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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주리 Jan 26. 2023

사건 일기 4

<2023년 1월과 가족여행 2부>

2일 차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다가 보이는 오션뷰 숙소에 예약까지 했건만... 해는 보이지 않았다. (일출 특징 = 굳이 보러 가면 안 보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일출도 못 본 김에 느긋하게 체크아웃한 뒤에 속초로 향했다. 난데없는 루트긴 하지만 우리는 그저 오징어순대생선구이가 먹고 싶었다. 내가 대학교에서 자취하고 있었을 때, 나 없는 가족여행을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바이마을에서 생선구이를 먹었다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다고 했다.


속초까지 가는 길목에는 삼척이 있다. 어머니는 삼척에 있는 쏠비치가 사진이 예쁘게 잘 찍힌다고 했고, 우리 엄마 사진 잘 찍으니까 가면 좋겠다 싶었다. 몰랐는데 쏠비치는 호텔 이름이었다.


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관광지를 고동색 표지판으로 표시해 둔 걸 본 적 있을 것이다. 보통 무슨 유적이나 촬영지, 문화시설 등을 그렇게 표시해두곤 한다. 쏠비치도 고동색 표지판으로 보이길래, 나는 무슨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일 줄 알았다. 그런데 리조트길래 좀 크게 당황했다.


"숙박도 안 하는데 들어와도 될까?"

"우리가 숙박 안 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런가..."


당당히 걸어가는 엄마 옆에 잔뜩 쫄아든 채로 촌티를 풀풀 풍기며 따라다녔는데, 당연히 그렇겠지만 우리더러 어떻게 들어왔냐고 내쫓는 무서운 가드 아저씨들은 없었다. 이런 호텔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쇼핑몰에 놀러 간 느낌이었다... 투숙객 전용일 것 같은 이용시설들을 얌전히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가니 사진 찍을만한 곳이 나왔다. 그리스의 산토리니(일리오스) 풍으로 꾸며진 호텔이어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해변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호텔 곳곳에는 마마티라라는 카페에 놀러 오라고 써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엄청난 곳이길래 이런 커다란 호텔이 작정하고 홍보를 해주는 걸까... 빵을 판다길래 마침 배고팠던 참에 들러보기로 했다.


마마티라에서 판매하는 스콘들


이곳은 조금 뜬금없지만 돈키호테(?) 테마의... 당나귀 컨셉에 진심인 베이커리 카페였다. 문 앞에 당나귀 동상이 있었는데, Cash도 Card도 받지 않고 Carrot만 받는 당나귀 택시라더라. 나와는 상극인 녀석이다. 나는 당근을 싫어한다. 안 익은 당근은 특히 끔찍하다. 음식에 당근을 기필코 넣어야 한다면... 물렁해질 때까지 익혀서 으스러뜨려야 괜찮다.


빵 종류로는 스콘들을 팔고 있었는데, 시그니처 메뉴가 '동키푸푸'였다. 해석하자면 당나귀똥이다.(와, 당나귀똥이 정말 맛있어요!) 개당 6~7천 원 정도 가격이었다. 물론 나는 스콘이 보통 얼마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기분도 기분이고, 온 김에 사는 거고, 배도 고프고, 빵 냄새가 또 억수로 좋아서 그냥 하나씩 골라 사자고 했다.


4개를 골라갔더니 이벤트인지 묶음상품인지 직원 분들이 29000원에 6개 세트가 있다며 유도했다. 직원 분들이 다들 굉장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듣고 있었더니, 어라. 어느새 손에 스콘 6개가 들려있었다. 사면 예쁘게 포장도 해주고 (다 해주는 거겠지만) 무슨 수제 세제도 준다.


스콘은 처음 먹어봤는데, 첫인상으로는 겉은 딱딱하고 안은 푸석한 느낌일 것 같았다. 그런데 맛에 따라 모양도 식감도 달랐다. 말차, 플레인, 허니고르곤졸라, 파, 타코야키 등 다양했다. 개인적으론 안에 당근잼이 들어있는 '동키푸푸'가 제일 맛있었다. 분명 당근이 싫은데, 당근케이크나 잼, 주스는 왜 맛있는 걸까.


삼척을 지나서 속초 아바이마을로 향했다. 사람 한 두 명 볼까 말까 했던 울진과는 다르게, 속초는 초입부터 사람이 많았다. 티어가 높은(?) 관광지 다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눈도 잔뜩 왔었는지 도로에 차선 하나씩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보행자의 편의는 완전히 포기해 버린 건지, 인도 쪽으로 눈을 밀어서(눈이 얼어서 벽돌처럼 되어 있었다.) 사람이 걸어 다닐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아바이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 갯배를 타러 갔다. 승선료는 인당 500원.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건지, 케이블 선을 쇠고리 같은 도구로 직접 끌어당기는 최첨단 수동(...) 방식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갯배를 끄는 분들이 자꾸 '남자들 뭐 해, 나와서 끌어야지' 라며 부추겼는데 쇠고리가 딱히 만지고 싶은 비주얼은 아니었다...


