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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Feb 18. 2021

사르트르의 [구토]

인간의 실존과 타자


   

토요일에 아이들이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하고 있었고,

나도 그 애들처럼 돌멩이 하나를 바다에 던지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동작을 멈췄고, 돌멩이를 손에서 놓고는 거기를 떠났다


 구토는 어느 날 갑자기 로캉탱에게 찾아왔다. 단순히 돌멩이를 집어서 던지려 했는데 순간 돌멩이라는 사물이 평소와 다르게 다가왔고, 그 순간 돌멩이를 집을 수조차 없었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우리가 아는 그 구토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입 밖으로 토사물을 쏟아놓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난 실제로 이 소설을 제대로 읽기 전에는 주인공이 갑작스레 여기저기 구토하느라 고생하는 내용인가 싶었고, 그때마다 토사물은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쓸데없는 호기심이 있었다. 결국 소설 속에서 구토는 토사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현실에서 구역질이 나는 것처럼 이미 그 증세 전체를 의미하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처음에 읽기에는 매우 재미가 없다는 것, 아마도 읽다가 집어 던지기 십상인 그런 책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다 읽고 나면 분명 다시 기억이 나고 무엇보다 소설의 한 장면 장면이 곱씹어진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과도 같다. 영화를 보다 보면 딱히 스토리도 명확하지 않고, 일상의 장면들이 하염없이 길어지면서 어벤져스 같은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실망을 주는 그런 영화, 그러나 다 보고나면 어벤져스보다 더 강한 여운을 주는 그런 영화처럼 ‘구토’ 또한 그런 이미지로 남는다.     

  

그 무언가가 내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어떤 통상적인 확신이라든지, 어떤 명백한 사실로서가 아닌, 어떤 병처럼 찾아왔다. 이것은 음험하게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나는 조금 이상하고, 약간 거북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게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 소설의 힘은 바로 인간의, 아니 우리의 일상에 있다. 특정한 사건은 아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교통사고가 났거나, 그런 극적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가능성이 있는 사건 아닌 사건이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반복되는 삶 안에서의 구토. 누군에게는 어쩌다 한두번 일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순간의 지속으로 삶 자체가 집어삼켜지는 그런 경험이 사실상 우리 삶의 보편적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삶에 대한 의문, 그리고 내가 인식하는 사물들에 대한 의문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6년 동안 계속되어온 잠에서 깨어났다. 조각상은 불쾌하고도 멍청하게 느껴졌고, 나는 내가 아주 지루해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인도차이나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왜 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희한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

나의 열정은 죽어버렸다.’     


주인공 로캉탱은 젊은 나이에 연금으로 살아가면서 현재는 역사속 인물에 대한 전기를 쓰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는 세계여행도 많이 다닌 듯 했는데 그는 그 여행의 반복 속에서 권태를 느끼고 갑작스럽게 여행 중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고독하게 살아간다. 딱히 사교활동을 즐기지 않고, 본인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면서 홀로의 삶을 산다. 

    

나는 혼자 산다. 온전히 혼자 산다. 나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받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다.’     

모든 친구들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자기들이 모두 의견이 같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확인하며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하단 말인가! 자기 생각에만 파묻혀 있는 듯 보이고, 그들과는 결코 합의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물고기 같은 눈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가 그들 가운데를 지나갈 때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한번 보라.’     


그가 사람들을 깊게 사귀지 않는 이유는 자신과 그들의 ‘다름’ 때문이다. 즉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주로 남들과의 공통점을 찾아 행복을 확인하는 이들이다. 로캉탱 자신은 자기 생각 속에 파묻혀 대중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특별한 자인 만큼 다른 이들은 혐오의 대상과도 같다. 어쩌면 이는 실존주의 사상의 중요한 골격이다. 일찍이 키에르케고르가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주장했듯이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름 뒤에 한 개인의 실존이 묻혀서는 안된다. 우리, 너희, 그들, 인간처럼 한 인간의 실존은 언제나 보편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버리거나 묻혀버릴 수 있는 존재임을 키에르케고르는 진작 깨달았었다. 그래서 종교적 구원의 도약 단계에서 인간은 신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의 실존에는 신이 없다.

