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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an 25. 2021

그래서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2편

 

 2장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충직 딜레마

 

사죄와 손해배상

 

 독일 정치 지도자들은 유대인 학살 문제에 대해 공개 사회하면서, 나치에 대한 책임을 다양한 모습으로 인정해 왔다. 이 근거는 무엇인가? 정작 일본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 않은가?

미국의 노예제에 대한 백인들의 사죄 또한 마찬가지 논쟁이다.

 국가는 역사적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가. 집단 책임과 공동체의 요구에 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공개 사죄를 정당화하는 주요 근거는 정치 공동체에 의해 부당함을 강요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부당함이 희생자와 후손에게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인식하여, 부당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것을 막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을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공개사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개 사죄나 배상을 하려는 시도가 오래전의 증오를 불붙이거나, 역사적 적개심을 강화하고 피해의식을 공고히 하며 분모만 키우게 되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 그리고 개인 책임에 대한 자유주의논거의 반대가 있다.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는가?

 

 앞선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현 세대가 사죄해서는 안 되며, 사회할 수도 없다는 논거가 있다. 내가 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사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공식 사죄에 대한 원칙적 반박은 무시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한 행동만 책임질 뿐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내 힘이 닿지 않는 일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공식 사죄에 대한 원칙적 반박은 강력하고 솔깃한 도덕적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를 도덕적 개인주의라 부를 수 있다. 도덕적 개인주의는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이는 자유주의적 사고다. 이러한 합의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정치뿐만 아니라 근현대 정의론에 크게 부각된다. 선택하는 자아는 존 로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합법 정부는 반드시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아버지의 권위나 왕의 신권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님을 천명했던 시대의 목소리다. 칸트 역시 선택하는 자아에 호소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된다는 뜻이다. 20세기 존롤스는 이를 받아들여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한다면 어떤 정의의 원칙에 동의할 것인가를 묻는다.

 칸트와 롤스의 공통점은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자 애착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나를 자유롭고 독립된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그같은 역사적 부당함을 배상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말 할 근거가 없어진다.

 

 정부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정부는 좋은 삶의 의미를 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대의 정치 개념에서 탈피했다는 증거다. 칸트와 롤스가 보기에 좋은 삶에 대해 특정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타인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자기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독립된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이처럼 자기 목적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대단한 도덕적 사고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에 관해 다른 이론을 제기한다. 선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본성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하다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다. 그에 따르면 정의를 추론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선의 텔로스, 즉 본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좋은 삶의 본질부터 따져야 한다. 어떠한 삶의 방식이 최선인가를 알아내지 않으면 공정한 헌법의 틀을 잡을 수 없다.

 

정의와 자유

 

 결국 칸트와 롤스가 권리를 선에 앞세우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우리가 스스로 선을 택할 자유를 빼앗는다고 우려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사람과 목적 또는 선의 적합성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와 롤스는 우리 본성을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고 보았다. 목적에서 떨어져 나올 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틀을 중요시했다.

 미국정치논쟁에서 진보와 보수는 공교롭게도 모두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측면이 있다. 정부와 시장의 역할을 두고 맞설 경우 이들은 대개 어떻게 하면 개인이 자유롭게 목적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를 두고 논쟁한다.

 평등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진보) 시민의 자유와 사회,경제적 기본권을 주장한다. 개인이 목적을 추구할 수 있으려면 정부는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물질적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뉴딜정책 이래 미국의 복지 정책 지지자들은 사회연대와 공동체의 의무보다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명분을 내세웠다.

