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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주리 Jan 23. 2023

사건 일기 3

<2023년 1월과 가족여행 1부>

종종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편이다. 각자 바쁘지 않은 때. 보통은 연휴가 만들어지면 그렇다. 우리 가족은 집돌이-집순이지만, 여행은 좀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집에 있는 것을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막상 여행을 간다고 하면 부푼 마음을 감추질 못한다.


이번엔 울진에 다녀왔다. 경북까지 운전해서 갈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앞이 깜깜해지지만. 아침 일찍 출발하면 금방 도착하지 않을까? 운전을 좋아하는 나는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됐다.

5시간 30분? 잘못 봤나?


전날 저녁에 도시락까지 싸서 아침 일찍 출발하는데, 내비게이션이 조금 이상했다. 5시간 31분이나 걸릴 리가 없잖은가... 그러나 단순히 계산해도 361km라면, 시속 100km로 내달려도 3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인 거다.


도시락으로 싼 유부초밥을 아침으로 먹으며 운전했는데, 다행인지 차는 막히지 않았다. 안산에서 출발해서 광주(경기도), 횡성, 평창을 지나 강릉으로 가는 척하다가... (여기까지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차를 돌려 동해, 삼척을 지나쳤다. 그렇게 해서야 울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게 왜 제일 빠른 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강원도를 ㄱ 모양으로 횡단하는 코스였다.


6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12시였다. 내내 떠들면서 와서 시간 가는 줄 몰랐ㅈ...진 않고 시간 가는 줄 아주 잘 알았다. 웬만한 토크쇼를 해도 6시간가량을 논스톱으로 진행하진 않겠지. 


새파란 울진 바다


울진의 바다는 유난히 새파랬다. 맑은 바다를 흔히 에메랄드빛이라 하지만, 코발트블루에 가까운 색깔이었다. 오래 걸려 찾아온 만큼 더 예쁘게 느껴지는 바다였다. 파도가 많이 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도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울진군은 위아래로 길쭉한 구조다. 영덕에 맞닿을 정도까지 내려가면 후포항 근처에 등기산 스카이워크가 있다. 우리의 첫 방문지였다.


스카이워크는 아래가 뚫려 바다가 보이는 높은 전망대였다. 우리 가족이 원체 고소공포증 같은 게 없지만, 뻥 뚫린 바닥만 보고 걸으면 조금 후들거린다고 할 정도로 높았다. (사실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화유리로 되어있는 길이 길어봐야 얼마나 길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좀 더 길었다. 아래쪽엔 소원을 이뤄준다는 후포 갓바위가 있었는데, 로또 당첨을 간절하게 빌어놓고는 막상 복권 사는 걸 까먹어서 그냥 왔다. (?)


뒤쪽으로는 출렁다리와 공원이 있어서 느긋하게 한 바퀴 돌기 좋았다. 세계 각국의 등대들을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 둔 모형들이 이곳저곳에 있었다. 독일 등대나 이집트 등대 같은 걸 왜 두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신기해서 볼만했다.


다음 방문지는 월송정이었다. 한국원자력마이스터고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이름이 뭔가 엄청난 느낌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위로 높게 뻗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무식하게 넓지도 않고 식후에 가볍게 돌만한 정도였다. 소나무숲에서 보는 바다도 운치 있었다. 바다까지 넘어가 보고 돌아오는데 30분 걸렸나 싶을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불영사로 향했다. 우린 불교는 아니지만 절에 가는 걸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절이 위치한 곳이 보통 절경이기 때문이겠지. 웬만한 절은 대부분 운전해서 들어갈 수 있으니 등반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어려움도 없다.


불영사는 부처바위가 있는 곳이다. 연못에 부처바위가 비추어서 부처님의 그림자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우선 연못이 얼어있어서 뭐가 비추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여름에 타이밍이 잘 맞으면 비춰보일 수도?) 그런데 부처바위를 맨눈으로 봤을 때는 도대체 뭐가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내가 믿음이 부족한 탓이리라.


그냥 내 생각이지만...

임금 : 이건 마치 부처님의 형상 같구나.
신하 : 여윽시 전하 관찰력이 뛰어나십니다. (뭐라는 거야)
임금 : 저 바위를 부처바위라 하겠다!
신하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즈언하~ (대충 맞춰주자)

이렇게 되었다는 게 좀 더 말이 되지 않을까?


불영사는 절 자체의 풍경보다는, 절을 향하는 굽이굽이 산등성이길이 절경이었다. 계곡 사이의 암벽들이 기괴한 형태로 깎여 있어서 중간에 차를 대놓고 구경하기도 했다. 정말 오래된, 리얼한 절(어감이 이상하긴 한데)을 보고 싶다면 가는 것을 추천한다.