신 없는 실존주의.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후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로캉탱에게 물체들은 평소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물체를 만지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나를 만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시선을 통한 주체와 대상의 객체화개념이 있다. 즉 나의 시선이 너에게 닿을 때 너는 내 시선의 대상, 객체가 된다. 그런데 이는 정반대로도 작용한다. 너 역시 나를 시선으로 대상화시킴으로써 서로가 이분화된 관계에서 대상화하는 투쟁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구토’에서는 한없이 수동적이기만 했던 물체가 그렇게 또다른 시선의 주체가 됨으로써 로캉탱에게 불쾌감을 주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바닷가에서 돌멩이를 줍는 것조차 어려웠던 이유. 구토의 발생시점이다.     


우리가 살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배경이 계속 바뀌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 뿐이다.여기에 시작은 결코 없다.날들이 아무 이유없이 날들에 덧붙여지는데, 이것은 끝나지 않는 단조로운 덧셈이다. ......그리고 모든 게 비슷비슷하다.상하이도,모스크바도,알제도,보름만 지나면 똑같아진다. 이따금 아주드물게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는데, 이때 자기가 어떤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든지, 어떤 고약한 일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주 잠깐 동안 깨닫는다. 그러고 나서는 행렬이 다시 시작되고,

시간과 날들의 덧셈이 다시 시작된다......이게 바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이다. 권태에 빠진 인간의 삶을 이렇게 잘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저 배경이 바뀔 뿐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오가는 것일 뿐, 새로움이 없는 상태, 그저 일상의 무료함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상태, 바로 권태를 정의하는 부분이 여기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주 드물게’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는 있단다. 사실 나 역시 성인이 된 이후로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인생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고통일 뿐이며, 고통이 가득한 삶 속에서 간혹가다 ‘행복’이라는 감정과 그것을 유발하는 사건이 돌발!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즉 그 반대는 없는 것이다. 행복이 가득한 삶 속에서 어쩌다 고통이 돌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에 따라 누군가는 삶을 행복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불행하다고 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새삼 고통 자체와 삶을 등치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고통의 감정, 혹은 그런 고통의 감각이 늘 상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오히려 사르트르의 ‘권태’ 개념이 더 적합한다. 인간의 삶은 권태 그 자체다.

그런데 그 권태 가운데 빠져 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그게 인생이 아닐까.

 한편 마지막 구절에 권태뿐인 삶에 구원의 가능성이 살짝 엿보인다.

 이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슬며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권태를 벗어나 삶을 살아내는 힘을 얻어낼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   

  

그들의 주름살과 눈가의 잔주름을, 한 주간의 작업이 남긴 그 쓰디쓴 주름을 지울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밖에 없는 것이다. 단 하루, 그들은 분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월요일 아침을 다시 산뜻한 기분으로 출발할 수 있게 해줄 젊음을 충분히 모을 수 있는 시간이 될까? 그들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바다 공기를 허파 가득히 들이마셨다. 잠자는 사람의 그것처럼 규칙적이고도 깊은 숨만이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걸었다. 쉬고 있는 이 비극적인 군중 가운데에서 나의 단단하고도 싱싱한 몸으로 대체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편 로캉탱의 시점에서 일기글처럼 ‘구토’는 진행이 되는데 그가 묘사하는 일요일의 풍경이 새삼 와닿는다. 단 하루의 휴일을 어떻게든 의미있게 보내려고 사람들은 발버둥치지만 그 모습조차 매 일요일의 반복과도 같고 로캉탱은 그 패턴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거기서 어떻게 해야할지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릴적 나의 일요일 또한 몇가지 이미지로만 반복적으로 새겨져 있다. 일요일 오전9시는 교회를 가는 시간이었고, 교회를 가기 전에는 꼭 그 시간에만 방영하는 미국어로 된 만화영화를 보았던 기억 말이다. 도날드와 미키마우스가 주로 나왔던 그 만화를 보다가 급히 교회로 가고, 교회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서 아버지는 프로야구나 전국노래자랑을 틀어놓고, (그렇다. 전국노래자랑의 그 주제곡?만 나오면 어릴 적 일요일의 그 풍경이 지금도 떠오른다) 오후 시간을 어영부영 보내다가 저녁에는 주말 예능을 보면서 다가오는 월요일을 두려워했던 그 기억들. 지금도 다를 것이 있을까? 주5일제가 되었어도 사람들은 월요일을 두려워 한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월요일의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안니는 시간에 그것의 최대한의 가능성을 돌려주곤 했다. 그녀가 지부티에 있고 나는 아덴에 있던 시절,

