는 철저히 공존하고 있고, 규율사회가 해체되고 성과사회로만 변해갈꺼라 장담할 요소 또한 없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전자정보화기술이 오히려 규율사회를 더 강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미시적인 주체 개개인은 성과사회의 성과주체이면서, 거시적인 사회,국가는 강화된 규율사회의 틀로 공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차라리 한국사회를 정신분열적 사회로 부르고 싶어진다. 높은 층위에서 규율사회와 성과사회가 공존하는 국가, 이 보다 자기분열적인 사태가 어디 있을 것이며 이보다 개별 주체들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한국은 이런 현실에 놓여있다고 나는 믿는다. 규제와 규제완화가 억압과 화해가, 감시와 소통이 공존하는 그런 사회에서 한국 사람들은 여러 장단에 맞춰서 뛰어다니다 결국은 자기 분열적 현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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