 반면 자유지상주의자들(보수)도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중립국가를 주장하며 복지정책에 반대한다. 그들은 자유방임을 주장하며 자유시장 옹호하고 자신이 번 돈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중립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평등주의자에게나 자유지상주의자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이런 정의론은 정치와 법이 다원화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샌델은 선택의 자유가 공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는 충분치 않다고 결론 내린다.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기가 때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요구

 자유주의는 정작 우리가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칭찬하기까지 하는 다양한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이해할 수 없다. 연대와 충직의 의무, 역사적 기억과 종교적 신념에 관한 의무가 포함된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동체와 전통이 요구하는 도덕이다. 우리 자신을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로 여기지 않는다먼 우리의 도덕과 정치에서 그 의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실제로 롤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흐름이 1980년대에 나와 공동체주의자라 불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공동체주의자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자칫 공동체가 규정하는 모든 것이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상대론적 견해를 암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체가 주는 부담이 억압적일 수 있기에 이런 흐름에 자유주의는 반대하머 발전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이야기하는 존재

매킨타이어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서사'의 개념을 제시한다.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기'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이란 그 과정에서 여러 갈림길에 마주쳤을때 우리는 완전한 삶, 내가 관심을 갖는 삶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적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록 여기에도 선택은  끼어들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일 뿐이지 의지에서 나오는 절대적 행위는 아닌 것이다. 내 앞에 놓은 길 중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에 더 잘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속한 소속과 밀접한 연관성을 띤다. 따라서 매킨타이어는 나치가 유대인에게 무엇을 했건 내 조상의 문제니 나는 상관없다는 태도에 대해 도덕적 천박함으로 비판한다. 나는 사회적,역사적 역할과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불가하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한다.

합의를 넘어서는 의무

 롤스는 합의를 넘어서는 의무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유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의무는 오로지 두가지 뿐이다. 1.자연적 의무, 2 합의를 통한 자발적 의무
자연적 의무는 보편적인데 인간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행동하는 것, 잔인한 행동을 삼가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의무가 칸트의 자율적 의지, 롤스의 가언적 사회계약에서 생기기에 합의라는 절차는 필요없다. 한편 자발적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며 합의에서 생긴다. 즉 자연적 의무를 넘어서는 지점,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되는 단계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되 타인이 이익을 얻도록 무조건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추가적 상호계약을 통해서만 의무가 발생한다.
 결국 이러한 자유주의적 의무안에는 시민이 일반적으로 이행해야할 정처적 의무는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우리를 가족, 국가,민족의 구성원이자 그 역사를 떠안은 사람, 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이해하려면 충직과 책임이라는 도덕적 힘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서 세번째 의무가 등장한다. 바로 '연대의무'다. 연대의무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하다는 점에서 앞의 자유주의의 두가지 의무와 다르다. 이 책임에 담긴 도덕의 무게는 소속된 자아라는 도덕적 고민에서, 그리고 내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포함된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
1.자연적 의무 : 보편적이고 합의는 불필요
2. 자발적 의무: 특수하고, 합의가 필요
3. 연대의무: 특수하고, 합의가 필요치 않음.

연대와 소속
 
 -가족의 의무 : 두 아이가 익사직전일 때 한 명밖에 구할 수 없다면 자기 아이를 선택하는 것을 비난할 수 있는가. 여기서 공정한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반론할 수 있는가. 설령 부모노릇을 제대로 못한 경우라도 자식은 그 부모를 보살필 책임이 있다면 도덕적 책임은 상호이익도 합의도, 즉 자유주의 윤리를 넘어선다.

- 프랑스 레지스탕스 : 자기 마을의 폭격을 부득이하게 거부하는 조종사. 비록 다른 대원이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이기에 결과는 같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자란 마을, 그리고 그 마을의 민간인이 죽을 수도 있는 임무를 거부하는 것의 정당성. 마을일원으로서의 책임감과 정체성.

- 에티오피아 유대인 구출하기: 에티오피아 기근으로 40만명의 난민이 생겼을때 이스라엘 정부가 에티오피아 유대인만 구하는 것의 정당성.

연대와 소속 의무를 인정한다면, 그 답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에티오피아 유대인을 구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 일반적으로 난민을 구해야 한다는 모든 나라의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다. 칸트라면 보편적, 무차별적 의무를 논하겠으나 이스라엘 총리는 자국민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의 책임을 우선한다.