나는 24시간의 재회를 위해 그녀를 찾아가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온갖 꾀를 짜내어 우리 사이에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내가 떠나기 정확히 60분 전까지 계속 되었다     


이미 얘기했듯이 이 소설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다만 사르트르가 창조한 로캉탱의 생각이 어지럽게 펼쳐지면서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 인간의 고민과 연이어지는 생각의 과정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이지만, 스토리 전개를 기대하는 독자는 바로 내던지게 되어 있다. 여튼 그나마 이 소설 속에 로캉탱의 헤어진 연인인 안니는 계속해서 로캉탱의 기억 속에 등장하고, 소설의 말미에 짧은 재회를 하게 된다. 로캉탱의 전 연인이었던 안니는 시간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병적으로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로캉탱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그를 닦달한 듯 한데 그것도 항상 떠나기 60분 전까지만 계속했었다는 점에서 그녀가 얼마나 괴팍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로캉탱의 구토처럼 자기 삶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한 지독한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자신을 위해 로캉탱과 같은 연인을 대상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로캉탱이 불쌍한 것일까? 그 또한 아닐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서 여전히 로캉탱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극도의 공황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부두를 따라서 무작정 뛰었다. 그러다가 방향을 틀어 보부아지 구역의 황량한 거리들로 들어갔다. 집들은 도망가는 나를 음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되풀이했다.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이따금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갑자기 뒤로 돌아서곤 했다. 내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그것은 어쩌면 뒤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내가 또 갑자기 돌아섰을 때에는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물체들을 계속 응시하고 있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포석, , 가로등 등 최대한 많은 것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은 이 물체에서 저 물체로 신속하게 옮겨졌다. 그것들이 변하고 있다가 내 눈에 들키면, 변신을 멈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그리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가스등이고, 이것은 분수전이야

그러면서 내 시선의 힘에 의해 그것들을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애를 썼다.’   

  

한편, 시선의 비대칭적 권력에 대한 부분이 소설 속에서 몇 번이고 등장한다. 로캉탱의 구토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일상의 사물들이 그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그 와중에 이를 견디는 그의 방법은 역시 시선이다.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최대한 많은 것을 쳐다보면 나를 공격할 것 같았던 사물들이 다시 그 자리에 죽은 듯 머물러 있음을 확인하고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단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은 거리에서 뿐만이 아니라 박물관의 초상화의 시선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나에게 이제 그만 가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떠나지 않았으니, 호기심을 위해 무례함을 무릅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나는 궁 도서관에서 펠리페 2세의 초상화 한 점을 오랫동안 보고 난 끝에, 권리로 빛나는 어떤 얼굴을 얼마간 쳐다보고 있으면, 이 빛은 꺼지고 재 같은 찌꺼기만 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로탱은 아주 잘 버텼다. 하지만 갑자기 그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림은 칙칙해졌다. 그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맹인의 두 눈, 죽은 뱀처럼 얄팍한 입, 그리고 두 뺨이 남았다.

그들이 방에 들어서면 그 무시무시한 시선이 벽처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에 허옇고 물렁물렁한 뺨이 숨어 있었다. 그의 아내는 몇 해나 지나서야 이 뺨을 보게 되었을까? 2? 5? 내가 상상하기로는, 어느 날 남편이 옆에서 자고 있고, 한 줄기 달빛이 그의 콧등을 어루만졌을 때, 혹은 어느 무더운 때에 안락의자에 파묻은 몸을 뒤로 젖히고서, 눈은 반쯤 감고 턱에 햇살을 받으며 먹은 것을 힘들게 소화시키고 있을 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똑바로 쳐다봤고, 이 모든 살덩이가 무방비 상태로 드러났을 것이다. 퉁퉁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왠지 음란하게 느껴지는 살덩이가 말이다. 아마도 그날 이후로 파로탱 부인이 주도권을 거머쥐었으리라.’


