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감상평 5
별점 : 1개 반
SF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르 중에 하나다. 나는 미적분도 할 줄 모르는 수학 바보 문과 애송이지만, '유전자 복제된 내가 나로 취급될 수 있는가' 같은 과학-철학적 문제에는 큰 재미를 느낀다. 입을 벌린 채 <인터스텔라>를 볼 때나,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테넷>을 볼 때에도 과학적 사실에는 별 관심 없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갈 때 몸이 스파게티화 된다는 사실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나 거슬리는 영화들은 분명 있기 마련이다. 이를 테면 <문폴>이라든가 <승리호> 같은 영화들. <문폴>을 볼 때 친구들과 같이 봤는데, 이 녀석들은 이과생들이었다. <문폴>을 보자고 했던 S는 그래픽에 집중하는 반면, H와 Y는 말도 안 된다며 계속 어이없어했다. 하긴 물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데 사람이 땅에 붙어 있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사실 <문폴>을 나무라는 게 스스로 떳떳하진 못하다.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지, 내가 잠들 정도로 재미없는 영화를 만들면 어쩌라는 거야.
나는 옛날 SF영화들을 좋아한다. <가타카>, <13층>, <바이센테니얼 맨> 같은 90년대에서 00년대 사이의 영화들이다. 과학적 부검이고 뭐고, 그냥 상상력으로 모든 게 납득이 됐던 영화들. 만약에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에게 SF영화를 딱 하나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가타카>를 고를 것이다. 이외에도 그 무렵에 SF영화가 정말 많은데... 당장은 기억이 안 난다.
한국 SF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추억이 있다. <승리호>다. 나는 <승리호>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영화가 별로인 이유를 10가지 들어보라고 한다면 11가지를 들 수도 있어.
그런 고로 정이를 처음 볼 때의 기대감은 바닥 중의 바닥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처음에 영화 제목이 <정이(JUNG-E)>라길래, <월이(WALL-E)>를 한 번 더 볼까.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월-E>도 참 재밌게 봤지. 피규어도 샀을 정도다.
갑자기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어디서 봤더라
<정이>는 <스타워즈>가 1977년에 그랬듯, 영화의 배경에 대해 글로 설명하며 시작한다. 지구가 살 수 없게 되었고, 달과 지구의 궤도 사이에 쉘터를 만들었고... 어디서 본 듯한 내용들. 그리고 조금 볼만한 로봇과의 전투씬이 펼쳐진다. 사실 로봇이랑 인간이 총격전을 하는 게 좀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로봇인데 왜 굳이 인간 형체의 팔로 총을 쏘게 만들어서 조준을 어렵게 만들었을까... 로봇이 쏘는 총인데 왜 다 빗나가는가. '주인공은 절대 총에 맞지 않는다' 법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걸까...
그러나 정이는 사실 오래전 작전을 하다가 식물인간이 된 용병이었고, 방금 전에 본 전투씬은 그녀의 뇌를 뽑아서(복제해서) 전투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아하, 이런 내용이구나. 식상한 듯 신선한. 다시 말하면 아는 맛이어서 군침이 도는 소재였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 무슨 발표 같은 걸 한다. 류경수(이하 상훈)가 나와서 긴장한 연기(수준급이다)를 잔뜩 하면서 발표하길래 뭐 대단한 발표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용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줄글로 질질 설명했던 내용이다. 발표를 듣는 사람들도 지루한 표정으로 '다 아는 얘기구만' 한다. 그래, 다 아는 얘기다. 심지어는 영화가 시작할 때 <월-E> 생각을 하고 있던 나조차도 잘 아는 얘기다.
그런데 '아는 부분은 넘기겠습니다.' 해놓고 왜 자꾸 아는 걸 보여주는가. 넘긴 부분이 또 왜 아는 부분이냐고. 이럴 거면 처음에 질질질 왜 글로 써서 보여줬냐는 말이야. 영화 시작하자마자 눈 뜨고 총격전 했으면 첫 부분이 얼마나 박진감이 넘쳤겠어. 그나저나 100년이 지난 미래인데 무기가 기껏해야 그래플 달린 라이플인 것도 마음에 안 든다. 듄처럼 기술 발전을 막아놨다든가 하는 얘기도 없고, 자원 없다면서 총알 아까운 줄은 모르는 거냐구. 차라리 레이저라도 쏘든가...
그리고 죽은 지 40년이나 지난 전투원의 뇌를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살리려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40년이면 너무 차이나잖아. 혈청 맞은 인간계 최강 캡틴 아메리카도 냉동인간 됐다가 깨어나서 한동안 헤맸는데. 그 전투기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40년이 지난 후에도 그 뇌가 없이는 안 되는 거냐. 심지어 전쟁 중이라며, 전쟁 중에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되는지 모르는 걸까.
영화는 갓 시작했는데,
벌써 슬슬 <승리호>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구리구리하게...
이후에 상훈의 사무실에서 서현과 둘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풍기를 들고 '옛날 사람은 뭘 만들어도 실용성보다는 디자인을 중시한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데, 선풍기가 뭐 어때서. 옛날엔 모든 게 풍족했다면서 자원의 소중함을 얘기하는데, 정이 프로젝트에서 실패한 뇌 같은 건 왜 그냥 소각해서 폐기해 버리는데?
