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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Feb 17. 2021

자끄엘륄 '돈인가? 하나님인가?'

신광은/자끄엘륄입문/대장간

자끄엘륄 

2장 돈인가하나님인가?     

 기독교 기업이 있다면 대체 어떤 기업이 기독교기업인가? 

사업 아이템을 기독교적으로 선택하면 되는 것인가?(기독교출판,기독교쇼핑몰,기독교음반)

혹은 직장선교를 통해 사장과 직원을 복음화하는 회사인가?(교회출석 의무화 등)

또는 기도와 말씀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것? 아침마다 큐티와 예배로 근무를 시작하는 것?

심지어 중요한 결정은 기도를 통해서?

 그러나 엘륄에게 기독교 기업, 기독교경영이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기업은 기업일 뿐이다. 돈의 질서와 기독교 신앙은 섞일 수 없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속적 활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기독교는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돈에 대한 오해

 1)돈은 도구가 아니다

돈은 그냥 돈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돈은 가치중립적이고 이는 인간이 사용하기에 달렸다고 말이다. 즉 좋게 쓰면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돈이라는 입장인데 엘륄은 이에 반대한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외화하고 투사한 대상물이다. 즉 돈이 곧 인간의 욕망인 셈이다. 이 욕망은 개인을 너머 집단화된 욕망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 앞에 약해지는 것이다.돈은 곧 유혹이다. 돈은 사람들끼리의 합의한 약속이면서도 순종과 복종을 받는 권세로 높여지게 된다. 개인을 초월하는 권위, 돈이란 하나의 정신이자 권세다. 따라서 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돈은 하나의 영적 실체다. 돈은 본성상 모든 사람에게 복종과 충성을 받는 신적 대상이다. 이 돈이 인격처럼 살아서 활동한다. 인간의 합의로 만들어졌으나 스스로 움직이며 고유의 법칙을 갖게 되는 돈.결국 사람이 돈의 결정을 따르게 된다. 사람이 돈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돈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리라(눅16:13)’ 

결국 하나님과 돈은 서로 경쟁관계다.즉 이 성경구절에서 돈은 ‘맘몬신’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신과 돈이라는 신을 병치시키며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2) ‘물질 축복?’ 그런 건 없다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오해다. 개신교에서 특히 이런 오해가 성행하는데, 과거 청교도의 직업윤리를 통해서 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된 것이다. 물론 참된 신앙인이라면 자기 일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동할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가 주어진다는 논리이다. 성실을 통한 부의 축적은 이치에 맞을 수 있으나 이 해석이 과장되면 돈을 많이 번 자는 신실하고 성실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되어버리고, 돈없이 가난한 자는 게으로고 나태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된다. 게다가 복 받은 부자는 그 돈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일꾼으로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관점은 세상의 성공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부의 성례전적 의미-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되게 해준다는 사상이 있다. 아브라함,욥,솔로몬이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부가 가지는 의미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가시적 표현으로서 그 당시의 의미다. 즉 구약에서의 돈과 부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지시하고 상징할 때만, 즉 성례전적 역할을 감당할 때에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된 것이다.즉 단순한 물질의 추구가 아닌 것이고 위 세 인물도 전혀 부를 숭앙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신약 시대에 들어서면 돈의 성례전적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더욱 의미가 없어진다.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돌로 지은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듯이 성례로서의 돈은 필요 없게 되었다. 부의 성례전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사라졌다. 따라서 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으로 볼 이유가 사라졌다.     

3) ‘물질의 청지기?’ 글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돈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다는 설교는 무엇인가? 달란트의 비유를 들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돈을 맡기셨다는 설교를 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오해다. 엘륄은 인간이 청지기의 사명을 받은 것은 타락 이전의 때라고 말한다. 인간이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난 이상 우리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으며, 돈도 타락한 권세가 된 것이다. 결국 세상의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며, 사람들은 불의한 횡령자이다.

 물론 청지기라는 개념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이 땅의 돈과 부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주님의 것 뿐이다.      