초상화의 시선의 권력사례에서 파로탱의 사례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권력이 있는 자(부모,선생,장교,간부,,,,,,)를 똑바로 쳐다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파로탱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직시할 때 남편이 갖고 있던 사회적 지위 및 상징적 권력은 해제되고 그저 하나의 살덩이로 비춰질 뿐이다. 별 것 아닌 것에 평생을 잡혀 살았던 자신을 깨닫고 권력 관계를 뒤엎은 혁명성이 바로 시선의 마주함에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시선을 피해왔던가. 예의라는 이름으로 눈을 마주치기보다 돌리기에 힘썼던 삶이 아니었을까.  

    

나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직 현재, 현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들의 현재 속에 갇혀 있는 가볍고도 견고한 가구들, 탁자 하나, 침대 하나, 거울 달린 옷장 하나,

그리고 나 자신.

현재의 진정한 본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재는 존재하는 것이었고,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들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 생각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를 상상하는 것은 이렇게나 힘든 것이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사물들은 그것들의 외양, 그 자체일 뿐이며, 이 외양 뒤에는 ..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간의 실존은 오직 현재성에 있다.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가 아닌 것은 내 생각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의 이면에는 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존재한다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을 유지하는 것은 나다. 바로 나다.

몸은 일단 한번 시작되면 저 혼자 살아간다. 하지만 생각을 계속 유지하고, 생각을 전개해가는 것은 나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구불구불 길게 이어지는 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것을 나는 아주 천천히 길게. 길게 늘려나간다., 제발 내가 생각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시도해보고, 또 성공한다.

 머릿속이 뿌연 연기로 차는 느낌이 드는 듯하더니 그게 다시 시작된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해, 왜냐하면 그것도 생각이기 때문이야." , 이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건가?

나의 생각, 그것은 나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 바로 이 순간에도 끔찍한 일이다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게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는 무로부터 나를 끌어내고 있는 게 바로 나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증오와 혐오감,

이것들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나를 존재 가운데로 밀어 넣는 방식들이다.

생각들은 내 뒤에서 어떤 현기증처럼 피어난다.

 난 그것들이 머리 뒤에서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 그냥 그대로 놔두면 그것들은 앞으로, 두 눈 사이로 나아올 것이다. 그리고 또 계속 그대로 놔두면 생각은 부풀고 부풀어,

 엄청난 크기가 되어 나를 온통 채우고, 나의 존재를 새롭게 한다.     


존재를 유지해나가는 것은 결국 나의 생각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처럼 로캉탱은 자기 사유를 통해 존재를 느끼는데

이 자체가 본인에게 고통이기에 생각을 멈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각을 멈추고 싶어하는 그 생각이 다시 침투하기에 벗어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증오와 혐오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동침할 것이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다. 상대도 그걸 안다는 걸 피차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젊고 순결하고 정결하기 때문에, 둘 다 자신에 대한 존중심과 상대에 대한 존중심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은 고이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위대하고 시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한 주에도 여러 번 무도회와 레스토랑에 가서 그들의 의식적이며 기계적인 작은 춤들을 보여줄 것이다.

결국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30년은 더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꾸물대는데, 이것은 틀린 게 아니다. 일단 같이 자게 되면,

 그들의 삶의 엄청난 부조리를 가릴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한편 로캉탱의 반복되는 일정 속에 그가 자주 가는 식당과 까페, 주점이 있다. 거기서 그는 주점 여주인과 사랑 없는 육체적 관계도 일상적으로 갖고(교환한다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새로운 인물들이 있으면 주의깊게 관찰한다. 이 구절에서도 풋풋해 보이는 젊은 연인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분석이 나온다. 분명 그들은 어차피 동침할 것임에도 바로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숭고함을 유지하고자 무도회, 식당 등 의식적 행위들을 반복한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았기 때문에 동침의 기회를 아껴둔다는 것. 그들의 꾸물댐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단 첫 동침을 하게 된 순간, 그들은 삶의 부조리를 경험할 것이다. 그들 연예의 호기심과 설레임은 빛을 바래고,

끝없이 펼쳐진 그들의 남은 시간의 부조리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이제는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10대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동침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의 남은 80년 넘은 인생을 그 이후 어떤 힘으로 보낼 것인가.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올 듯 말 듯 애태우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그 시간들을 그 자체로 음미하는 것은 조만간 직시하게 될 삶의 권태와 부조리를 조금이나 늦추는 묘안이기도 한 것이다.     


