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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내린 판단은 결코 없다. 그날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연 게 아니었다. 첫마디에서 너는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내 말들을 이미 아는 듯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 이건 잔인한 일이었다.
뜨거운 여름날이다. 그날의 여름은 뜨거운 태양에 구름마저 태워진 듯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자외선이 더욱 심할 것을 안 나는 흰 티를 입었다. 내면은 어쩌면 외면에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순간마저 이기적이었다.
너의 집 앞으로 나섰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후회할 거 같으면서도 지금 당장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었고, 결국 그 결심이 내 발을 한 발짝 한 발짝 너의 집 앞으로 향하게 해 줬다.
발걸음이 멈춘 거리에선 한창 인적이 많은 오후 시간대지만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았다. 왜일까 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일까. 내 머리에선 이미 엔딩을 그렸던 것일까. 한숨을 두세 번 쉬었을 때였을까. 저기 저 편에서 네가 걸어왔다.
너는 표정이 어두웠다. 순간 우리 사이로 차 하나가 지나고, 너의 표정은 이내 다시 밝아졌다. 처음 만난 날의 그 표정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다가 막혔다. 왜인지 그 자리에서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끝을 예감한 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이 그날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의 독한 마음을 품고 한걸음 또 나섰다.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애석하게도 바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한지 모르겠다. 말을 뱉은 순간에는 너무나도 어지러웠다. 오늘의 인사가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전하는 말이었던 거 같다. 고개를 푹 숙이던 네가 이내 고개를 살며시 들었을 때,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 알게 되었다. 너의 턱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곳에 내 얼굴이 비추어지는 것만 같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한참일 것 같은 시간이 단 몇 초라는 것을 안 건 너의 대답을 들었을 때다. 제대로 듣지 못한 대답을 나도 예언이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을 숙인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앞에 들어온 건 너의 뒷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이 너무나도 외로워 보여 금방이라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의 등에 큰 가시라도 박힌 듯 겁이 났다. 뒤돌아 집에 가는 길엔 나도 모르게 너의 뒷모습을 흉내 내어 걸었다. 왜 그럴까, 왜 이제야 눈물이 나는 걸까.
우리 둘의 시간은 너무나도 맞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