애국심이 미덕인가?

애국심은 논란이 많은 도덕감정. 누군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생각 없는 복종, 국가 우월주의 발상, 전쟁의 근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루소는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정체성은 보편적 인간성에 반드시 덧붙여야 할 요소라고 본다. '인간의 감정은 그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성향이 있어서 다른 나라에 재난이 일어났을 경우 유럽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같은 느낌은 오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는 외국인보다 자국민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하다. 예를들어 자국민에게 공교육,실업수당,직업훈련,사회보장 등 많은 공적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그렇다. 다만 국가 간 불평등한 현실적 상황이 국가 공동체를 옹호하는 주장을 복잡하게 만든다. 만약 모든 나라의 상황이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자국민을 특별히 돌봐야 하는 의무가 정의의 관점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부국과 빈국의 격차가 워낙 크다보니 공동체의 요구는 평등의 요구와 팽팽히 맞서게 된다.

 마이클왈쩌는 사회 구성원이 되는 조건을 규제하는 능력, 즉 입국허가,거부 규정을 정하는 능력은 공동체 독립의 핵심이다. 이것이 없다면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고 공동의 삶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남녀가 모인, 현재 진행중이며 역사적으로 안정된 '덕성있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민 제한에 찬성하는 강력한 논리는 미국 비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 수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 가난한 멕시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것을 정말로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조차는 이는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의 근거는 선택과 합의의 논리가 아닌, 삶과 역사를 공유하는 시민의 행복을 추구할 특별한 의무가 있음을 인정할때만 가능하다. 애국의 정서가 도덕에 기초할 때만이 공동체의 결집이 의무와 공동의 의미에 이바지할 때만이, 이방인뿐만 아니라 자국 구성원이 있을 때만이, 국가 공무원은 자국민의 행복에, 그리고 자국의 문화와 정치 번영에 각별히 신경 쓸 이유가 생긴다.

연대는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

연대 의무는 집단 이기심,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의 예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연대와 소속 의무는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로도 향한다. 내 공동체에 대한 의무외에도 역사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사죄는 연대 의무에서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나라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는 일은 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한 방법이다.
 그리고 연대의식으로 정부의 조치나 같은 국민을 비판하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의 논거로 전쟁 자체의 반대가 있는데 이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 누구나 내세울 수 있는 논거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반대논거로 과연 그 전쟁이 우리가 치러야 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 우리 국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전쟁이라는 믿음은 전쟁 당사자국인 미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감정이다.
 자부심과 수치심. 이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감정이다. 외국을 여행하다가 같은 나라 사람이 볼썽사나운 행위를 하면 그를 모르더라도 당혹스러울 것이다.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면 눈살을 찌부릴지언정 당혹스러워 하지는 않는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의 경우에만 당혹함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자부심도 마찬가지다. 나와 같은 나라의 선수가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일 때 자부심을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고집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따르는 것이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내 도덕적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 또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충직이 보편적 도덕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사회적 연대는 자연적 의무나 인권과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충하는 성향을 보인다. 즉 다른 사람의 권리만 침해하지 않는다면 가족,동료 시민처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타인을 돕는 일반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연대의무가 지탄받을 때는 자연적 의무를 방해할 때이다. 그럼에도 연대 의무는 자연적 의무와 대립할 정도로 훨씬 까다로운 입장이기도 하다.

  - 벌저형제 : 범죄자인 형과 우등생인 동생이 같은 지역에서 성장하여 한 명은 상원의원이, 한 명은 조직의 두목이 된 사례. 사회의 저명인사인 동생은 형을 범죄자로서 체포되는데 경찰에 협조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님 가족으로서의 충직이 우선인가, 대개는 살인 용의자를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도록 협조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가족에 대한 충직이 이 의무를 뛰어넘을 수도 있음을 동생 빌이 보여준다.
  -  유나바머: 반대의 사례가 있다. 오히려 테러범인 형을 밀고했으나 가족으로서 배신자가 되고, 고통받게 되는 사례가 그것이다.
두 사례를 통해 우리 의무가 합의나 인간 대 인간의 보편적 의무에만 기초한다면 형제애에서 나온 이런 어려움을 설명할 수 없다.