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보이지 않냔 말입니다. 당신은 저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아마 못 알아볼 겁니다. 저들은 당신에게 하나의 상징일 뿐이니까요. 지금 당신이 애틋해하는 대상은 결코 저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인간'의 젊음, '남자''여자'의 사랑, 그리고 인간의 목소리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요? 그게 존재하지 않나요?"

물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젊음도, 성숙한 나이도, 늙음도, 죽음도…….”   

  

한편 로캉탱과 대화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독학자라는 자가 있다. 로캉탱은 전혀 이 젊은 독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다가옴을 거부하기에도 예의가 아니기에 그와 마주하고 마지못해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A부터Z순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모조리 읽어가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사회주의자면서 휴머니스트였다. 휴머니스트, 여러 의미로 휴머니스트를 정의할 수 있지만 로캉탱은 그의 휴머니즘 또한 못마땅해 한다. 왜냐하면 그 휴머니즘에는 바로 인간 실존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저 상징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실존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추상적 사랑의 행위에 만족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웨이트리스가 백묵 같은 카망베르 치즈 한 조각이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는다. 나는 홀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강한 역겨움이 치민다.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지? 대체 왜 휴머니즘에 대해 지껄이는 일에 끼어들었지? 저 사람들은 왜 여기에 있지? 저들은 왜 먹고 있지? 물론 저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사실이다. 나는 떠나고 싶다. 진정한 나의 자리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내가 딱 들어맞는 곳으로 하지만 내 자리는 아무데도 없다. 나는 잉여적인 존재다.’  

   

독학자와의 논쟁가운데서 로캉탱은 다시 구토를 경험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도 못하는 저들 가운데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자리가 아무데도 없다는 절망감이 그를 스스로 잉여적인 존재로 규정하게 한다. 생각해보니 바로 이러한 불안과 절망이야말로 인간을 실존으로 이끄는 중요한 매개체다. 인간은 불안 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 끝에 절망하는 존재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러한 불안과 절망을 연구했고, 그 절망의 끝에서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신앙의 기사로 ‘믿음의 도약’을 하는 것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실존은 그렇지 않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 없는 세계 안에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을 로캉탱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구토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를 빨리 떠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병이나, 일시적인 발작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로캉탱은 구토가 단순히 어떤 특별한 증세가 아님을 깨닫는다. 바로 자기 자신 그 자체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거북해하고 당황해하는 무수한 존재자들이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각 존재자는 당황해하고 막연하게 불안해하면서

스스로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쓸데없이 더해진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이 더해짐, 이것은 그 나무들, 그 철책들,

그 자갈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더 이상 사물과 맞물리지 않았다.

내 맞은편, 약간 왼쪽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는 쓸데없었다. 벨레다 상도 쓸데없었다 .....


그리고 무기력하고, 축 늘어져 있고, 음란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며 음울한 생각들을 곱씹고 있는

나 역시도 쓸데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그것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불안했으니,

 그것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두렵다. 그게 머리 뒤에서 나를 붙잡아, 나를 너울처럼 들어 올릴까 봐 두렵다).

나는 적어도 이 쓸데없는 존재들 중의 하나를 없애 버리기 위해 자신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막연하게 꿈꿨다. 하지만 나의 죽음 자체도 쓸데없을 것이었다. 나의 시체도 쓸데없고, 이 플라타너스들 사이, 이 미소 짓는 공원 안쪽의 자갈밭에 뿌려질 피도 쓸데없을 터였다. 그리고 벌레들이 파먹을 살도 그것을 받아들일 땅속에서 쓸데없고, 마지막으로 껍질이 벗겨지고 닦여 이빨처럼 깨끗하고 깔끔해질 내 뼈들도 쓸데없을 것이었다.

나는 영원히 쓸데없었다.

이제 '부조리'라는 단어가 내 펜 끝에서 흘러나온다.’    

 

이 소설에서 ’부조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이다. 모든 사물이 쓸데없이 느껴지고, 자신의 존재조차 쓸데없다는 깨달음과 거기서 발생하는 두려움과 불안, 자기 자신조차 제거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 그 영원성에 대한 절망이 바로 부조리인 것이다.     

 

 나는 구토를 이해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내가 발견한 것들을 자신에게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쉽게 말로 표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우연성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타나고,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지만, 결코 연역 될 수 없다. 난 이점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의 원인이 되는 필연적 존재를 꾸며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어떤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연성은 가장이나 흩트려 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며, 따라서 완전한 무상이다.

