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틸리티, 맨해튼, 니다벨리르, 요트 다이스>
친구들과는 언제부턴가 만나면 보드게임만 하게 됐다. 어렸을 때야 PC방에 살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각자 집에 좋은 컴퓨터를 두고 PC방에 갈 이유가 없지. 보드게임을 알게 된 건 대학생 때였다. <루미큐브>로 시작해서 <테라포밍마스>에 이르기까지, 주마다 한 번씩은 했던 것 같다. 다문화멘토링을 할 때는 지치지 않는 초딩들과 <할리갈리>나 <우노>를 정신없이 하기도 했었지...
졸업하고 나서는 보드게임을 할 일이 잘 없었다. 보드게임을 하기 위해선 첫째로 '보드게임'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넓은 책상'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같이 할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보드게임에 흥미를 가진 X알친구들(H, Y, S)을 꼬드겨 보드게임카페를 가자고 했다. H는 이미 나보다 보드게임에 더 진심이다...
프랜차이즈로 운영되는 보드게임카페는 많지만 뭔가 내키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사실은 이용료가 조금 비싸게 느껴진다. 게임 종류도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고. 결정적으로는 우리가 올 곳이 아닌 느낌이었다. 우리 같은 너드들이 네다섯 시간씩 녹이면서 진득하게 게임하는 데가 아니라, 커플이나 인싸들이 가볍게 파티게임 하러 오는 곳 같은 느낌이니까...
그러던 와중 동네에서 작게 운영되는 보드게임 카페를 발견한 적 있었다. 처음 보는 게임도 많았고 이용료도 굉장히 싸고 (입장 시 1인 1음료 필수 주문이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음료를 안 먹은 적은 없지만) 음식도 배달 주문해서 먹어도 되는 프리한 곳이었다. 서울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공간이겠지. 안산은 최고야. 여하튼 우리는 그곳을 아지트처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지트가 코로나를 이겨내지 못했다. 우리가 각자 바빠서 한동안 못 만나다가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을 때, 보드게임카페는 웬 학원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더 자주 갔어야 했는데...) 그래도 곧이어 송산그린시티가 개발되면서 또 다른 아지트를 찾았다. 사장님들도 친절하시고, 귀염둥이 마스코트 강아지도 있는 곳이다.
이건 보드게임에 능통하진 않지만 나름 보드게임을 좀 쳐본(?) 사람으로서 쓰는 리뷰. 이전까지 했던 게임들도 차차 리뷰할 예정이다.
[개인 만족도 점수]
J : 87점
Y : 85점
H : 85점
S의 늦잠으로 셋이서 먼저 만나서 하게 됐다. 우리가 오니까 사장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추천해주셨다. 퍼틸리티는 비옥이라는 뜻인데, 게임 테마가 나일강의 범람 이후로 비옥해진 땅을 일구는 것이라 그런 것 같다. 파라오의 총애를 받을 자가 누구냐.
각 플레이어는 중앙에 위치한 게임판에 자신의 계곡타일을 놓으며 자원을 수집하고, 구역타일을 개인판에 설치하며 점수를 쌓는다. 수집한 자원을 개인판에 곧바로 소모하지 않으면 없어져버린다... 계곡타일을 놓을 때도 밀을 먹을 것인가, 자원을 먹을 것인가, 고립을 만들어 기념물을 놓을 것인가 고민하는 재미도 있다. '내가 이걸 놓으면 다음 사람이 저걸 너무 맛있게 먹을 것 같은데...' 하면서 일부러 이상하게 두는 것도 묘미.
컴포넌트가 너무 작고 뽀짝해서 내 굵은 퉁퉁이 손가락으로는 집기가 살짝 어려웠다... 대신 4인플을 한다고 해도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은 굉장한 이점이라 볼 수 있다. (이거 자취방에서 하다가 쏟으면 대참사다.) 중앙판을 바꿀 수도 있고, 구역타일이 다양하기 때문에 다회차 플레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보드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들과 해도 어려움이 없는가? 를 생각할 때 꽤나 좋은 게임이다. 파티게임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전략게임을 한다면 퍼틸리티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최종점수는 밀 점수 + 구역타일 점수 + 기념물 점수 + 동물(신?) 점수를 합산하는 것이다. 나는 기념물 놓는 것에 조금 집착한 나머지 더 중요한 점수를 놓쳐버렸는데, 2회차 플레이를 하게 된다면 서로 방해하고 괴롭히는 데 익숙해질 것이 분명하기에 살짝 난항이 예상된다...
[개인 만족도 점수]
J : 90점
Y : 90점
H : 92점
S : 88점
S가 합류했다. 게임 고르는 판에서 서성이다 <맨해튼>을 집어 들었는데, S가 '간단해 보이니까 하자'고 말했다. 1994년 무슨 대상 수상작이라고 쓰여있던 것 같았는데, 20년도 더 된 게임인 셈이다. 역시 클래식의 격이 느껴지는 심플하고도 쿨한 게임이었다. 오래된 게임은 역시 믿고 해도 된다니까.
4인플 기준으로, 각 플레이어는 라운드마다 6개의 빌딩 타일을 미리 준비한다. 빌딩 타일은 1칸부터 4칸까지 있다. 이 6개의 빌딩 타일을 돌아가면서 중앙판에 하나씩 설치한다. 빌딩은 남의 빌딩 위에도 쌓아버릴 수 있는데, 이때는 반드시 자신이 쌓은 빌딩이 상대의 빌딩보다 같거나 많아야 한다.
