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아주 옛날에 수유리에 살 때 얘기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중이었는데 날씨는 덥고 공부도 하기 싫어 바둑이나 둘 요량으로 근처에 사는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친구 녀석이 양은 대야에 머리를 처박고 머리를 감고 있었습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친구 놈의 머리를 두어 번 대야에 밀어 넣다가 뺐다가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친구 놈이 마루에 서서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하는 겁니다.
나는 순간 요즘 말로 멘붕이 왔고 내 장난질에 물고문을 당한 사람은 친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분은 그때 이화여고 선생님이셨고 친구의 아버지지만 선생님이라는 것 때문에 막연히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이 녀석아 오늘이 음력으로 몇 월 며칠이냐?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뻔했다 허 허..."하고 그냥 넘어가 주셨지만 그때의 당황스러움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합니다.
2년 전 그 친구의 아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하는데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그때 비누 범벅이 되었던 어른의 얼굴이 생각이나서 웃음을 참아 내느라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문상을 끝내고 친구와 소주 한잔을 나누는데 아까 표정이 왜 그랬냐고 묻더군요.
나는 사실대로 얘기를 했고 상가이긴 하지만 둘이서 박장대소를 하고 웃다가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녀석 잘 지내는지 전화나 한번 해봐야겠습니다.