모든 것이 무상적이다. 이 공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간혹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되는데,

그러면 속이 뒤집어지고, 저번 저녁에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그랬듯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구토다.

하지만 얼마나 한심한 거짓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무상적이고,

자신이 쓸데없는 존재임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쓸데없다.

 즉 형태가 없고, 모호하고 처량하다.’     


 그리고 구토를 정의한다. 삶은 그저 우연적일뿐 필연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모든 존재가 곧 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쓸데없음을 깨닫는 것이 부조리였다면, 이것을 깨달을 때 속이 뒤집어지고, 모든 것이 떠다니게 되는 이 현상이 구토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쓸데있는 존재임을 강조하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무의미 속에서의 발버둥에 불과하다고 로캉탱은 비판하고 있다.      

     

세계는 뒤에도, 앞에도, 어디에 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순간조차 없었다. 바로 이 점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물론 이 점액질의 애벌레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벌써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 눈을 크게 뜨고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라는 것은 내 머릿 속의 하나의 관념, 이 끝없는 공간 가운데에 떠다니며 존재하는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이 무는 존재 이전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였으며

 수많은 다른 존재들 후에 나타난 것이다.’   

  

사르트르가 쓴 저서 중 ‘존재와 무’라는 철학책이 있다. 사르트르의 ‘구토’가 사르트르의 초기작인 만큼 이 초기작 안에는 중기, 후기의 사르트르의 사상이 파편적으로 모두 담겨있는 듯 했다. 지금 세계는 존재한다. 그런데 세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문제는 그 무의 상태는 일단 우리가 여기 있고, 생각할때만이 가능하다. 즉 ‘무’는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무’는 결국 하나의 존재이며,

수많은 존재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고 규정한다.      


난 자유다. 이제 살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시도해본 이유들은 다 실패했고, 더 이상 다른 이유들을 상상할 수 없다. 난 아직 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충분하다. 하지만 다시 시작해야 하나? 가장 극심한 두려움과 가장 끔찍한 구토가 찾아왔을 때, 안니가 날 구해줄 거라고 얼마나 기대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내 과거도 죽고, 롤르봉 씨도 죽었고, 돌아온 안니는 내 모든 희망을 앗아갔을 뿐이다    

 

결국 로캉탱은 옛 연인, 그래도 다시 재결합할 생각까지 했던 안니와의 만남도 고통으로 끝나버린다.

그는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그 자유는 삶을 살 이유가 없음을 확인하는 자유다.     


이 깊고 깊은 권태는 존재의 깊은 핵심, 나 자신을 이루고 있는 질료 그 자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자신을 돌보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오늘 아침, 나는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다. 다만 자신을 돌보는 이 자잘한 행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공허한 행위들을 해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대신하여 습관들이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습관들은 죽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계속 부산하게 움직이고, 그 물망들을 아주 조용히, 아주 음험하게 짜나간다.

그것들은 유모들처럼 나를 씻어주고 닦아주고, 옷을 입혀준다.’     


나는 삶을 부지런히 정신없이 살아가니 권태롭지 않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태의 끝에 있는 로캉탱 또한 자신을 돌보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즉 삶을 유지하는 생의 습관들의 무서움. 그 습관들이 계속 살아있기에 권태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도 자기 할 일을 하게 된다.      


그들은 모든 게 메커니즘에 의해 이뤄지며, 세상은 고정된 불변의 법칙들을 따른다는 증거를 하루에도 백 번은 본다. 허공에 떨어뜨린 물체는 전속력으로 낙하하며, 공원은 겨울철에는 매일 오후 5시에, 여름철에는 오후 6시에 닫히며 납은 섭씨 335도에 용해되고, 시청에서 막차는 밤 1120분에 출발한다. 그들은 평온하며 약간 침울하다. 내일을, 다시 말해서 새로운 오늘을 생각한다.

도시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아침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하루뿐이다.

일요일에 아주 조금 모양을 낼 수 있을 뿐이다.

멍청이들. 저들의 두껍고도 안심하는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역겹기 그지없다.

저들은 법을 제정하고, 대중소설을 쓰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는 극도로 멍청한 짓거리들을 한다   

  

로캉탱은 일반화된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증오한다. 매일 아침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도시의 삶을 증오한다.      