그러나 저러나 뇌를 소각하는 것도 정말 이상하다. AI라면 자고로 패배에서 학습하는 것 아닌가. 이미 정이 프로젝트를 전투 AI 프로젝트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제가 정말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거 AI라고 부르는 게 맞나요???? 백 번 이해해서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임무에서 실패했으면 실패한 데이터를 수집해서 발전해야지, 애꿎은 다리에 총 쏘고 시뮬레이션 상황만 바꾸면 뭐 하는가. 어차피 불태워버릴 텐데.
실망감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기대를 하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기대감을 더 낮춘다니...
이후엔 무슨 내용이 나와도 정말 재미있어야 했다.
안드로이드와 미래
윤리 테스트를 받는다는 서현은 뜬금없이 병원에 갔고, 암에 걸린 상태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아니 뇌도 복제하면서 암은 고칠 수 없는 걸까... 그럼 탈모는?)
서현에게 남은 선택지는 현재의 몸체를 버리고, 뇌를 복제하여 안드로이드 의체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이때 선택지는 3가지가 있다.
A - 인간-로봇 1:1 매칭 / 인간에 준하는 대우 / 비용 많이 듬
B - 결혼, 이사, 입양 불가 / 뇌 복제 데이터 정부기관에 제공 / 비용 쪼끔
C - 기업에게 뇌 데이터 넘김 / 클론 무한 생산(인격체 인정 X) / 오히려 유족들에게 지원금
정이 또한 C타입의 안드로이드인 셈이고, 현재 식물인간 상태인 정이의 몸은 노화된 채 병원에 누워 보존되고 있었다. 결국 정이의 딸인 서현은 정이를 팔아 기업에게 지원을 받으며 연구원이 된 거다.
아무리 A타입으로 몸을 이동한다고 해도, 나 자신이 죽으면 그냥 끝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를 완전히 똑같이 연기하는 '나'가 하나 더 있는 느낌이겠지. 나는 죽으면서 '내가 옮겨졌구나' 생각할 테고...
사이코패스인가...
전투 AI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회장의 지침이 내려온 이후로, 정이 프로젝트는 마지막 불꽃을 내려고 한다. 실험 중 생겼던 의문의 영역(활성화되면 괴력을 냄)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간다. 아니 근데 진짜 궁금한 게, 뇌를 복제할 줄 알면서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고 안되고를 모르면 어쩌란 거임?
인공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뇌지도를 그릴 줄 모르면
끝판왕은 공략했는데, 던전 문지기를 못 잡는 것 아니냐고.
러닝타임은 1시간 가까이 넘어가는데, 막 재밌다거나 그런 부분은 전혀 나오질 않는다.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이 정말 잠깐. 지하철을 탄다든지 하면서 장면으로 스쳐 지나간다. 관객은 여전히 서현이 뭘 하려는지 모르겠다. 서현은 정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어떤 아픔을 겪는가? 어떤...
후반에 아무리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도 용납이 안될 것만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아니, 용서를 못할 것 같다. 이 스크린 기술로 대체 왜 썩어빠진 상상을 하는 거냐고 대체 왜.
이 와중에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이름 모름)은 실험이 끝난 정이의 뇌를 가지고 성적으로 활용하다가 서현에게 걸린다. 직원은 싸패인가. 딸 앞에서 '유족들이 허락을 해줬잖아요'라고 말하는 게 정상적인 각본인가. 아무리 안드로이드라고는 하나 서현이 정이 딸인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걸까... 내가 감성적인 거야, 얘가 싸패인 거야?
모르겠다. 인물들이 다들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있고 기괴해서, 나까지 멍청하게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난장판
예상했던 대로, 영화는 아무튼 난장판으로 치달았다. 따로 얘기할 건 없는 것 같다. 안드로이드 엄마와 그를 지키려는 딸이라는 여성 서사는 나름 신선했다. 신파가 어떻고는 사실 크게 문제는 없겠다. 우리는 이미 살면서 반강제적으로 수많은 신파극을 봐왔다. 우리에게 신파는 이골이 날 수밖에 없는 코드인 거다.
한국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신파는 김치 정도인 걸까, 아무 생각 없이 밥상에 올리면 맛있다고 먹는.
외국인들이 김치의 맛을 처음 보고 맛있다고 하는 것처럼. 해외에서는 <정이>가 꽤나 좋게 평가된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스크린 자체는 볼만하다. 하지만 영화는 화면보호기가 아니다... 마블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말했듯, 사람들은 이미 멋진 CG를 많이 봤다. CG로만 승부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감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한편으로 안타까운 건 사람들은 이제 영화를 통해 대단한 걸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테넷>이 개봉했을 때, 이해가 안 되고 어려워서 짜증 난다며 욕하는 사람들을 봤다. 사람들은 이제 간편하게 볼 수 있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한국 SF에 열광하는 것은, <승리호>와 <정이>가 잘 만든 영화여서가 아니다. SF영화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유의미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승리호>와 <정이>, 그들보다 더 발전하기는커녕 후퇴할 것만 같은 영화들이 계속 등장할 것 같다.
아무리 사람들이 욕하고 비판해도 결국에 보긴 볼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