4)성서에 따른 경제 윤리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신자들을 향해 돈을 많이 벌어 좋은 곳에 쓰라고 가르친다. 혹은 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버는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다. 탈세,노동착취, 부정의한 로비, 정경유착을 비판하며 부정의하게 돈을 벌어서는 안된다는 강조다. 이러한 주장은 투명하고 깨끗하게 돈을 벌게 된다면 돈의 질서는 성화되어 경제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에 있다. 결국 쓰는 것과 버는 것 모두 그리스도인이 돈과 경제에 윤리적 책임이 있고, 이 책임을 잘 감당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엘륄은 이러한 생각을 비판한다. 오늘날 돈의 질서 속에서 개인이나 기업이 경제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사실 상 불가능하다. 돈은 배타적이고 독점적 소유권이라는 반역적 개념 위에서 작동한다. 하나님의 은총과는 정반대인 매매의 질서인 것이다. 아낌없이 거저 주는 은혜의 질서와 ‘기브 앤 테이크’는 반대되는 원리다. 즉 돈의 질서는 반하나님적이다. 성화?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오늘날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의 윤리적 실천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별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돈의 질서는 인간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그 돈의 질서를 거스르지 못한다. 개인, 기업, 국가, 모두가 공황과 금융위기 앞에 속수무책이다. 돈의 이미 인간에게서 벗어났다. 따라서 돈의 질서 속에서 개인이 돈에 대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바램이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구매력, 소비행위! 이것만 있을 뿐이다.      

2. 변증법적 방법론 

 엘륄의 대안은 무엇인가? 혹자는 엘륄의 비판을 듣고 그렇다면 돈을 다 버리고, 포기하라는 비관론적 개념으로 오해하고는 한다. 그러나 엘륄은 절대로 돈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리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돈을 정복해야 한다는 통합주의자도 아니다. 

 여기서 엘륄의 변증법적 방법론이 도입된다. 돈은 분명 악이다. 그러나 돈은 필요하다. 

즉 필연과 자유의 변증법이다. 필연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 후 필연의 질서가 엄습했고, 인간은 그 안에서 종노릇 한다. 먹지 못하면 죽는 것, 이것이 필연이다. 같은 논리로 인간은 돈이 있어야 한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필연의 질서는 타락의 질서, 악의 질서이지만, 이미 이는 선택할 수 없는 필연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을 이 필연의 질서로부터 해방시킨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자유케하려고 자유를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유하다. 

 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인간의 자유는 불완전하며, 제한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필연의 질서 가운데서 부분적으로만 자유롭다. 이것이 엘륄의 변증법이다. 

 그렇다면 돈도 마찬가지다. 돈은 악 하다. 그러나 돈은 필요하다. 여기서 어느 하나만 주장하면 균형을 잃게 된다. 엘륄에게 돈은 악이고 사탄의 현현이지만 동시에 돈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돈의 활용이 돈을 성화시키지 못하지만 우리는 돈을 잘 쓰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개인의 경제행위는 경제 질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각 개인이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증법적 긴장의 한 복판에 내던져져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분명 이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도는 이 모순을 끌어안고 한걸음 씩 걸어가는 자이다.      

3. 돈에 충성하지 마라

 결국 엘륄의 돈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안은 ‘돈에 충성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제 1계명이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도 경배하지 말라’인 것처럼 돈 또한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절대적이다. 오직 예수만이 주시며, 모든 정사와 권세, 영광이 주께 있다. 돈의 권세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1) 사람이 더 중요하다

-돈이 결코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사람우선의 원칙으로 지금의 모든 경제법칙을 하나씩 재고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자를 받는 행위나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 저당물을 빼앗아 오는 행위등은 인간보다 돈을 더 중시해서 하게되는 행위다.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관계에서도 인간 우선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2) 돈을 신뢰하지 마라.

현대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돈이 곧 인간의 지위를 결정하는 시대다. 그래서 돈은 하나님의 강력한 맞수다. 돈을 신뢰하지 않는 삶이 드러나야만 한다. 그 삶의 방식을 엘륄은 두 가지로 제시하는데 첫째 부자들의 재산 축적에 대한 비판이다. 엘륄은 돈 있는 자들의 저축을 다시 생각하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보장과 대비의 욕망이 자리잡는 저축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다. 하나님의 도움보다 돈의 도움을 신뢰한다는 상징이 된다. 저축이 든든하면 인간을 일찍 독립과 자유를 선언하게 된다. 결국 저축이 하나님의 부재로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엘륄도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돈을 모으는 일까지 정죄하지는 않는다. 또한 저축하지 말라는 것이 돈을 마구 낭비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미래에 대한 대비하려는 성향과 습관, 그것이 최선의 지혜라는 논리를 거부하라는 것이다. 둘째, 가난한 자들에게는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근심하는 것도 돈을 하나님보다 신뢰하는 증거일 뿐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돈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 계시의 말씀인 성서는 분명 우리에게 주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고 채우신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먹이시니 놀고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직무를 다하되 그분이 채우실 것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과 이에 따른 급여와 수익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월급과 매출은 대가가 아닌 은혜의 선물로 인식해야 한다. 