나는 두 도시 사이에 있다. 하나는 나를 모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나를 알지 못한다. 누가 나를 기억할까? 어쩌면 지금 런던에 있는 그 둔중한 젊은 여자일지도 모르겠다.설사 그렇다 해도,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나일까? 거기에는 그 친구, 이집트 사내가 있다. 어쩌면 그는 방금 그녀의 방에 들어와.

그녀를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니도 떠나버린 지금 로캉탱은 부빌이라는 도시와 파리라는 도시 사이에 놓여있다. 부빌에서 전기를 쓰고자 몇 년을 보냈으나 지금의 절망 끝에 파리로 떠나려는 중이다. 문제는 파리로 간다고 지금의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그리고 ‘누가 나를 기억할까?’ 라는 의문을 통해 로캉탱이 부조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방향성이 슬며시 드러난다.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그럼에도 타인이 나를 기억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제 내가 ''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난 더 이상 나 자신을 잘 느낄 수 없다. 그 정도로 나는 잊혀버린 것이다. 내 안에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 존재뿐이다. 나는 천천히, 길게 하품을 한다. 아무도 없다. 아무에게도 앙투안 로캉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재미있게 느껴진다. 앙투안 로캉탱, 이게 대체 무엇이지? 추상적인 것이다. 내 의식 속에서 나에 대한 아주 작고 흐릿한 추억이 희미하게 깜빡인다. 앙투안 로캉탱. 갑자기 ''는 더 흐릿해지고, 흐릿해져, 마침내 모든 게 끝난다.

꺼져버린 것 이다.’     


이제 로캉탱은 자기가 자신을 느끼는 것 조차 힘들어지는 상태다. 추상화된 자기. 꺼져가는 자기를 구원할 방향은 결국 자기 안에서가 아닌 타인에게서가 아닐까? ‘누가 나를 기억할까?’처럼 타자 가운데 나를 기억하게 하는 것. 나조차 잃어버린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은 결국 타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일어선다 해도, 저 음반을 회전판에서 빼낸다 해도, 그것을 두 쪽으로 쪼갠다 해도,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저 위에 있다. 항상 무언가의 위에 어떤 목소리 위에, 어떤 바이올린 음 위에 있다. 그것은 두께들, 존재의 두께들을 통해 가늘면서도 단단한 자산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잡으려 하면, 존재하는 것들만 닿을 뿐이고,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들에만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그것들 뒤에 있다. 심지어 그것은 내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그저 음향들과 그것을 드러내 는 공기의 진동만이 들릴 뿐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에는 쓸데없는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것에 대해 쓸데없다. 그것은 그저 있다.   

  

의외의 장소, 의외의 것이 로캉탱의 생각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그는 파리로 떠나는 기차를 타기 직전에 그저 자주 가던 술집에서 인사를 하러 들려본다. 그런데 거기서 자신이 자주 듣던 옛 레코드 ‘some of these days’ 라는 음악을 마지막으로 듣게 된다. 거기서 그는 그 음악 뒤에 있는 그 ‘무엇’의 힘을 느끼게 된다. 쓸데없는게 하나도 없는 존재라니! 모든 것이 쓸데없다고 느끼던 절망 가운데 꽉찬 의미와 존재를 드러내는 그것을 이 음반의 선율속에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도 그저 있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것만을 원하고, 그것이 내 삶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밀이었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내 삶이 이제 명확히 들여다보인다. 서로 관계가 없어 보였던 그 모든 시도들의 저변에서 동일한 바람을 발견하니, 그것은 존재를 내 밖으로 쫓아버 리고 싶은 바람, 각 순간에서 기름기를 빼내고 싶은 바람. 각 순간을 빨래 짜듯 짜서 말리고 싶은 바람, 나를 순수하고 단단하게 만들고 싶은 바람, 그리하여 결국 색소폰의 음처럼 분명하고 정확한 소리를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

하지만 과거도, 미래도 없이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굴러떨어지는 존재자 뒤에, 매일매일 해체되고 닮아 가고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이 소리들 뒤에서

멜로디는 가차 없는 증인처럼 늘 변함없이 젊고 굳세다.’     


 색소폰의 음은 분명,명확하다. 음표에 써진대로 분명하게 연주된다. 연주되는 멜로디는 늘 변함없이 젊고 굳세기에 흐물어지는 현재의 존재에 어떤 고정축이 되어준다. 로캉탱을 지탱해줄 그 무엇의 등장이다.  