다음은 성류굴이었다. 동굴은 여기저기 많이 가봤지만, 성류굴만 한 동굴은 없었던 것 같다. 박쥐 5만 마리는 살 수 있을 것 같은 동굴을 인간이 뺏은 느낌이라 좀 미안하기까지 했다. 동굴이 크고 깊고 물이 뚝뚝 떨어져서(차갑다) 정말 신기하고 볼 게 많았다. 


기괴한 기둥들마다 웬 이름들을 붙여놓았는데, '두꺼비'라던가 '마녀의 얼굴'이라는 평범한 이름부터 해서 '로마의 모시깽이(기억 안 남)'라던가 하는 거창한 이름도 있고, '아기공룡둘리'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름도 있었다.


반쪽으로 쪼개진 '통일기원탑'이라는데... 다시 붙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머리를 숙이고 땅을 기고 계단을 오르는 등의 헐떡대야 할 일들이 많았다. 생각한 것보다 통로가 좁고(사람이 많으면) 동굴이 길기 때문에, 답답한 걸 불편해한다거나 보행에 불편함이 있다면 이 점을 주의하여 방문하는 게 좋겠다. 그러나 나도 스무스하게 통과할 정도로 적당히 넓기 때문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연한 사람이 유리한 것은 팩트라고 할 수 있겠다.


성류굴을 나와서는 식당을 찾아다녔다. 우리 여행의 특징은 어디서 뭘 먹을지 딱히 정해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충 뭘 먹는 게 좋겠다는 정도만 생각하고, 돌아다니다가 촉이 꽂히는 곳에 즉석으로 들어간다. 회를 먹는 게 좋겠다고 생각만 한 채로 막 달리다가 웬 항구를 발견했다.


바가지 맞는 거 아닌가 반쯤 걱정하며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세상 회를 그렇게 배 터지게 먹은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원래 나는 회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생선은 구워 먹는 게 맛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비싸기도 하고, 잘못 먹었다가 괜히 배 아플까 봐 걱정돼서다. (먹으면 아플 것이 분명한 치킨은 잘만 먹는다.)


물론 같은 가격에 다른 걸 먹으면 더 맛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회는 좋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잘 드시고 좋아하셔서 나까지 더 맛있게 먹은 느낌이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숙소로 향했는데, 사실 이때가 가장 긴장됐다. 부모님께 보드게임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순간이었다. 게임 이름은 <캐스캐디아>. 보드게임 카페에서 처음 플레이 해보자마자 반해서 그날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게임이다. 내가 보드게임을 처음 접하거나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막간을 이용해 <캐스캐디아>를 리뷰하자면, 동물 토큰과 지형 타일을 차례마다 하나씩 가져가서, 자신의 개인 타일에 붙이고, 동물에 따른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초심자용 점수카드는 같은 동물을 뭉쳐서 모으기만 하면 되는 쉬운 규칙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부모님도 잘할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시큰둥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반반 섞여서 긴장 속에 보드게임을 꺼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나는 보드게임을 설명할 때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하는데,

첫 번째로는 컨셉이다. 이 스토리를 이해해야 보드게임에 흥미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난이도다. 규칙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중요한 규칙들을 깜빡하기도 한다.)

그래야 안 떨어져 나가니까...


그런 점에서 <캐스캐디아>는 컨셉 설명도, 규칙 설명도 간단한 효자 게임이다. 부모님에게 설명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계속 눈치를 살폈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지켜봐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한 게임을 반복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한 건 처음이다...


나는 괴물을 키워내고 말았다. 오후 7시쯤부터 12시에 다다를 때까지 <캐스캐디아>를 주구장창 했다. 출출하니 편의점에 갔다가 하고, 씻고 모여서 하고, 맥주 마시면서 하고. 맥주 마시면서 하자고 하기에, 맥주를 쏟지는 않을까, 내 소중한 보드게임에 맥주가 묻지는 않을까... 어렴풋이 걱정이 스쳤지만(이것은 불효인가?)


부모님은 보드게임을 내가 다루는 것보다 더 조심하면서 다루었다. 심지어 과자는 손에 기름 묻을까 봐 젓가락으로 드셨다... 타일도 처음에는 화투 치듯이 촥촥 내려놓으시더니, 재미가 붙은 이후에는 살살 내려놓는 것이었다.


보드게임을 사랑하는 내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열렬하여 조금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입문시킨 사람들이니 어쩔 수 있으랴. 좋은 취미를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겠지. 벌써부터 다음 게임을 뭘 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박 3일간의 여행은

이제야 1박에 접어들 뿐이었다는 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2부에서 계속 (목요일 또는 그전에 내킬 때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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