정의와 좋은 삶

연대에는 도덕적 힘이 필요하다. 연대는 우리에게 부담을 준다. 그런데 연대와 정의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우리 의무는 모두 의지나 선택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 삶과 공동체를 해석하는 서사와 관련된 이유에서 나올 수 있다.
 칸트와 롤스에게는 권리가 선에 앞선다.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을 규정하는 여러 개념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우연한 이해관계와 목적을 배제하는 칸트의 도덕법, 특정한 목적, 애착,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를 배제해야 한다는 롤스의 무지의 장막 뒤에서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맞지 않다.
 공정한 헌법의 목적 중 하나는 좋은 시민, 좋은 인격을 키우는 일이다. 그는 사회가 할당하는 공직,영광,권리, 기회 등의 의미를 숙고해야만 정의를 고민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정치와 법이 도덕,종교적 논란에 휩쓸리는 일을 막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의 상당수는 도덕,종교적 논란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를 내려놓으라는 것은 오히려 억지스럽다. 이럴경우 오히려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고 중요한 도덕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는 시민의 삶을 메마르게 하며,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도 쉽다.

3장 정의와 공동선 

 버락 오바마는 정치에서 종교의 역할을 인정한다.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종교적 담론의 영역을 포기하는 것은 잘못으로 보았다. 사회문제에서 가치와 문화의 역할을 간과하면 급한 문제를 오히려 해결할 수 없게된다. 따라서 도덕적 종교적 신념은 정치와 법에서 빠지면 안된다.
 이미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들, 개혁가들 상당수는 신앙에 자극을 받았고, 종교적 언어를 수시로 이용하며 명분을 옹호했었다. 미국의 헌법은 모름지기 도덕을 체계화한 것이며 그 도덕의 상당부분이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을 바탕으로 한다.

중립을 지키려는 열망

그럼에도 '1960~70'년대는 정부가 도덕,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흐름이 강했다. 중립론에 있어 공화당은 경제정책에서 민주당은 사회.문화분야에 자유주의적 중립을 끌어들였다.
 존롤스는 71년 정의론을 통해 자유주의적 사고, 중립적 사고를 옹호했다. 그러나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아라는 비판에 대해 고민했고 93년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을 출간하며 자신의 이론을 일부 수정한다. 즉 애정,헌신,충직에 대한 경우가 많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롤스는 충직과 애착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선을 긋는다.정의와 권리를 토론할 때는 도덕,종교신념은 내려놓아야 하며, 인간을 그런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지 않는 '정치적 존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은 오히려 되묻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정치적 자유주의는 합리적 다원주의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정치,도덕적 교리사이에서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하고, 정의와 권리를 놓고 공개담론을 할 때도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롤스는 우리가 마치 대법원이 내놓은 견해와 같은 느낌으로 공적이성을 판단하라고 한다. 그러나 샌델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틴 루터킹은 도덕 종교적 논리를 바탕으로 시민의 권리라는 명분을 발전시켰고, 베트남전 반대운동도 그러했다. 오바마는 말한다. '삶에 목적의식이, 서사적 궤적이 필요해졌습니다.우리가 진정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고 싶다면, 즉 우리 희망과 가치를 그들의 희망과 가치와 관련지어 소통하고자 한다면 진보주의자인 우리들은 종교적 담론이라는 영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낙태와 줄기세포 논란
낙태 찬성론은 낙태권리를 주장함으로 자유주의의 입장을 대변한다. 낙태문제를 종교,도덕적 문제로 끌고가지 말고 중립과 선택의 자유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태아가 사실상 인간이라면 낙태는 영아살해와 다를 바가 없는만큼 결코 권리와 선택문제가 될 수 없다. 즉 선택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도 따지고 보면 도적적 신학적 문제에 중립적이라고 볼 수 없는 셈이다. 가톨릭의 엄격한 입장을 이미 철저히 반대함으로써.
 결국 낙태와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근본적인 도덕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성혼
동성혼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결혼의 목적과 동성애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킬 수 있는가? 결혼의 텔로스, 목적이나 요지를 규정하는 특정한 견해에 좌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결혼을 선택의 문제라고 할수 있을까. 정말 그렇다면
1. 남자와 여자의 혼인만 인정
2. 동성혼과 이성혼을 인정
3. 어떤 종류의 혼인도 인정하지 않고 그 일을 사적인 영역으로 돌린다.
동성혼 찬성론자들은 3번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2번을 주장한다. 문제는 1,2,번은 모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고 이미 중립이 아닌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다처체는 일처다부제는 1,2,번 항목에서 이미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 정말로 각자의 선택일 뿐이라면 3번을 옹호해야 하는데, 과연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 일부다처체도 인정하고 일처다부제도 인정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결국 동성혼 논쟁의 진짜 쟁점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동성결합이 공동체에게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즉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의 목적을 이행하는 하는 점이다. 즉 공직과 영광의 공정한 분배가 쟁점이며 그것은 사회적 승인의 문제다.

