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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an 23. 2021

그래서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1편

정의란 무엇인가 8장 핵심정리

https://youtu.be/EFDW-BCp6iY




  그래서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아리스토텔레스

 학교 미식축구응원단으로 휠체어를 탄 장애를 갖은 학생의 자격의 문제

  - 공정성의 문제

  - 영광과 분노의 연관성

응원단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려운 고난이도의 동작이라면 장애가 있는 학생은 적합하지 않겠으나, 응원이 애교심을 높이고 관중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에 있다면 고난이도의 동작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학생의 응원단 참여에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응원단원들의 노력에 따른 영광을 장애학생이 상대적으로 쉽게 차지한다는 것에 대한 느낌에 있다. 즉 응원단의 상징과도 같은 고난이도 동작들에 대한 응원기술이 더 이상 필수요소가 아니게 되며, 볼거리의 하나로만 전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응원단원 자리를 할당하는 공정한 방법을 정하려면 응원의 본질과 목적을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과정에서 어떤 자질이 영광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 즉  응원단의 사례처럼 응원의 사회적 행위는 도구적 목적(팀 응원)만이 아니라 영광과 모범을 제시하는 목적(특정한 우수성과 미덕을 축하하기)도 수행한다. 그래서 학교는 응원단원을 뽑을 때 애교심을 높일 자질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싶어하는 자질도 살펴본다. 기본적으로 그런 전통적 미덕에 대한 기준이 있는데 이것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면 논쟁점이 되는 것이다.     


정의,텔로스,영광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1.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목적,목표,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의 정의론은 영광,미덕,도덕적 가치 문제에서 공정성과 권리를 분리하고자 한다.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아내 자신의 목적을 직접 선택하고 추구하게 하려는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의는 영광,미덕,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논쟁이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왜 정의는 좋은 삶과 연관되어야 하는가? 

정의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그러한 능력과 자격의 근거는 무엇인가?

 최고의 플루트는 최고의 연주자에게 돌아가야 하는 사례. 부나 신분, 외적 아름다움, 우연등의 기준에 따라 적용되어서는 안됨. 물론 최고의 플롯이 최고의 연주자에게 돌아가야 음악을 듣는 청중에게도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다.(공리주의)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결과적 이유때문이 아니라, 그런 분배가 플루트의 존재 이유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본다.

 플루트이 목적 자체가 뛰어난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목적을 실현할 최적의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추론방식을 목적론적 추론이라고 한다.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재화의 텔로스, 목적을 물어야 한다.

 고대에는 목적론적 사고가 흔했었다. 불이 위로 솟는 이유는 본래의 자리인 하늘에 닿기 위해서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원래 속해 있던 땅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즉 자연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의 목적과 본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근대과학의 발전에게는 자연은 더 이상 의미있는 질서로 인식되지 않고, 그저 물리법칙에 지배되는 세계로 보았다. 기계론적 사고. 즉 기존의 고대적 사유는 의인화된 사고로 여겨졌고 배척되었다. 과학이 목적론적 사고를 거부하자 정치와 도덕도 그러한 사고를 거부하려 든다. 그러나 사회조직과 정치행위를 생각할 때 목적론적 추론을 버리기는 쉽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대학의 텔로스      

소수자우대정책에 있어서도 텔로스를 적용할 수 있다. 대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학업 성취? 시민의 목적에 봉사? 대학의 텔로스를 가려내는 일은 적절한 입학기준을 결정하는 필수적이다. 대학은 어떤 미덕과 우수성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어야 하는가?? 대학을 학문적 우수성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소수자우대정책을 반대할 것이지만 대학은 그 이상으로 특정한 공적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텔로스를 두고 이견을 보이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성적으로 판단가능한가? 아님 권력자가 정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조직의 목적을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직의 본질은 단번에 정해지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의견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의견이 대립할 때 사회조직의 목적을 이성적으로 정하는 방법은 또 무엇인가? 결국 정치의 문제다.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치연합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폴리스라면 선을 장려하는 목적에 몰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 연합은 단지 동맹으로 전락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두정치를 행하는 독재자들도, 민주주의자들도 모두 비판한다. 과두정치가들은 부자인 자기들이 통치를 하고자 하고,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신분이 시민권과 정치권력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본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가 재산을 보호하거나 경제적 풍요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과두정치가들은 틀렸다. 또한 정치 공동체는 다수에게 주도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민주주의자들은 틀렸다. 정치의 목적은 다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숭고한 행위인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께 살아도 떨어져 살 때와 교류의식이 달라진 게 없다면 그 연합은 진정한 폴리스가 아닌 것이다.      

정치공동체가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공직과 영광의 분배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대상의 목적, 즉 이러한 성격의 연합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사람은 바로 시민의 미덕이 탁월한 사람, 공동선을 숙고하는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최고의 부자도, 다수도, 혹은 외모도 아닌, 시민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정치는 정말 좋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가? 오늘날 정치를 필요악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정치를 특별한 이해관계,부패,타협등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떠올린다. 혹은 사회정의의 도구로 여기더라도 선의 필수요소처럼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정치 참여를 삶의 필수요소로 보았나?

 그 답은 우리의 본성에 있다. 폴리스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할 때만이 우리의 본성을 아낌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만들지 않았는데 인간에게는 바로 언어능력이 있다. 그 언어는 단지 기록의 수단이 아니라, 무엇이 공정하고 무엇이 불공정한지 선언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역할이다. 인간은 정치 연합에서만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발휘한다. 폴리스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을 고민하고 좋은 삶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다. 폴리스는 애초부터 존재하고 개인에 앞선다. 따라서 인간은 폴리스에 살면서 본성을 완성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 선과 악, 공정과 부정을 고민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적 삶도 행복을 목표로 하지만 그 행복은 공리주의의 쾌락과는 다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대상을 구별할 줄 안다. 도덕적 우수성이란 쾌락과 고통을 모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구별하여 고상한 것에서 기쁨을, 천박한 것에서 고통을 느끼는 데 있다. 투견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것을 우리는 극복해야할 악으로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행복은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미덕으로 가득한 삶을 구현하는 것도 이론 및 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폴리스 안에서 관계와 실천을 통해 습관의 결과로 도덕적 미덕이 형성되는 것이다.      


