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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Feb 10. 2021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읽고

 

*부모님댁에 놀러갔다가 책장에 보관된 오래된 대학시절 리포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분명 읽었던 책은 맞는데 이 책으로 리포트를 쓴 적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나네요. 그럼에도 제 이름과 학번이 오른쪽 상단에 찍혀있는걸 보니 분명 맞나 봅니다. 주술관계오류와 불필요한 표현만 잘라내고 실어봅니다.


'신은 죽었다'     

'인간은 던져진 현존재이며, 신 앞에 선 단독자이다'     


위의 말들은 모두 다른 철학자들의 이론이지만 무언가 연결시키는 고리가 있다.서양철학에서 신의 역할이 사라지고, 니체의 초인을 바라는 것과 마르크스의 이상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인간의 새로운 주체성을 가져오고 있다.

 20세기 중반에 사르트르가 왜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라고 했을까?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은 휴머니즘의 죽음을 나타낸다는 미셀푸코의 해석이 잘못된 것일까? 니체가 틀리다면 실존주의자들이 니체를 다시 부활시켰을 리는 없다.

 그 명쾌한 답을 바로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1946년에 간행되었고, 사르트르가 메뜨나 클럽에서의 1945년 강연을 수록한 50여 페이지의 작은 소책자이다. 비록 50여 페이지 분량이지만 책의 내용은 어떤 책보다 심오하다. 먼저 사르트르는 이전에 실존주의를 비판하는 여러 입장들에 대해 차근차근 반박을 하면서 실존주의를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의 출간 이후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하이데거는 실존주의가 과연 휴머니즘인가에 대해 반박문을 보내기도 한다.      

 기존 대부분의 사상들은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본질이 있어야 존재가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존재가 본질에 선행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인간의 현존재, 지금 우리가 인지하는 존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은 인간을 창조한 신의 개념조차 부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령, 신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신(절대적 본질)을 대체할 더 앞선 존재가 필요해진다. 이것은 결국 사람이거나 인간의 실체일 것이며, 이는 먼저 세상에 던져진 것이며, 그 다음 과정에서 정의가 내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주체성의 개념이다.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것은 책임성을 수반하고 있다. 곧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자기 존재의 책임자가 되게 하고 그 존재에 절대적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은 책임을 통해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선택은 이미 항상 선한 것을 전제로 한다. 사르트르는 이 선택과 책임을 통해 앙가주망(자신에 파묻히지 말고 사회에 참가하는 것)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러한 행위가 있기에 불안하다고 말하곤 한다. 아브라함을 예로들어 이삭을 바치라는 천사의 음성이 들렸고 이를 행하려 하였지만, 그 와중에 불안함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성이 과연 정말로 천사인지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행위가 선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결국 자신의 기준이다. 자신의 판단만으로 선택을 해야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여기에서 프랑스의 비종교적 윤리관과 비교하며 설명을 하는데 , 비종교적 윤리관은 신이 없어도 윤리를 통해 아무런 불이익 점이 없는 상태를 주장하는 반면 실존주의는 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이 없으면 인간은 많은 난점을 겪는다고 말한다. 신이 없기에 인간이 선을 행할 기준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진 것이다. 결국 선험적인 선이 아닌 바로 인간이 중심이 된다. 

   결국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독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유로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기에 그가 하는 행동에 책임이 있기에 자유롭다. 그러면서 인간은 고독하다. 인간 자신이 기준이기에 모든 판단도 인간 주체가 해야하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여기서 행동의 중요성을 어필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선택기준이 자기 주체에 있고 그것이 자신의 감정과 본능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그 감정의 성립이 행동없이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선교를 할지 안할지 고민할 때 목사에게 가는 것은 이미 자신이 긍정적 선택을 하려는 행동이며, 스님에게 찾아간다면 안가겠다는 결심을 이미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유요.선택하시오, 다시 말하면 창조하시오'     

실존주의를 정적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적주의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고 안위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정반대라고 얘기한다. 현실은 행동 속에만 있으며, 자신의 창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을 실현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하기에 그의 삶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을 실현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하기에 그의 삶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환경이나 유전의 이유로 돌리는 것을 비겁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실존주의의 방식이 교육학에 미치는 영향도 클 것이다. 자신의 책임과 창의, 능력으로 성취할 것을 여러 구차한 핑계로 회피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나는 고아여서 그렇다느니, 내 자식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 그렇다느니' 모두 핑계일 뿐이다. 이러한 단호한 실존주의의 태도는 실제로 여러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준다. 비단 교육 뿐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기제를 통하여 자기 잘못을 감싸기 때문이다. 자기합리화의 중요성을 얘기했던 정신분석학자 안나 프로이트에게는 이러한 실존주의의 주장이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실존주의는 고독한 존재인 인간을 전제하기에 비관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사실은 그 단독자를 통해 전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통한 창의만이 삶의 가치가 있기에 이보다 낙관적인 이론도 없다는 역설을 가져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기자신의 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자 역시 인지하게 된다. 타자가 있기에 자신, 주체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나쁜 사람인지, 질투심이 강한 사람인지 전혀 알 기준이 없다. 

   실존주의는 진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진보는 단지 개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그것은 인간미래의 지향이 아닌 현재 자신의 인지할 수 있는 범위, 그 선택을 중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단지 인간에게는 선택의 창조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인가? 사르트르는 이전의 휴머니즘을 다르게 얘기하고 있는데 그 이전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고,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인데, 실존주의가 말하는 휴머니즘이란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으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 투사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창조하는 주체성을 갖고는 있지만 인간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기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그 중심에 있다. 

  자신외에는 입법자가 있을 수 없고, 자기 자신을 결정하는 것은 고독함 속에서이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이 함으로써가 아니고, 자기 자신 밖에서 목적을 찾기 때문이다.초월성의 인간이 자신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주체성과의 관계가 바로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는 기존의 경직된 인간에 대한 인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이제는 신이나 이성이 아닌 인간의 현존재를 통해 새로운 접근을 해나간다. 존재가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인간은 주체성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자유하다. 그 자유함은 모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며, 동시에 공포와 불안함도 가져온다. 게다가 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선험적인 선조차 존재하지 않기에 고독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능동적이며, 그 자유함이 있기에 자신이 선택한다. 그리고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핑계를 대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 어쩌면 100년전 초인을 목놓아 찾았던 니체의 바람적인 인간의 한 모델일 수도 있겠다. 

    과연 21세기는 어떠한 인간이 존재하게 되며 서있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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