정의와 좋은 삶

정의란
공리나 행복극대화라는 입장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 자유시장에서 선택하는 자유지상주의 논거나 원초적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법한 가언적 선택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마지막으로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인데, 샌델은 세번째 입장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의 한계로 첫째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 둘째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수량으로 환산해 질적차이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공리주의의 첫번째 문제는 해결한다. 계산이 아닌 권리를 다루고 정의를 계산이상으로 보니까. 그러나 정작 각 사람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 그러면서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취향과 욕구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번째 한계는 여전히 드러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우리 삶의 의미와 중요성,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특성과 질은 하나같이 정의영역을 벗어난다.
 결국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공동선의 정치
그러면 어떤 정치담론이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끌수 있는가.
우선은 관찰이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정치를 구상하고, 성이나 낙태외에도 경제,시민의 관심사라는 폭넓은 영역으로 끌어내는 정치를 구상해야 한다. 국가의 문제를 단순히 국민총생산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안에 파괴되는 자연의 가치, 사회,문화적 가치에 눈을 돌리는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1. 시민의식, 희생,봉사  -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헤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공적삶에서 시민이 드러내는 자세와 기질인 마음의 습관에 무관심할 수 없다. 시민의 미덕을 키울 길을 찾아야 한다. 공립학교가 그런 역할을 해왔다.이때 교육은 이론이 아니라 시민의 미덕을 실용적으로 사회제도안에서 자연스럽게 익혀가는 시민교육이다.
2.  시장의 도덕적 한계- 시장과 시장 친화적 사고가 전통적 삶의 영역까지 파고든다. 국가가 병역이나 죄수심문을 민영화하는 것. 대리모문제, 장기매매 등등 결코 시장화되서는 안되는 영역이 시장에 잠식되지 않도록 선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을 놓고 공개토론을 벌여야 한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정하고 공론화해야 한다.
3. 불평등,연대,시민의 미덕-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게 된다. 불평등이 깊어지면 부자와 가난한자의 삶이 점점 더 괴리되는 것이다. 돈있는 자들은 사립학교,사설 헬스등을 이용함으로 공공공간의 질은 점점 더 떨어진다. 결국 공공서비스의 가치하락은 재정부담을 가져오고 시민의식은 하락하게 되는 것이다.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시민 삶에 기반이 되는 시설을 재건하는 것이 일차목표다. 우리 세대도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중요한 기반시설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아이를 보내고 싶어지는 공립학교, 공원, 대중교총체계, 도서관 등을 만들어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게 해야한다.
4.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 도덕과 종교적 이견에 있어서 정부는 적어도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정부는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동료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피하기 보다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 때로는 경청,학습하며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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