 3) 거저 주라 

 가. 매매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

돈의 권세와 싸우려면 돈의 마술성을 벗겨내야 한다. 돈에는 다른 물건에 없는 아우라가 있다. 돈의 신성화는 인간의 욕망가운데 더욱 강화된다. 많은 선교사,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발을 구르는 행위들이 바로 돈을 신성화하는 행위다. 결국 돈의 법칙을 거스르고 뒤엎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저 주는 것이다. 

돈의 질서란 ‘매매의 정신’이다. 매매와 교환의 경제질서는 맘몬의 정신이다. 이는 은혜의 원리와 반대된다. 은혜는 자격없는 자에게 거저주는 무상의 하나님 사랑과 자비다. 성도란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도 은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자들이다. ‘깨끗하게 벌어서 깨끗하게 쓴다’는 경제관은 고작해야 시민윤리의 변형일 뿐, 은혜의 원리가 아니다.

 나. 거저주는 방법

 거저 줌이 경제 질서속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형태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봉헌’이자 사람에 대한 ‘증여’로 나타난다. 봉헌과 증여가 자기 의가 되는 순간 거저 줌은 타락한다. 우리는 거저주는 대가로 1%의 대가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존경,심지어 보람을 얻으려는 마음까지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혹은 봉헌과 증여가 자기 희생없는 동냥이 되어도 거저 줌은 타락한다. 자신의 소중함을 떼 주는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인격적 관계가 없는 익명에 의한 기부또한 거저 줌을 타락시킨다. 많은 사회사업 단체가 기부를 받고 있고, 물론 이런 사업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인격적 만남이 없다면 거저 줌은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봉헌과 증여가 의무가 되어서도 안된다. 봉헌과 증여를 규범으로 정하려 하는 것, 십일조도 그 사례로서 온전치 못하다. 은혜는 규범화해서는 안된다. 규범화되는 순간 은혜는 율법이 된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목숨까지 거저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발적으로 설 뿐이다. 십자가만이 은혜의 극치이며 이것만이 유일한 봉헌과 증여의 기준이다. 거저 줌은 세상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징표요, 예언자적 행위로 존재해야 한다.

 4) 가난하라

가난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돈의 질서에 대한 강력한 기독교적 대응이다.가난은 그 자체로 자랑거리는 아니며 의도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부자가 갖지 못한 하나님의 자비라는 특권을 갖는다. 부자는 하나님 없이도 혼자서 잘 살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그렇지 못하다. 하루하루 오롯이 하나님께 맡긴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부요케 하고자 가장 가난한자가 되셨다. 예수보다 더 가난한 자는 없다.물질적, 영적, 억압과 박해라는 세가지 조건의 완전한 가난. 우리가 여기서 얻게 된 부는 돈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한 부다. 돈없이도 엄청난 부자가 되는 역설. 가난한 자에게는 이 복음이 주어진다.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는 자신과 가난한 자를 동일시 한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모임이며 가난을 사모하는 공동체이다.                

4. 교회 공동체와 돈

 1)돈을 구속하는 교회

교회는 그저 개인 구원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타락한 세상이 회복된 새로운 질서를 예시하는 곳이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다가올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돈도 타락한 속성과 본성을 치유하고 난 후에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돈은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2)교회의 돈 관리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몸, 목숨마저 자기 것이 아니다.따라서 재물과 땅, 돈을 소유하는 권리는 당연히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만이 있다. 따라서 교회는 청지기 정신의 핵심을 붙들어야 한다. 교회는 매물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물론 교회 운영을 위한 비용은 있어야겠지만 돈을 쌓아두거나 이득을 남기려 해서는 안된다.

 3)헌금 

 교회는 은총이 왕 노릇 해야 한다. 매매와 교환의 거래 법칙이 교회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헌금은 율법, 의무가 아닌,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에 대한 자발적 감사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통해 신령한 은총에 참되게 감사할 수 있다. 헌금은 강제로 징수하는 세금이 아니며 모두가 누리는 축복이어야 한다. 