단, 빌딩 설치에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는데... 바로 카드다. 각 플레이어는 손에 4장의 카드를 들고 있는데, 이 카드에 그려진 대로만 빌딩을 설치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공들여 쌓은 빌딩이 눈앞에서 빼앗겨도 해당 위치가 그려진 빌딩 카드가 없으면 빌딩을 되찾아올 수 없다...
또한 4칸짜리 빌딩은 3개, 3층짜리 빌딩은 4개밖에 없기에, 언제 어디에 쓰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초반부터 H와 붙어 빌딩을 뺏기고, 나중에는 S와 붙었는데... 싸우면서 필요한 구역에 카드가 나오지 않아 이상한 곳에 1짜리 빌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론 운이 좋게도 큰 층수의 빌딩은 싸울 때 다 써먹고, 낮은 층수의 빌딩은 구역 전체에 잘 퍼뜨리면서 점수 벌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 되었다.
이런 류의 게임은 서로 억까하는 게 묘미이기 때문에 감정 상할 일 없도록 다양한 사람을 공격하도록 하자. 그러나 다양한 사람을 공격하는 만큼 뒷감당 또한 자신의 몫이다. (그런 이유로 연인끼리는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개인 만족도 점수]
J : 92점
Y : 90점
H : 92점
S : 98점
Y에게 게임 하나 골라오라고 시켰더니 고심 끝에 골라온 게임. 이쯤부터 난 독감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된다. 따뜻한 유자차(근데 이제 굉장하게 달달한)가 없었으면 기침하다 피를 토했을지도 몰라... 니다벨리르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홉 세계 중 하나로 드워프의 세계다. 마블 영화에선 토르가 스톰브레이커를 만들러 간 곳이지.
여튼, 니다벨리르는 드워프 용병단을 꾸려 점수를 얻는 게임이다. 룰북이 두껍길래 H가 고생하겠다 싶었지만 (룰북은 H 담당이다.) 슥 읽더니 '별 거 없네' 하더라. 그런데 게임이 정말로 직관적이고 간단했다.
각 플레이어는 5개의 개성 있는 직업군을 가진 드워프들을 여관에서 스카우트한다. 스카우트를 할 때는 플레이어들끼리 코인으로 경매를 한다. 높은 코인을 낸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드워프를 데려갈 수 있다.
동률의 경우에는 보석 점수로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동률이 된 사람끼리 보석을 바꿔 장착하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동률로 만났을 때는 우선순위가 뒤바뀌게 되는 재미가 있다. 나는 H와 스타일이 비슷했는지 자꾸 그와 동률이 되었는데 H는 '보석을 바꾸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꾸만 후순위로 밀려났다...
5가지의 서로 다른 직업군을 모두 모집하면 효과가 좋은 영웅 카드를 하나 가져올 수 있다. 영웅 카드도 각각 매력이 있고 효과가 좋아서 꽤나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나는 '어차피 경매에서 꼴찌를 해도 스카우트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경매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코인 업그레이드에 집중했다. 코인 업그레이드는 경매를 포기한 사람이 경매에 쓰이지 않은 코인 2개를 합한 수만큼 높은 코인을 가져오는 방식이다. (ex. 2와 3코인을 쓰지 않았다면 3코인을 2+3=5코인으로 바꾼다.)
그런데 이것도 최고 등급 코인을 Y에게 뺏겼다. (왜인지 모르겠음 갑자기 뺏김) 결국 경매는 경매대로 버리고, 코인도 얻지 못한 셈이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남은 카드들이 죄다 전사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결과적으로는 높은 등급의 코인을 가진 나와 잘 어울리는 용병단 구성을 한 셈이 되었다. H는 광부 메타(이것 때문에 내가 경매에서 자꾸 졌지), S는 대장장이 메타로 각자 뚜렷한 색을 정하고 플레이했다. Y는... 뭐였지?
[만족도랄 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임]
사실 우리에겐 <요트 다이스>보다는 야추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게임이다. 그래서 게임 이름은 <요트 다이스>인데 아무도 요트라고 하지 않고 야추! 야추! 를 외쳐댔다. 요트보다는 야추가 발음이 훨씬 찰지긴 하지...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H는 지하철을 타야 하고 나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한 판 했다.
야추는 주사위 5개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심플한 게임이다. 이 주사위 5개를 각 3번까지 다시 던질 수 있고, 던져진 주사위 결과를 조합하여 점수판에 넣으면 된다.
게임은 시작하자마자 H가 오프닝 야추를 달성하는 바람에, 너무도 뻔하게 H가 우승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연이은 족보 달성 실패로 S가 우승을 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서브토탈 63점을 넘기는 게 중요한데(보너스 점수 35점이 추가된다.) S만이 간신히 넘겼기 때문...
어쨌든 야추는 광대 포지션이 있으면 더 재밌는 게임이다. 점수판이 박살 나더라도 끝까지 야추를 노리는, 이른바 야추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 원래 다른 사람 망하는 거 구경하는 게 재밌는 법이니까...
야추를 성공했다는 성취감이 우승을 했다는 성취감보다 더 큰 요상한 게임이다.
우리는 달마다 회비를 걷어 공금으로 사용하는데, 미니게임을 곁들였다. 보드게임에서 우승하면 1500원을 차감하고, 꼴찌 하면 1500원을 더 내는 것이다. 약간의 동기부여를 추가한 거지만, 우리가 승부에는 진심이기 때문에 그런 거 없이도 열심히 했을 테지. 게임을 좀 더 재밌게 할 장치인 셈이다.
이 날, Y는 연속으로 3패를 하여 +4500원의 영예를 떠안게 되었다. Y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