행동으로 터득하기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법의 일차 목표는 좋은 인격 형성을 습관화하는 것에 있다. 입법자들은 시민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어 시민을 선량하게 만드는데 일조해야 한다. 좋은 헌법과 나쁜 헌법의 차이는 여기에 달려있다.

 그리고 도덕교육은 규칙을 선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습관을 기르고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어릴 적 어떤 습관을 키우는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상당하다. 습관은 도덕교육의 첫 단계이며 습관이 형성될 때야말로 습관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행동을 연습하면 나중에는 미덕이 깃든 마음이 생긴다. 고맙다는 편지를 자주 쓰다 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어른거리는 것이다.

 도덕적 미덕은 극단 사이의 중용으로 이루어지는데 주어진 상황에서 중용을 식별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도덕적 미덕에는 판단능력이 필요하다. 실천적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특정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실천적 지혜는 선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이며, 정치적인 면이 내재된 도덕적 가치다.      


정치와 좋은 삶     

 결국 정치는 좋은 삶의 필수요소로써 첫째 폴리스의 법은 우리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며, 시민의 미덕을 갖추게 한다. 둘째 심사숙고 능력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다 더 숭고하고 까다로운 존재다. 정치의 목적은 단지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며, 공정한 규칙 제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능력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찬성했었다.

 그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인데 권리 할당이란 사회조직의 텔로스를 확인한 뒤에 그것과 관련한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본성을 실현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그런데 근현대의 정치론은 적합성 개념을 불편해 한다. 칸트와 롤스에 이르는 자유주의 정치론은 목적론적 사고와 자유가 어울린다고 보지 않았다. 정의는 적합성이 아닌 선택의 문제라 보았다.

 이런 자유주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자칫 위험하다. 노예제 옹호 또한 그러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노예에 적합한 본성을 가진 자로 현재의 노예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유주의는 적합성이 아닌 선택에 따른 할당인 만큼 노예제가 강제라는 점에서 반대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옹호했다고 해도 그의 목적론적 사고 전체가 틀렸다고 봐서는 안 된다. 그의 논거 안에도 노예제를 비판할 근거 역시 가득하다. 오히려 선택과 합의 자유논거보다 엄격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노예제 조건은 두가지다. 하나는 노예가 꼭 필요해야 한다는 점. 두 번째는 천성적으로 그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가지가 모두 충족될때만이 가능하다. 당시 폴리스에 참여하기 위해 노예제는 필수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노예가 본성에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노예가 필요해도 노예제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다. 문제는 노예가 천성인 사람이 있다고 그는 보았다. 노예의 천성을 타고난 사람!

 물론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대견해를 가진 사람도 어느 정도는 옳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고 덧붙인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순전히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강제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노예에 적합한 자인지 판별할 수 있을까? 물리적 힘을 동원해 다뤄야 한다면 그는 노예에 맞지 않는다. 강요는 부당함의 증거다. 본성에 맞다면 무력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론에 따르면 노예제는 강요를 동반하므로 부당하다. 목적론에 따르면 노예제는 천성과 맞지 않아서 부당하다. 노예제의 부당함은 텔로스와 적합성이라는 윤리로 설명가능하다.

 텔로스와 적합성의 윤리가 일터에서 요구하는 정의의 도덕적 기준이 선택과 합의의 자유주의 윤리기준보다 까다롭다.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열악하고 위험한 직업의 정당성을 따져보자.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노동자의 노동력과 자본가의 임금이 자유롭게 교환되었다면 문제삼지 않는다. 롤스라면 주변 여건이 공정한 상태였는가를 따지면서 공정한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교환이라면 인정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일이 정당하려면 노동자의 본성에 맞는가를 따진다. 우리 본성에 맞도록 일을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미 프로골프협회에서 카트이용이 가능한가에 대한 논쟁- 장애인 선수에게 카트이용을 허용하는 것이 골프의 본질을 바꾸는 행위라고 해서 반대하는 입장이 있었다. 즉 골프의 목적, 본질을 물어야 한다. 반대로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그 목적을 ‘샷을 하는 행위’로 본다. 그렇다면 장애가 있는 선수가 카트를 이용하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골프를 만약 오락으로만 여긴다면, 혹은 골프의 규칙들 또한 임의적으로 정해지는 것에 불과한다고 본다면 이는 스포츠를 얕보는 정리가 된다. 왜냐하면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종목의 규칙이 경탄할 만한 기술과 재능을 요구하고 축하하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냥 놀이이며, 임의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면 분노할 것이다. 그저 단순한 볼거리에 불과한 것이 스포츠인가.

 결국 골프 및 스포츠에서 공정성의 문제들도 결국 텔로스와 연관됨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목적을 무시하고 단순한 공정성을 따져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진짜 형평성이 문제였다면 모든 골프선수에게 카트를 허용하면 될일이다. 그러나 어떤 선수도 카트를 타면서 경기에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영광과 인정의 문제다. 수많은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들이 그저 편하게 카트를 타고 다니며 샷만 정확히 하는 것에 환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뛰어난 선수들이 영광을 얻고 인정을 받으려면 스포츠가 힘든 경기로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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