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秋에 滿醉

by 이종덕

초겨울 비가 자주 내리는 날씨다.

정작 필요할 때는 안 오다가 농사 다 끝내고 나니 며칠째 계속 비가 내린다.

하긴 너무 가물어서 제한 급수하고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고 했으니 반가운 단비이긴 하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인데 비가 내려 거리에는 온통 젖은 낙엽이다.

가을이 농 익었다. 晩秋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회사의 후배들과 초저녁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가을비도 추적 추적 내리고 게다가 불금이었으니 소맥에 세꼬시로 시작한 술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한소리 또 하고, 옛날에 했던 얘기 또 하고 마치 처음 듣는 얘기인 양 박장대소하고 그러면서 찾수가 늘어나고 밤은 깊어 갔다.

이젠 집에 가야지 하고 자리를 털었을 땐 이미 날자가 바뀌어 있었고 비는 오는데 집에 갈 일이 난감했다.


늘 그렇듯이 주말 아침 나는 거실 소파에 얌전히 누어서 잘 자고 있었고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숙취가 시작되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계속해서 조갈이 나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구토까지 나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백약이 무효다. 뭐든지 먹으면 바로 올라오게 되어있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저절로 가라 앉을 때 까지 고통 속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는 술을 먹나 봐라"를 수없이 되뇌며...


나는 조그만 파우치를 들고 다니는데 그 안에 명함지갑, 이어폰, 자동차 키, 지갑 등 거의 모든 소지품을 담아 놓고 쓴다.

이 물건의 행방이 묘연했다. 값도 값이지만 그 물건 하나 하나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 들인데...

마누라가 사준 시계, 사위가 출장길이나 생일 선물로 준 파우치와 몽블랑 명함지갑, 그리고 무선 이어폰...


모처럼 비 개인 화요일 아침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숙취는 기억도 안 나고 파우치도 되찾았다.

나이가 들어 과음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가을이 깊은 것과 비가 내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술을 퍼마시고 그야말로 개고생을 한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결심을 못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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