 4)나눔

 교회는 반드시 재물로 형재를 돕는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즉 구제라는 교회의 여러기능 중 하나가 아니다. 이는 교회의 본질의 문제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핍절한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던 사도행전 공동체는 개인들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찢어지고 분리된 인간관계를 다시 회복시켰다. 그리고 이는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자적 증언이다.      

5. 거짓 신화의 미혹

무한한 이윤추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돈은 16세기 이전까지는 탐욕의 도구로 인식되어 돈을 대놓고 추구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루터의 소명설과 칼뱅의 예정설과 같은 종교개혁의 정신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가동시키는 커다란 엔진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이윤추구 활동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인간은 자신의 탐욕 추구를 정당화하는 신뢰를 만들어 내었다. 

 역사와 과학- 탐욕을 정당화하는 두가지 신화. 이 두 신화 위에 노동, 행복, 국가, 영웅 등의 신화가 연달아 만들어진다. 행복에 대한 신화의 경우 현대인에게 물질이 곧 행복의 척도가 된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현대인은 물질과 행복을 연결시키고 기아가 가장 끔찍한 불행이며 배부른 것이 필수적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광고는 제품의 소비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외친다. 소비를 통해 행복해지는 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편 진보에 대한 신화도 있다. 이는 역사, 과학의 신화의 근원으로부터 유래하는데, 한편 진보신화는 기독교 종말사관의 세속화 형태이기도 하다. 계몽주의자들은 진보 신화를 굳건히 붙들었고, 헤겔,다윈, 맑스의 이론도 진보사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화들은 현대인을 직장으로 밀어 넣는다. 돈을 버는 행위가 가장 인간다운 행위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노동의 신화가 있다. 노동은 진리와 정의, 형제애, 건강이라는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노동은 권태와 부도덕, 빈곤을 제거하며, 도덕의 기초로 여겨졌고, 교회에서는 아담조차 노동의 소명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칼 맑스는 노동을 가치창조의 근원이라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은 해방의 길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노동은 가장 신성한 의무가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자기 정당화 논리일 뿐이다. 왕족과 귀족과 대비하여 실력과 노력만으로 승부했던 부르주아들의 자기 정당화. 그들에게 노동은 혈통을 이길 유일한 무기였다. 교회가 노동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사실은 노동 자체를 고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 교회의 기본입장은 노동이 인간 타락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는 부르주아의 주장을 받아들여 노동의 당위성을 창세기1 장에서 찾아 하나님으로부터 노동하라는 명령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했다. 노동의 참여가 미완성의 창조를 완성하는 사명이라고 주장했는데 어떻게 탐욕의 추구가 하나님의 명령이 될 수 있겠는가? 

 결국 이는 거짓 신화다. 그 결과는 이윤 극대화와 무한한 탐욕 추구로 귀결된다. 거짓 이론과 신화, 이데올로기로 인해 사람들은 명백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6. 엘륄과 마르크스주의

 엘륄은 분명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모두 비판의 대상이었다.

 1)마르크스주의 비판

 엘륄은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이 아닌 후대에 변질한 이데올로기, 즉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한다. 엘륄이 만났던 후대의 맑스주의자들은 결코 마르크스적이지 않았다. 그저 당의 노선을 강조하던 그들은 전체주의와 다를바 없었다. 그래서 엘륄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공허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경없는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무릎꿇고 공허한 형식만 남은 맑스주의였다.

 2)마르크스 비판 

 한편 엘륄은 마르크스 자체를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엘륄은 평생 마르크스를 버리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뒤 맑스주의를 포기해햐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그가 사는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맑스주의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맑스주의는 결코 사회를 바꿀 수 없음도 깨달았다. 곤경에 처한 인간과 문명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신앙의 영역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결국 이상적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다고 해도 돈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낙원은 생산력에 기초한 사회라는 점에서 그 또한 경제 우선주의 사회임이 틀림없다고 엘륄은 비판했다.      

 마치는 글돈이냐하나님이냐?

엘륄은 현실적인 돈 문제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충돌하며 주장한다. 그는 대립과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며 돈의 실체 앞에, 그리고 십자가 앞에 우리를 세우고 양단간에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한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성도들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나님과 돈 중 누구를 섬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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