모둠 생선구이


모둠 생선구이와 순대 세트가 있었다. 생선구이는 임연수, 고등어, 열기, 꽁치, 가자미, 조기, 열기, 양미리로 8종류였는데 초벌이 된 상태로 나왔다. 맛있었던 순서대로 나열했다. 네 명이서도 먹기 충분한 양이었는데, 오징어순대가 맛있어서 한 번 더 주문해서 먹었다. 비싼 감은 있었지만 원래 생선이 밖에서 먹으면 좀 비싸지 않나... 집에서 먹자니 냄새나고 밖에서 먹자니 비싸고 진퇴양난이로고.


밥을 먹은 뒤에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커피도 마시고 핸드폰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느긋하게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화가 탁상이 넓다 -> 보드게임 하기 좋겠다 -> 보드게임 재밌겠다 -> 숙소 가서 보드게임이나 하자로 전개되면서 곧바로 숙소로 향하게 되었다.


조금 웃기지만, 우리 가족이 숙소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게 식탁 크기를 가늠한 것이었다. 오 이 정도면 울진보다 크잖아. 그 뒤에야 이곳이 방 두 개에 각각 침대가 하나씩 들어있는 20평짜리 방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리조트는 리조트구나. 모텔 바닥에 이불 깔고 잤던 어제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밥을 안치기 무섭게 보드게임을 들고 모였다. 사실 가족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그때까지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가 부모님의 게이머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캐스캐디아>는 그런 의미에서 참 대단한 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전날 초급-중급자용 룰만 하다가 드디어 A룰을 적용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적응했다. 얘기하자니 자존심 상하지만, 내가 매번 이기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전력으로 머리를 써도 꼴찌 할 때도 있었다...


보드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면 '어떻게 하면 실감 나게 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이것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보드게임의 매력에 빠뜨리기 위한 일종의 계략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민도 처음 몇 번뿐에 불과한 오만한 생각이었다... 왜 이렇게 잘해. 이기면 이겼다고 신나서 한 판 더하고, 지면 졌다고 화나서 한 판 더하고.


저녁으로는 한우를 구워 먹었는데, 리조트에 비치된 주방도구들이 너무 형편없어서 걱정이었다. 프라이팬은 코팅이 다 벗겨져 있었고 집게도 없었다. 하지만 고기가 한우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기대반 걱정반 구워낸 소고기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먹으려고 하던 차에 이것저것 딜레이가 돼서 본의 아니게 레스팅이 됐는지 육즙도 제대로 퍼져있고 부드러웠다.


밥 먹고 난 뒤에는 설거지빵 보드게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거지한 뒤에는 설욕전이, 설욕전 뒤에는 설욕전의 설욕전이...


<캐스캐디아> 점수 계산기록. 최대 20개다. 그럼 20판은 넘게 했다는 거겠지...


2일 차도 밤이 깊어질 때까지 <캐스캐디아> 삼매경이었다. 막판, 찐막판 이어가다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서야 게임판을 접었다.


3일 차엔 더 늦어지기 전에 일찍 집에 오기로 했다. 실제로 7시에 일어나서 찍어보니 2시간 반 거리였는데, 밥 먹고 보드게임 한 판 했더니(이쯤 되면 중독이다.) 차가 늘어났는지 3시간 반으로 늘어나 있더라. 후다닥 정리해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두런두런 얘기하며 이번 여행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뜬금없이 집까지 터널 개수가 몇 개인지 세겠다며 미니게임을 하셨고... (안산-강릉까지 터널은 61개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더 액티비티 한 것들을 하려고 하는 편이다. 팔팔한 20대 남자들끼리 놀러 가서 소나무숲 산책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분명 친구들과 하는 여행은 편안하게 망가지고 막말하며 뛰어노는 재미가 있다. 그에 반해 가족여행은 보다 차분하고 느긋하다. 재밌으면 장땡인 여행과 적당히 쉬는 여행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어렸을 땐 가족여행을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좋아서 가족여행을 가기 싫다고도 한 적 있었다. 먼 여행길에는 뒷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잠만 자던 철부지였고. 여행을 가더라도 시큰둥하고 무뚝뚝하게 행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덧 20대 후반이 돼서 운전대를 잡았다. 룸미러로 아버지의 자는 얼굴을 보는 기분이 오묘했다. 가족여행이 이렇게나 재밌게 느껴지기까지. 자식들과 부모님의 활동량, 감성, 생각이 엇비슷하게 되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구나. 우리의 주파수가 이제야 맞물렸다. 시간이 더 지나면 다시 어긋나게 되겠지. 그전까지는 최대한 재밌게 여행을 다니고 싶다. 보드게임 쇼핑몰을 괜히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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