   

7월의 어느 날, 푹푹 찌는 어두운 방 안에서 이 곡을 작곡한 저쪽의 그 친구를 생각한다. 나는 이 멜로디를 통해, 색소폰의 희고 시큼한 음들을 통해 그를 생각하려 해본다. 그는 이것을 만들었다. 그에게는 삶의 골칫거리들이 있었고, 모든 게 그렇게 여의치만은 않았다. 치러야 할 계산서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그가 원하는 식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어떤 여자가 어딘가에 있었을 거다. 또 그리고 사람들을 뚝뚝 녹아내리는 비겟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이 끔찍한 무더위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예쁜 게, 영광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듣고, 그것을 만든 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의 고통과 그의 땀방울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는 운이 좋았다. 아마도 그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 이다. 그냥 운이 조금 있으면, 이게 나한테 50달러를 가져 다주겠지'라고 생각했으리라! , 그런데 어떤 남자가 이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실로 수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친구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 그에게 어떤 종류의 골칫거리가 있었는지, 그에게 여자가 있었는지 아니면 혼자 살았는지 알게 된다면 홍미로울 것 같다. 휴머니즘 때문에 그러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냥 그가 이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로캉탱은 그 음악을 만든 작곡가를 상상해 본다.

분명 그 작곡가도 지구 어디에선가 자기 음악을 듣고 삶의 축을 발견하는 로캉탱같은 사람이 있을거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역시 그저 살기 위해 50달러를 위해 곡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로캉탱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서 그 작곡가를 궁금해하고 있다.


그녀는 노래한다. , 이렇게 유대인과 흑인 여자, 두 사람이 구원받았다. 구원받은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존재 속에 파묻혀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틋하게 그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로캉탱은 이 노래를 부른 가수를 상상해 본다. 결국 작곡가와 가수 두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왜 구원인가? 바로 로캉탱이 이 순간 그들을 기억하고 생각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령 죽었더라도 영원을 선취한 것이다. 로캉탱은 자신도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로캉탱은 자신이 할 일을 깨닫는다.     


나도 한번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물론 어떤 음악은 아닐 테고다른 장르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떤 책이어야 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그렇다. 로캉탱의 구원의 가능성은 바로 그의 글쓰기에 있다.

단 그가 그동안 썼던 타인의 인생을 짐작해서 써내는 전기가 아니다.

로캉탱은 소설이야말로 ‘some of these days’처럼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게 하면서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기억이라는 과거안에서 드디어 로캉탱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

 자기 삶을 혐오감없이 받아들일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나는데 과연 내가 소설을 읽은 것일까?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런 묘한 기분속에서 다시 한번 ‘구토’를 읽어야 했다. 다시 읽으니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런 정리가 가능했던 것 같다. 이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르트르 그 자신의 이야기이자 그의 사상에 대한 설명과도 같았다.

 한편 그가 찾은 결론은 ‘그렇구나’싶으면서도 뭔가 심심함도 있었다.

정말 많은 부분인 삶에 대한 권태와 불안,절망에 할애되었는데

그 끝에서 이렇게 갑자기 해결책을 찾아도 되는가에 대한 민망함이랄까.

그리고 의구심이기도 했다. 정말 그러면 권태가, 구토가 사라지고 자기 삶을 직시할 수 있겠는가.

 분명 나 역시 책을 읽음으로써 내 존재의미를 느끼고,

거기서 글로 나아갈 때 무언가 한 꼭지씩 완성되어간다는 느낌이 있다.

그런면에서 나는 구토의 결론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도 나중에는 앙가주망,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한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의 방법이라는 변주가 가능하며,

또 혹은 키에르케고르처럼 결국 인간의 쾌락도 윤리도

모두 한계가 명확하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즉 구원은 절대적인 신 앞에서 믿음의 도약을 통해 신앙의 기사로 거듭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결국 음악속에서든, 소설속에서든 결국 내가 나를 인식하는 방법으로는 이래저래 한계가 있고, 결국 타인의 기억 속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사르트르나,

신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키에르케고르나

둘 다 결국 타자성을 강조하는 셈이 아닐까.

구원은 내가 아닌 나 너머의 타자의 영역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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